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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
니나 슈미트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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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등학생 시절 나는 독일 문학과 전혜린에 한창 빠져 있었는데 그 덕분에 내겐 청소년기를 함께 했던 독일 문학에 대한 일종의 '의리'같은 것이 있다. 독일문학이라면, 일단, 무조건, 호감부터 가지고 보는 일종의 부채의식이랄까. 그런데 오랜만에 읽은 독일 현대 소설『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의 인상은 뭐랄까, 표지 내지에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아, 요즘 독일에선 이런 소설이 인기가 있구나, 싶었다.
여러모로 낯이 익은 제목은 내용면에서도 비슷한 제목의 여타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루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권태기에 접어든 연인이 있고, 연인의 옛 연인이 같은 도시로 이사 오고, 사랑의 고전 테마인 삼각관계가 형성되고, 삼각관계에서 빠질 수 없는 양념인 질투로 인해 비롯되는 갖가지 해프닝들이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는 말하자면 독일 칙릿인데, 우리 기준으로 노처녀에 해당하는 34세인 안토니아의 유쾌한 성격과 그 성격이 빚어내는 좌충우돌 해프닝이 여러모로 선배 격인 '브리짓 존스'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안토니아가 하는 고민은 '노처녀'라는 꼬리표와 상관없이 연애를 시작한 모든 여자들이 공통으로 겪는 고민이다.
여자는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데 그리하여 사실상 시작부터 남자와 여자의 연애는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연애의 시작이 남자에겐 사랑을 확인하는 종착역인 반면 여자에겐 사랑을 확인하는 출발역이라는 것이다. 주위에 연애를 하는 여자친구가 있어 본 사람은 다 안다. (남자친구와 이별하기 직전까지)그녀들을 무한반복으로 괴롭히는 고민은 "아무래도 그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는 걸.

안토니아의 좀 독특한 친구 카타는 '2년 위기설'로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의 등장으로 연애에 위기를 맞은 안토니아의 불안을 더욱 부추기는데 카타의 주장처럼 연애가 호르몬만으로 정의되는 것이라면, 그러니까 이론대로 되는 것이라면 인류사의 가장 오랜 이벤트일 '연애'가 얼마나 간단해지겠는가.

소설을 통해 나를 가장 웃겼던 인물은 바로 '흥분한 청소 닭' 카타다. 물론 안토니아의 시니컬한 혼잣말도 재미있다. 서사보다는 사건 중심이고, 화자가 1인칭이라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한바탕 재미있는 수다를 듣고 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원제가 궁금해서 확인하니 '누구 하나 울 때까지'다. 원래 제목이 훨씬 좋은데 왜 제목을 바꿨을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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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 코끼리의 등>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코끼리의 등
아키모토 야스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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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정과 사회(직장)에서 안정된 위치에 있는 중년 남자가 어느 날 말기 폐암 진단과 함께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6개월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연명치료를 받을 것인가의 기로에 선 남자는 연명치료를 포기하고 남은 인생을 충실하게 살기로 결심한다. 여기에서 남자가 '충실하게'의 방점을 찍는 곳은 살아오는 동안 자신이 빚을 진 상대를 찾아 그 빚을 청산하리라는 결심이다. 그리하여 제일 처음 남자가 찾은 이는 제대로 고백 한 번 못 해보고 끝난 첫 사랑이다. 다음은 사소한 말다툼 끝에 30년 남짓 절교 상태로 있는 단짝 친구... 이렇게 남자는 조금씩 자신의 주변을 정리해나간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만약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할까.
이왕이면 아프지 않고, 더 젊게, 더 오래 살고 싶은 소망의 끝에 있는 것은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죽음이 슬픈 것은 누군가의 부재가 남겨진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떠나는 사람에게 남은 사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내는 사람 역시 떠나는 사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콧날이 찡했던 부분은 남자가 형과 대면한 자리에서 "내가 죽은 다음에..."라고 죽음에 관한 직접적인 표현을 했을 때였다.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남자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그것이 남자로서는 불가항력인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처연하게 다가온다.

읽기가 힘든 소설이었다.
작가의 진지한 문장도, 행간에 깃든 조용한 성찰도 좋았으나 그럼에도 읽기가 힘들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취향 탓이다. 잡식성 취향이지만 그럼에도 기피하는 장르는 있다. 바로 메디컬 류다. 드라마든 다큐멘터리든 소재나 배경이 메디컬 쪽이면 설령 그것이 코믹 장르라고 해도 의도적으로 채널을 돌려 버린다. 그래서 이제껏 내가 본 메디컬 드라마는 다섯 손가락도 못 채운다. 이는 영상을 볼 때 감정이입을 심하게 하는 기질 탓이 큰데 내 정서가 화면 속 메디컬 특유의 정서를 버텨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말 그대로 숙제를 끝낸 듯 홀가분한 기분까지 들었다. 

흑백을 구분하듯 구분하는 것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은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작가가 남성인 것을 의식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 나(주인공 후지야마)와 나의 여인들의 관계가 그렇다. 나에겐 아내 외에도 5년간 연인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열다섯 살 연하의 에쓰코가 있는데 냉소적이고 쿨(cool)한 여성 에쓰코는 그렇다고 치고, 말기 폐암 진단을 받은 후 오랜 세월을 사이에 두고 재회한 두 여인이 후지야마를 기억하는 방식은 '이거야말로 남자의 로망'이라고 작가의 성별을 확인하게 한다. 물론 버려지다시피 남자로부터 일방적으로 관계를 단절당한 여자들이 모두 옛 남자에게 원한을 품고 살지는 않겠지만 그렇더라도 그 오랜 세월을 자기를 버린 남자를 그리워하며 사는 여자들이라니, 이건 아무래도 남자들의 판타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박범신의 신작『은교』에는 독일인 작가 실러의 '시간의 세 가지 걸음' 인용이 나온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다' 

인간이 하는 대부분의 고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에 관한 것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틀 전 엄마랑 통화할 때 엄마가 "오늘이 선물"이라는 얘기를 하셨는데, 물론 현재를 감사하고 현재에 충실 하라는 의미로, 최근 고민이 생긴 딸에게 엄마 나름대로 격려를 해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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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박완서 지음 / 창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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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었던 다른 소설들에 비해 조금 얇다고 느꼈던 총 234페이지의 이 산문집은 그러나 칠순이 훌쩍 넘은 작가의 진중한 삶의 무게로 인해 두께와 상관없이 풍성하고 곡진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집 근처가 호수이기도 하고 내가 유난히 극성인 탓도 있지만) '비오는 날은 모기가 없다'는 항간의 설만 믿고 창을 다 열어두었더니 집안 곳곳으로 장마를 앞두고 물기를 잔뜩 머금은 서늘한 바람이 참 시원하게도 밀려 들어온다. 덕분에 기분도 좋고 하여 오랜만에 오디오에 바흐의 CD를 걸고 분위기를 제대로 만든 다음『두부』를 집어 들고 소파에 앉았는데 중간쯤 읽었을 때 그만 독서에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산문의 첫 문장이 '가을이 산을 내려오고 있다'였던 것. 앞서「가을의 예감」이라는 제목의 산문도 아무렇지 않게 읽어놓고선 저 한 문장엔 가슴이 덜컹한 것이다.

아직 여름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벌써 가을이라니... 이 한 문장을 보는 순간 괜스레 뜨악해져버렸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해당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고 책을 얌전히 덮었다. 한창 재미있게 읽고 있던 이 책은 아무래도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되어야 다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심리는 매시간, 매분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은 죄책감에서 기인한다.
읽기를 중단하기 직전에 읽었던 챕터에 등장하는 꽃에 관한 얘기는 노작가의 꽃을 향한 절절한 열정과 애정이 느껴지는데 작가의 꽃 묘사는 정말이지 감탄을 절로 불러일으킨다.
<무릎팍 도사 - 엄홍길 대장편>에서 엄 대장이 8000미터 고도의 빙벽에 매달려서 듣는 바람소리를 '짐승울음소리 같은 바람소리'라고 표현했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적절한 비유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그 자체로 얼마나 웅변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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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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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하철은 나른한 오후의 아랫배를 머리로 들이받으며 내천(川)자가 들어간 도시의 이름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 p.118 

국어 문법에서 '은유법' 은 독소항목인가 의심케만드는 다섯번째 단편「영원한 화자」는 이런 지독한 은유외에도 의미가 분절되어 도무지 앞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그래서 금방 읽고도 뭘 읽었는지 도통 의미 파악이 안 되는 문장들로 가득하다. 다른 단편「종이물고기」에 등장하는 '실패한 농담들의 쓰레기장' 포스트잇을 위 단편에 붙여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물론 총 아홉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달려라, 아비』에는「종이물고기」,「노크하지 않는 집」과 같은 괜찮은 단편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괜찮은'과 '안 괜찮은'의 간극이 너무 크다.
한 곳에서 다양한 음식을 맛 볼 수 있는 반면 그럴 듯한 겉모습에 끌려서 집어 먹었다가 괜히 배만 채우게 되는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뷔페와 단편소설집은 여러모로 비슷하다.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하는 김애란의 소설집를 읽고 난 소감은 뭐라고 한 마디로 정리할 수가 없다. 그녀가 너무 앞서갔거나 내가 너무 뒤처졌거나, 범인(凡人)인 나는 짐작도 할 수 없는 문단의 음모이거나, 문학의 위기라고 부르짖는 평단의 위기이거나... 뭐, 아무려면 어떠한가.
그럼에도 기어이 하고 싶은 말은 여덟번째 단편을 읽기 시작한 직후,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등장하는 그 놈의 '아버지' 타령에 "아, 이젠 정말 지겹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는 것.
국내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건 이제 겨우 3년 남짓. 읽으면 읽을 수록 난감하다. 더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몇 몇 작가들 덕분에 간신히 버티고 있다. 재능의 가치란 그것의 희소성에 있다는 점에서 세상은 공평하다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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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1인용 식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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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와 관련하여, 개인적인 경험 몇 가지.

1.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스쿨버스를 운행했는데 내가 워낙 아침잠이 많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스쿨버스를 놓치고 시내버스로 등교했다. 그날도 스쿨버스를 놓치고 시내버스를 탄 날이었다. 출근 시간 버스는 미어터지는 승객들로 말 그대로 콩나물시루가 되어 다음 정류소에 도착했고,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버스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버스로 몰려들었다. 아우성으로 시끄러운 곳은 버스 바깥만이 아니었다. 공간이라고는 머리 위 천장 밖에 안 남은 버스 안에서 기어이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기사아저씨, 그만 태워요!"

2. 어느 날 냉장고에서 요구르트를 꺼냈는데 별 생각 없이 들여다 본 병 표면의 유통기한이 이틀이나 지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걸 마셔도 될까, 고민에 빠졌다.

3. 아마 할로윈 위크였던 걸로 기억한다. S와 일정에 없던 Thousand Islands를 향해 갑자기 출발한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1000섬에 있다는 맥도날드 회장의 별장을 보러 가자'가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출발은 산뜻하고 경쾌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여행의 끝은 그다지 산뜻하지 못했다. 어디에서 길을 잘못 들었는지 지평선 너머는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데도 섬은커녕 물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기껏 나선 길에 아무 것도 못 보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계속 앞으로 앞으로 달리는데 어느 순간 어둑어둑해진 도로 저 앞으로 반짝이는 불빛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오호라, 저기구나, 좋아하며 얼른 그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차를 되돌리기엔 이미 늦은 지점까지 가서야 깨달았다. 그곳은 맥도날드 회장의 별장이 있다는 1000섬이 아니라 캐나다로 넘어가는 국경이었던 것이다. 일방통행 도로를 하나씩 양쪽에 끼고 가운데 커다란 단층 회색 건물 하나가 전부인 그곳이 미국과 캐나다를 가르는 국경이었다. 단순한 생각으로 국경을 통과하기가 무섭게 차를 빙그르르- 되돌려 그대로 속력을 내려는 순간 초소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영화에서나 듣던 "Freeze"소리를 들으며 반 강제로 차에서 내린 우리는 그제야 둘 다 여권도 학생증도 안 챙긴 것을 알았고 별 수 없이 국경 이민국 사무실에서 여권 번호를 불러 주고도 일 없이 2시간이나 붙들려 있다가 풀려날 수 있었다. 

이렇듯 살아오는 동안 나는 많은 경계를 만났고 경계 위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며 그중에는 의식/무의식적으로 경계를 들락날락 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물론 사는 동안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저와 같은 물적, 심적 경계와 수없이 마주칠 것이다.
경계는 우리의 의식과 생활, 우리가 누리는 물질세계, 정신세계 어디에도 존재한다. 다만 그것의 속성이 워낙 모호하고 희미하여 미처 못 느낄 뿐, 실제로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의 간섭을 받으면서 산다. 그러므로 경계의 바깥과 안을 가르는 것도 의미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저자가 제목으로 선택한 단어 '바깥'의 의미가 확대되는 것을 걱정하는 것도 일견 이해가 갈 듯도 하다.
저자가 선택한 것은 경계가 가르는 두 방향 중에서도 '바깥'이다. 그래서 제목도『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이다. 보통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은 '안으로 들어간다' 또는 '바깥으로 나간다'인데, '안'과 '바깥'이라는 단어의 쓰임새가 원래 그러하다. 그런데도 저자는 굳이 '바깥으로 들어갔다'고 쓴다. 간단한 표현의 차이일 뿐이지만 이 간단한 차이로 경계의 이쪽과 저쪽 즉, 안과 밖을 어느 한쪽의 소외된 공간이 아닌 수평적 공간으로 보고자 하는 저자의 배려가 읽힌다.
책을 읽으면서 '바깥'의 의미가 선뜻 와 닿지 않았는데 세 번째 챕터인 '퇴역마'에서 이 책의 제목 '바깥'의 단어의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막걸리'에 이르렀을 때 '바깥'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졌다. 그것은 물질일 수도 있고, 미추일 수도 있고, 역사일 수도 있다. 자의와 상관없이 바깥으로 밀려난 것도 있을 것이고, 스스로 바깥에 자리 잡았을 수도 있다. 밀려난 것들은 안으로부터 소외된 것일 테고, 스스로 자리 잡은 것들은 안을 밀어낸 것일 터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곳에도 희망은 있다. 안의 바깥은 또 다른 새로운 '안'이 되어 자생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10여 년 전이던가, M군이 '컬트'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나는 아마 "소수의 마니아적인 취미'라는 내용의 대답을 했던 것 같은데 그러자 M군이 "그럼 지금은 컬트지만 이후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아지면 컬트가 아닌 게 되는 거냐"고 되물었던 것이 기억난다. 기실 주류와 비주류, 안과 바깥을 나누는 것은 내 편, 네 편 나누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경계에 무관심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수평적 사고는 양쪽을 모두 고르게 보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니 미리부터 문을 꼭꼭 걸어 잠글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안과 바깥이 자유롭게 흐르는 것. 결국 중요한 건 소통이니까.

사람은 누구나 사물에 관하여 일정 부분 나름의 강박 증세를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내 강박의 8할 이상은 책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애서가보다 공서가에 가까운 나는 책을 그야말로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데 당연히 책에 밑줄을 긋는다는 건 상상도 못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밑줄을 긋고 싶은 충동이 여러 번 일었다. 일단 책을 펼치자마자 마주치는 책머리부터 저자의 유혹이 만만치 않다. 저자가 읽었다는 다니엘 켈만의 소설을 나는 아직 읽어 보지 않았으나 저자가 인용한, 책에 밑줄을 쳤다는 부분, '진실은 오로지 분위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거야. 그려진 형태가 아니라 색채 속에. 정확하게 포착된 소실점은 진실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에 나 역시 주저 없이 밑줄을 긋고 싶었다. 물론 나는 밑줄 대신 포스트잇을 붙였지만.
말이 나온 김에 포스트잇을 붙인 문장 두 개를 더 인용한다.

물론 우습다는 건 '과거의 미욱함'을 두고 한 말이다.
절망은 감정의 거스러미이고, 세상 어디에도 논리적 절망이란 없다. 그리고 우스운 절망, 우스워할 만한 타인의 절망도 없다. - p.159


세계시장에 진출하려는 막걸리 경쟁의 양상이 지역 단위 양조장까지 질식시킬 정도로 '와일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경쟁의 논리란 본래의 의미와 달리 힘센 자들이 사후적으로 펼치는 패권의 논리인 경우가 많고, 그 논리는 문화의 본래적 의미에 비춰 비문화적이거나 반문화적이기 쉽기 때문이다. - pp.324-326


책이 예쁘다. 제목은 더 예쁘다. 내용은 말 할 것도 없다. 썩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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