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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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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보다 더 인간다운'은 로봇SF 장르의 보편적인 주제인데, 이 말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여'를 강조하는 것처럼 들린다. 참고로 안드로이드라는 개념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270년이라고 한다.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 SF물 중 (개인적으로)최고로 꼽는 것은 단연 리들리 스콧의《블레이드 러너》다.

"이 모든 순간들이 시간속에 묻혀버리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 됐어...(All those momen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time to die...)."

쏟아지는 빗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4년의 삶을 마무리하는 로이의 모습을 보며 로이에게 '인간성'이 없다고 과연 단언할 수 있을까. 한편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 레이첼은 데커드에게 왜 자신이 인간인가(인간일 수 밖에 없는가)를 계속해서 설명하는데,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을 믿지 못하여 고민하는 동안 안드로이드 역시 자신이 왜 인간과 다르다는 것인가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은 로봇SF의 고전적인 테제다. 물론 인간과 안드로이드 사이에 일어나는 이러한 문답은『2058제네시스』에서도 이어진다.

『2058제네시스』는 목차가 따로 없고 1교시, 2교시, 3교시, 4교시로 전개되는데, 1교시가 끝날 때마다 휴식 시간이 있다. 이는 수업이 아닌 시험 시간의 분류이며, 국가 최고 기관인 '학술원' 시험에 응시한 아낙시멘더(이후 '아낙스')의 시험 과정이 전체의 틀이고, 아담과 안드로이드 아트의 얘기가 내용의 줄기를 이루는 액자소설이다.
시험은 구술과 면접으로 이루어지는데 아낙스가 준비한 과제가 바로 '아담 포드'이다. 이 책의 원제 'Genesis'에 역자가 덧붙인 '2058'은 아담의 출생 년도를 뜻한다. 

지구에 불어닥친 대전쟁과 전염병 이후 플라톤은 섬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섬 주위를 방벽으로 둘러싼 다음 외부로부터의 침입, 유입을 일체 거부하고 저지한다. 하지만 이제껏 없었던 완벽한 세상처럼 보였던 플라톤의 제국도 공포와 위기의 시대가 지나가자 불만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는 얼핏 오랜 전쟁을 끝낸 완벽한 영웅이 우주에서 가장 완벽한 세상을 만들지만 점차 이 '완벽함'조차 불만으로 느끼는 군상들을 보여준 프랭크 허버트의『듄』의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데, 물론 아트레이드의 세계와 플라톤의 세계는 전혀 다르다. 플라톤 제국의 문제점은 플라톤이 이상적인 사회를 모든 것이 통제되는 사회와 동일한 개념으로 정의해버림으로써 시민의 자유를 제한했다는 데에 있다. 자유란 인간이 누리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데, 인간을 위한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 인간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역설이 생겨난 셈.
그리고 이러한 역설이 낳은 것이 바로 아담 포드이다. 아담은 제국이 가장 원하지 않는 인간형인 '반항하는 인간'이지만 급증하는 시민들의 불만에 직면하여 아담을 처형할 수도, 풀어줄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 정부는 가장 진보된 안드로이드 아트의 테스트 상대로 아담을 활용하기로 결정한다. 즉 살려는 두되, 자유를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아트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은 부분으로 쪼개면 모두 우연에 의해 발생된 것 같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 어쩐지 필연성이 느껴진다.
아낙스는 시험관과의 문답 과정에서 점차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인과율의 신화'가 그것이다. 

인과율의 신화: 이 말은 모든 일은 원인에서 발생한 결과이며, 원인이 없이는 아무 것도 생기지 못한다는 인과율의 법칙을 맹신하는 것을 비꼬는 말이다. 맨 첫 원인도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데에서 인과율의 허구가 발견된다. - p.27,『2058제네시스』 

아낙스는 인과율에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문답이 거듭될수록 아낙스의 주장은 오히려 인과의 필연성을 좇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로봇SF를 접할 때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픽션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로봇, 그러니까 안드로이드는 대부분 긍정적인 호감을 끌어낸다. 물론 이 호감의 배경은 안드로이드의 '인간성(비슷한 것)'에 있다. 인간의 상상물이니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으나 이유야 어떻든 아담과 설전을 벌이는 아트는 근래 내가 만난 안드로이드 중 가장 호감 가는 녀석이었다. 유머 감각이 넘치고, 때로는 신랄하며, (고집스러운 아담 때문에)때로 절망도 하는 아트의 모습은 '인간적'이라는 단어 외에는 표현이 안 된다. - 불만이 있다면 지극히 미국인스럽다는 것 정도. 

책 전반부에선 철학자, 기술자, 군인, 노동자로 나뉘는 시민의 계급이 출생과 동시에 유전자의 게놈 정보를 해독하여 분류된다는 점에서 영화《가타카》가 연상되었고, 책 중반의 아담의 생애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부분에선 감정마저도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이퀼리브리엄》이, 그리고 책이 끝나갈 무렵에는, 책 내용과 상관없이, 완벽한 세상을 꾸며주었더니 자꾸만 불만이 속출하여 불완전한 세상으로 시스템을 수정하였다는 영화《매트릭스》의 세계관이 떠오른다. 우울한 얘기지만 아무래도 SF가 상상하는 미래는 디스토피아(dystopia)에 근접해있는 듯 하다. 

아는 만큼 읽히는 책이다. 책을 얼마쯤 읽었을 때, 이 책은 재독하는 책이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의 반전도 굉장히 인상적이다. - 중간 지점 쯤에서 마주친 어느 문장에, 어?, 하다가 마지막 장을 펼쳐보는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원래 나는 스포일링(당하는 것)을 즐기지만 이는 영화에 국한되는 것이지 책은 별개다. 마지막 장을 미리 펼쳐보는 짓을 하는 '책'은 만화책이 유일한데 이 역시도 해피엔딩이 아니면 안 읽기 때문에 생겨난 버릇이다.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부처는 무엇입니까" 묻는 제자에게 "똥막대기다"했다는 스승의 선문답을 떠올리게 한다. 원래 이런 문제는 정답이 없는 법이다.
책을 읽고 여운이 길게 남는다는 의미는 독서 중에 자극받은 지적 호기심이 독서가 끝난 후에도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 역시 그러하다. SF에 거부감이 없는 이들에게 일독해 볼 것을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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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링크 - 첫 2초의 힘
말콤 글래드웰 지음, 이무열 옮김, 황상민 감수 / 21세기북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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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글래드웰의『블링크』는 제목을 부연하는 '첫 2초의 힘'에서 보여지듯 '직관적 사고'를 얘기하는 책이다. 그런 만큼 책을 펼치면 직관적 사고의 힘을 보여주는 다양한 예들이 쏟아지는데 책읽기가 재미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책에서 제시되는 많은 예들이 실제 내 주변에서도 다양한 형태로(물론 본질은 같다) 일어나고 있어 익숙하다는 것에 있다.

3장「우리는 왜 키크고 잘생긴 남자에게 반하는가」는 말하자면 본질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하는 외부 요소들에 관한 얘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은 '지극히 대통령다운 외모여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손꼽히는 워렌 하딩의 얘기로 시작한다.
이 장을 읽으면서 영화《퍼시픽 하이츠》를 떠올렸는데, 영화 내용은 대충 이렇다. 은행 대출을 받아 무리를 해서 집을 산 젊은 백인 부부는 아래층 방 두 개를 세를 놓아 대출을 갚을 계획이다. 그리고 일본인 부부와 여러모로 썩 괜찮아 보이는 백인 남자(카터)를 세입자로 들이는데 이 때부터 부부에게 재앙이 시작된다. 이 영화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세입자의 계획된 횡포로 영화적 갈등이 절정으로 치달을 무렵에 등장한다. 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하러 간 부부가 그곳에서 흑인 경찰과 마주치자 낭패한 기색을 하는데 이유가 있다. 그 흑인 경찰은 애초에 부부의 집에 세들기로 하였으나 뒤에 나타난 카터에게 밀려 입주를 거절당했던 것. 물론 카터가 상당한 액수의 몇 개월 치 월세 선불을 약속한 것도 있지만 부부가 카터에게 마음이 기운 것은 두 사람의 피부색과 무관하지 않다.

4장「생각하기 위해 멈춰 서지 말라」는 정보의 과잉이 오히려 정확한 판단을 방해하는 것에 관해 얘기한다. 미 국방부의 전쟁 게임 시나리오 '밀레니엄 프로젝트'로 시작하는 이 장을 나는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나 역시 'C&C', 'War Craft' 등의 전략시뮬게임을 즐겼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아무래도 오락적으로 읽혔음을 부인할 수 없다. - 사실 나는 Star Craft엔 별 재미를 못 느꼈다. (나한테) 이 장르의 최고는 뭐니뭐니 해도 '워 크래프트II'다.
정보과잉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펀드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재작년 10월에 M군을 쫓아 나도 펀드를 매수했는데 매수 시점에 대해선 M군과 나의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에 의사결정이 편했으나, 매도 시점에 이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두 사람의 의견이 전혀 달랐기 때문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M군의 판단이 옳았고, M군의 의견을 쫓은 나는 머리 꼭대기는 아니나 귀 정도에서 매도하였으며, 덕분에 어디 가서 자랑할 정도는 되는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매도 시점에 관해 M군과 나의 의견이 거의 대립하다시피 달랐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정보의 양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넘쳐나는 정보들로 인해 오히려 판단에 방해를 받았던 반면, M군이 판단에 활용한 정보는 겨우 두어 가지에 불과했다.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이 항상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도 예외는 아닌데 정보의 가치가 그것의 활용에 있다고 할 때, 정보의 양적 수집과 접근 용이성이 뛰어난 현대 사회에선 중요한 것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거르는 것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장에선 '직관적인 사고'와 관련하여 통찰력 퀴즈가 등장한다. 

한 남자와 그 아들이 심각한 자동차 사고를 당한다. 아버지는 죽고 아들은 응급실로 급송된다. 도착하는 순간, 당직 의사가 아이를 보고 숨이 넘어갈 듯 소리친다. "이 아이는 내 아들입니다!" 의사는 과연 누굴까? - p.166

거대한 철제 삼각뿔이 뒤집어진 채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살짝만 움직여도 삼각뿔은 넘어진다. 삼각뿔 밑에는 100달러짜리 지폐가 한 장 있다. 피라미드를 건드리지 않고 지폐를 치울 방법이 있을까? - p.167

 첫 번째 문제는 내용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이미 너무 흔하고 익숙해진 문제라 아마 읽는 순간 답을 맞춘 사람이 많을 듯 하다.

보통 이런 종류의 문제를 접하면 나는 예외없이 M군에게 '맞춰 봐'를 하는데 물론 그때마다 M군은 예외없이 얄밉도록 잘 맞춘다. 이번에도 두 번째 문제를 읽어주기가 무섭게 바로 대답이 나왔다. 직관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 문제의 대답을 어렵지 않게 구할 것이다. 하지만 고백하건데 나는 분석적 사고를 선호하고 그것에 익숙한 인간인지라 답을 알기 전에도, 답을 알고 난 후에도 '그게 뭐야' 했다.
나의 '친한 사람'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 중 머리가 가장 좋은 M군은 아이큐가 156이며 멘사회원이다. 회원은 아니지만 심심풀이 삼아 인터넷에 떠도는 멘사 시험을 풀어본 경험으로 나와 M군의 가장 큰 차이는 평면으로 펼쳐놓은 도형의 원래 모양을 이미지화하는 것에 있다. 다른 문제는 별 어려움 없이 푸는데 유독 펼쳐놓은 평면 도형만 나오면 머리 속이 뒤죽박죽 되면서 생각하기(이미지를 만들기)가 귀찮아지는 것이다. 한 번 접고, 두 번 접고... 한 네 번까지 그럭저럭 접는데 그러고선... 끝이다.

5장「원하는 것을 묻는 방법」은 록 음악을 하는 케나((Kenna Zemedkun)의 얘기로 시작한다. 이 장은 한 마디로 고정관념의 허와 실에 관한 얘기라고 할 수 있다.
M군과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은 M군은 직관적 사고에, 나는 분석적 사고에 익숙하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M군과 나의 사고 방식이 대립의 위치에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경험에 의한 것이든,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든 이는 어디까지나 각자의 기질이 선호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 직관적 사고의 반대는 분석적 사고가 아니라 오히려 고정관념이라고 봐야 한다.
케나의 예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서태지가 처음 공중파에 출연해서 '난 알아요'를 선보였을 때 알려진 바대로 심사위원들의 평은 굉장히 냉정했는데 그들이 그런 평을 내린 것은, 말콤 글래드웰에 의하면, 서태지의 음악이 나빠서가 아니라 낯설었기 때문이다. 낯선 것. 익숙하지 않은 것을 접했을 때 인간이 보이는 가장 보편적인 반응은 '당황'이다. 현역 가수이기도 했던 한 심사위원의 "시도는 좋았다고 본다"는 평이 당시 상황을 잘 나타낸다.

6장「빠르게, 그러나 여백을 두어라」

"우리 얼굴은 2개의 근육만으로도 300가지 조합이 생깁니다. 세번째 근육을 추가하면 4,000가지가 넘지요. 우리는 5개 근육까지 조합해 봤는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얼굴 형상이 1만 가지가 넘더군요."
물론 1만 가지 표정 중 대다수는 별 의미가 없다. 아이들의 무표정한 얼굴과 같다.  그들은 각 작동단위들을 조합해 가면서 뭔가 의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약 3,000가지의 표정을 식별해 냈다. 동시에 사람 얼굴의 필수적인 감정 표현 목록까지 완성했다. - p.261

아마 미드를 즐겨 보는 사람이라면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내가 그랬듯《Lie to me》를 떠올렸을 것 같다. 검색을 해 보니 역시 라이트만 박사는 폴 에크만을 모델로 한 인물이라고 한다.
억지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얼마 전에 CSI(뉴욕이던가)를 보던 중에 "쟤가 범인이야!" 외치고 자신있게 덧붙였다. "왜인지는 '라이투미'를 보면 알아!". 실제로 내가 지목한 인물이 범인이었다. - 사실 드라마 속 범인은 '나 범인이오!' 티를 내기 마련이라 범인이 누구인지를 맞추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스쳐가듯 취하는 표정, 행동들이 실은 일정한 패턴을 가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블링크』가 얘기하는 '직관적 사고의 힘'을 읽은 후 나의 결론은 이러하다. 정보를 다루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것. 다행인 건 직관적 사고도 경험이나 훈련에 의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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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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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27명의 왕 중에 독살설이 도는 왕이 여덟이라 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왕이 아마 정조일 것인데 정조만큼이나 유명한 독살설의 주인공이 바로 소현세자다. 조선조를 거쳐 간 수많은 세자들 중 유독 소현의 이름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건 그의 죽음에 얽힌 의혹 때문이다.
병자호란은 전쟁에 패한 인조가 치욕적인 3배9고두(三拜九叩頭)를 하고, 두 세자를 청에 인질로 보내야 했던 치욕 때문에도 그렇지만, 9년에 걸친 볼모 생활 끝에 조선의 궁으로 돌아온 지 불과 2달여 만에 비명횡사한 왕세자 소현으로 인해 더욱 비극적인 역사로 남았다.
그럼 누가 소현을 죽였는가. 소현은 왜 죽었는가.
기록은 세자의 사망 원인을 학질이라고 남겼으나 세자의 사후에 처 강빈을 비롯하여 어린 두 아들이 유배지에서 차례로 사망함으로써 세자의 죽음에 숱한 의혹을 남기게 된다.

소현세자의 독살설에 흥미를 가지고 책을 펼친다면 아마 실망할지도 모를 소설『소현』은 소현세자의 죽음을 다루고 있지 않다. 대신 세자가 인질의 신분으로 보냈던 심양에서의 9년, 그 중에서도 마지막 2년에 집중한다. 또한 작가의 시선이 향하는 것도 사건이 아니라 인물이다. 그리하여 소현세자와 소현세자를 중심으로 한 주변 인물들의 내밀한 독백은 이 소설을 역사의 기록이 아닌 개인의 기록으로 읽히게 한다. 

소설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
이는 김훈이 소설『남한산성』에서 한 말이다. 그것이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의 걱정이든 허세이든 막상 읽는 입장에선 실재하는 사건, 실재하는 인물을 다룬다는 점에서 역사소설이 소설로만 읽히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인물의 대사는 육성으로, 인물의 처지는 기록으로 매 순간 그것의 사실성을 드러내는데 그 앞에서 제아무리 "이건 그저 소설이야", "이건 역사적 기록에 작가의 상상을 덧붙인 얘기일 뿐이야" 해본들 그 뿐인 것이다.

그럼 역사소설에서 인물과 기록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김훈이 충고한 대로 이 소설을 소설로만 읽고 싶다면 소현이나 봉림, 심기원 등의 실존인물보다는 작가가 창조해낸 허구의 인물 만상과 막금에게 집중하며 읽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사실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애틋한 애정이 느껴지는 인물이 만상과 막금이었다. 조선을 떠나 변발을 하고 청인 행세를 하며 역관 노릇으로 먹고 사는 만상은 흔히 하는 말로 좋은 놈은 아니다. 오히려 조선인을 등쳐먹고 사는 나쁜 놈 중에 나쁜 놈이다. 그리고 막금은 전란 통에 미처 신 내림을 받지 못한 무녀 아닌 무녀다. 더 오를 곳이 없는 소현세자와 달리 더 내려갈 곳이 없는 이가 이들 두 사람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 두 사람은 대하면 대할수록 연민이 솟구친다. 어떡하든 살아남으려는 만상과 이제 그만 죽여 달라 애원하는 막금은 동장군이 점령한 황무지 아래 숨죽인 씨앗처럼 질기고 질긴 삶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서로를 혹은 자신을 믿지 못하여 외로운 자들이다.
특히 소설의 중심에 있는 세자는 임금이 아들인 자신을 위하여 울어줄 것인가 번민하고, 석경이 자신의 편인가 아니면 적인가 믿지 못하여 외롭고, 봉림이 아직 자신에게 등을 돌리지 않았구나 헤아리기 위하여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삶에 지칠 대로 지쳐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세자를 가장 외롭게 하는 이는 바로 아버지 인조다.  

임금의 반정은 명의 재조지은을 잊은 광해를 내몬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임금의 자리가 거기에 있었으니, 임금이 수백 번 수천 번 적의 황제 앞에서 이마를 찧는다 하더라도, 임금이 명나라를 받들어 임금이 되었던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임금을 임금의 자리에 올린 자들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 그러나 명을 등지면 남는 것이 없었다. 광해를 치면서 씨를 말리듯 내몰았던 광해의 정파가 다시 일어선다면, 그들에게 돌아올 것은 한때 광해의 정파가 그러했던 것처럼 멸문과 죽음뿐이었다. - pp.160-161,『소현』

  

정리하면,『소현』을 나는 두 가지 관점으로 읽었다.
1. 화자의 내밀한 독백을 통해 드러나는 인물과 인물의 관계
2. 독특한 문장 구조에서 드러나는 개성적인 문체
문제는 2의 문체인데, 작가는 작가의 기존 소설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문체를 이번 소설에서 보여준다. 

『비평과 진단』에서 들뢰즈는「H.멜빌의 바틀비」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I would prefer not to'를 두고 비문법적 문장을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대사의 상투성을 강조하여 독자로 하여금 인물의 사실감을 느끼게 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하였는데 국내 작가 중에 비문법적 구조를 가장 효과적으로 가장 적절하게 쓰는 이가 바로 김훈이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남한산성』

김훈을 김훈이게 하는 가장 큰 특징은 압축된(혹은 응축된) 단문 혹은 복문과 역설적인 어법으로 완성되는 문체에 있다. 한편 단문과 달리 장문은 역설적인 구조 탓에 중언부언이 매우 잦은데 그럼에도 문장이 수다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순전히 작가의 내공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칼의 노래』, 김훈

말들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소현』, 김인숙 

『칼의 노래』서문에서도 밝혔지만 김훈은 조사 선택에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하는데 '꽃은'과 '꽃이'의 사이에서 고민한 산물이 위의 문장이다. 인용한 문장에서도 드러나지만 김훈의 단문은 칼로 자른 단면마냥 딱 떨어지는 특징이 있다.
* 인용한 문장은 모두 소설을 시작하는 첫 문장이다.

김인숙의 신작을 읽으면서 김훈을 떠올리는 것은『소현』이 내용상 김훈의 장편『남한산성』을 잇는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문체의 유사성 탓이 크다. 그런 점에서 김훈의 문체가 버겁게 느껴졌다면『소현』은 김훈식 문체를 한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천천히 꼭꼭 씹을수록 단 맛이 도는 그리고 소화가 잘 되는 잘 지은 잡곡밥 같은 소설. 이것이『소현』을 읽고 난 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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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lvia 2010-05-06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인숙의 문체가 김훈과 닮았다는 건 저만 느낀 것이 아니었군요.

인삼밭에그아낙네 2010-05-17 00:47   좋아요 0 | URL
silvia님도 그러셨군요.
 

살다 보면, 보이지 않는 손의 장난인가 싶게 지속적인 우연과 마주칠 때가 있다.
말하자면 올 4월, 바틀비(Bartleby)가 그랬다.

지난 달(3월)에 창비세계문학전집에서 우연히 바틀비를 만난 이후, 이제껏 모르고 살았던 바틀비가 어쩜 그렇게도 자주 내 앞에 나타나는지, 정말이지 H.멜빌의 바틀비는 너무 자주 그리고 아무 데서나 나타났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들뢰즈의『비평과 진단』은 물론, 부산 어느 서점에서 산『모든 기다림의 순간...』에서도, 절판으로 못 구했다가 뒤늦게 구매한 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도 불쑥 나타나더니, 전혀 상관없는 검색어를 치고 찾아 들어간 어느 개인 홈에서마저 바틀비다. 그러니 이쯤 되면 웃을 수밖에.

예시나 조짐이었던 걸까.
4월은, 잔인한 달까지는 아니더라도 익숙하지 않은 것과 연속으로 마주쳐야 하는 낯설고 불편한 경험 때문에 정신적으로 긴장상태인 날이 많아서 힘들었던 달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건, 구체적으로, 이제까지와 달리 "I would prefer not to-"를 마음대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싫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되고, 싫은 사람은 상대하지 않아도 되고, 불편한 상황에 놓여본 적도 없으며, 불편한 일을 할 필요도 없으며, 불편한 사람과 마주 볼 일도 없이 살았으니 낯선 상황들이 당연히 힘들밖에.
그리고 새삼 생각한다. 바틀비. 좁은 공간에서 아무 것도 없는 회백색 벽만 바라보며 "I would prefer not to-"만 반복할 때 바틀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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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 - 자라지 않는 아이 유유와 아빠의 일곱 해 여행
마리우스 세라 지음, 고인경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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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에 의하면, 인간은 죽음을 받아들일 때 보통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다섯 단계란 '부정(Denial), 분노(Anger), 교섭(Bargaining), 우울(Depression), 인정(Acceptance)'인데, 이는 죽음뿐 아니라 자신의 일상이 위협받을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생후 5주인 아이에게서 선천성 뇌질환이 발견되었을 때의 부모도 위의 다섯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왜 하필 내 아이에게(우리에게)"는 숱한 고통과 상처를 이겨내며 "이 아이가 내 아이, 내가 이 아이의 부모"가 된다. 그런데 이즈음에 이르면 부모는 이미 강해져 있다. 
 
다섯 살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시장에 가는 엄마를 쫓아 폴짝폴짝 뛰어 가는 나를 웃는 얼굴로 돌아보던 엄마가 뜬금없이 "저어~기 가서 다시 뛰어 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얼마쯤 되돌아가서 엄마를 향해 뛰어 가는데 그때 나를 보던 엄마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서 '부모의 얼굴'을 발견한 최초의 경험이었다. 결국 병원에서 처방 받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비싼 영양제를 석달여 먹는 걸로 나 어릴 적 소아마비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아이가 약하면 부모는 강해진다. 부모란, 부모의 역할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모에게 자식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우문이다. 우리가 품어야 하는 물음은 '자식에게 부모란 무엇인가'여야 한다.  

7살이 되도록 정확한 병명조차 진단받지 못한 유유. 유유의 증세를 의학 용어로는 선천적 뇌질환, 일반적으로는 '뇌성마비'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유유와 같은 아이를 장애인이라고 부른다.
보통 이런 내용의 자전적 에세이는 '감동적'이라는 표현이 제격이고 실제로 대부분의 책이 그렇다. 가슴이 뭉클거리다 끝내는 콧날과 눈시울이 따끔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는, 물론 감동적이지만, 콧날이 시큰하지도 눈시울이 따끔해지지도 않는다. 대신 다른 책에 없는 것이 이 책에 있다. 바로 '재미'다. 
저자 서문을 읽을 때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나는 이 책을 첫 일화부터 폴리스코프로 장식하는 마지막 일화 바로 앞까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는 한편 '재미있다'고 느끼는 스스로가 당황스럽고 불편했다. 한 가족에게 불어닥친 예기치 못한 시련에 '재미'라는 표현을 써도 되는 것일까 고민이 되었다. - 딴 얘기지만 그러면 '재미'의 대척점에 있는 표현은 무엇이 있을까
나로 하여금 이러한 고민에 빠지게 한 건 유유의 아빠이자 이 책의 저자다. 물론 지면으로 옮겨진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겠지만, 픽션을 쓸 때 날짜를 매겨본 일이 없으며 그럴 날이 있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저자의 다른 글이 궁금할 정도로 저자는 유유와 함께 하는 나날을 담담하게 무겁지 않게 일상적으로 기술한다. 일례로 제노바 항구의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일어난 일화는 비록 유유로 인한 소동이긴 했으나 지극히 소시민적인 공감을 끌어낸다.
오에 겐자부로가 그랬던 것과 달리 자신을 장애인의 아버지로 규정 짓고 싶지 않은 내공의 차이일까. 이유야 어떻든 그는 자신의 책을 통해 읽는 이의 동정심을 자극하지도 의례적인 감동을 요구하지도 않을 작정인 듯 보인다. 그래서 이 책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감동 실화도 아니고,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하는 극복기도 아닌 다만, 가만히 조용히 유유를 사랑하며 보낸 7년의 궤적이다. 그래서 유유가 얼마나 소중한 아이인지, 예쁜 아이인지 일일이 설명하고 강조하지 않아도 책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게 된다. 유유는 정말 예쁜 아이구나. 아빠, 엄마, 누나로부터 사랑받는 아이구나, 라고.

나는 문학의 치유 효과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아니, 효과의 유무보다 타인의 불행을 자기 위안의 도구로 삼는 것 같아 '감동 실화'로 명명되어지는 여타 미디어의 소산물이 영 별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최근 정서적으로 제법 힘든 며칠을 보낸 여파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을 통해 위안을 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보석같은 책이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떠오른 건, 이 책이 '보석같은 책'이라는 거였다. 
마지막, 유유가 달리는 폴리스코프(빠르게 넘기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연속 이미지)는 자꾸만 되풀이해서 넘겨 보게 된다.

유유가 달린다. 유유가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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