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 마스다 미리 산문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보는 작가인데 무심코 이름을 검색했다가 주루룩 펼쳐지는 목록에 놀랐다. 약력을 보니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에세이스트라고 한다. 누군가의 일상이 공감을 얻는다는 건 그 누군가의 일상이 소소하지만 과장되지 않고 진솔하다는 의미일 텐데 더군다나 그 누군가가 이웃나라 작가라니 책을 펼치기도 전에 호기심이 먼저 자리를 잡는다.

 

고운 연분홍, 반짝반짝 분홍색 가름끈. 보는 순간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아, 이 책은 여자를 위한 책이구나" 다. 첫인상을 배반하지 않는 이 예쁜 책은 책을 펼치면 활자가 말을 걸어온다. 조곤조곤 더 없이 음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일상, 느낌, 생각을 얘기한다.
절반쯤 읽다가 책의 표지를 다시 확인하고 제목을 새삼 눈여겨 보게 된 이유는 독서 도중에 문득 책을 가득 채운 일상의 주인공이 '나이'라는 걸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늦게 '아, 그래서 첫 에피소드도 법령선이구나' 했다. '법령선'이라니, 처음 보는 단어라 찾아봤는데 아마 표준국어는 아닌 듯 하다. 동일한 의미의 단어로 '팔자주름'이 있다.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답게 인물의 나이를 법령선으로 구분하는 작가의 고민은 과연 또래 연령대의 여자들이 절로 고개를 끄덕이는 공감지점이 있다. 마스다 미리의 일상이 공감을 끌어내는 힘은 아마 이런 데 있는 게 아닐까. 일상성의 힘은 '공감'을 끌어는 데서 발휘되는데 마스다 미리의 소박한 일상이 설득력을 가지는 의미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나이가 든다는 건 수다에 추억이 차지하는 양이 많아진다는 의미인 듯. 옛날에 말이야, 내가 **할 때 말이야,... 등등 과거 얘기가 현재를 온통 채운다. 뭐, 꼭 서글픈 일은 아니지 않을까. 정작 중요한 건 이런 것, 마스다 미리가 인용한 영화 대사처럼 '인생은 축복이니 낭비하면 안 되죠.'(p.61) 이니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그녀의 얘기에 공감하고 동조하다 보니 어느새 그녀와 친구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이 책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한번에 일독하는 것보다 소풍 가는 기분으로 시간을 두고 조금씩 읽기를 권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박람강기 프로젝트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 몇 줄로 요약된 한 인물의 연대기를 읽는 기분은 늘 묘한 감상을 남기는데 이는 결국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임을 확인하는, 자연순응에서 오는 체념 때문인 듯 하다.
인간의 평균수명을 생각하면 1888년 출생, 1959년 사망은 축복받은 긴 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억울할 것도 없는 나름 선방한 긴 생이다. 또 작가의 입을 빌리면 불혹을 넘겨 탐정소설로 데뷔해 소설작가로, 시나리오작가로 부와 명성을 얻고 자신이 활동하던 장르에 자신의 이름을 딴 '스타일'도 남겼으니 작가로서도 꽤 만족할만한 삶이다. 무엇보다 30년 넘게 친구로 동반자로 사랑하고 의지한 아내가 있었으니 그만하면 남자로서도 제법 축복 받은 삶이지 않는가. 요약하면 레이먼드 챈들러는 누구의 부러움을 사도 당당한, 이만하면 꽤 괜찮은 삶을 살았던 남자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는, 비교하자면 스티븐 킹의『유혹하는 글쓰기』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에세이다. 킹의 에세이는 제목 그대로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노하우를 담은 책이지만 챈들러의 에세이는 지인들과 주고 받은 작가의 편지를 통해 '작가로서의 일상'을 토로하는 책이다.
순전한 챈들러의 육성을 통해 챈들러에 대해 한 자락을 발견하는 재미가 의외로 쏠쏠하다. 책, 보다 정확한 의미로 '챈들러의 편지'를 읽으면서 순간 순간 피식 웃는 지점이 있는데 이를 테면 자신의 작품을 칭찬하는 A에게도, 비판하는 B에게도 챈들러는 공평하게 불퉁하다. 그때문인지 전반적인 작가의 인상은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강하고 까칠한 느낌이다. 이는 사실 직업인으로서의 작가에겐 장점이 더 많은 성격이지만 아마 챈들러가 이 글을 본다면 '네가 뭘 모르나 본데(블라블라)' 불만을 토해낼 것 같다.
「필립 말로」제목이 붙은 4장은 작가가 설명하는 필립 말로가 등장한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작가의 페르소나라고 해도 무방할 필립 말로에게서 작가의 자화상을 더듬게 된다. 물론 실제로도 일부는 그런 부분도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장르문학, 구체적으로 '탐정소설'에 대한 세간의 비평에 특히 목소리가 올라가고 말 끝이 한층 더 날카로워지는 챈들러는 천생 작가다. 그것도 뛰어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 작가다.
장르소설(구체적으로 탐정소설)을 하위문화로 분류하는 평론에 거세게 반발하는 챈들러의 모습은 호모폴리티쿠스로서의 본성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당연하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정치성을 가지게 마련이고 작가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 문화예술이 다 그렇지만 특히 문학은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를 투영해서 이해하려는 습성이 있는데, 그 연장선에서 최근 궁금한 것은 이런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서 추구하고 실현하는 정의를 현실에서도 추구하는가, 라는 부분.
실제 챈들러가 가지고 있는 사회정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챈들러는 필립 말로에 대해, 어느 누가 경제적 이득 없이 위험에 자신을 던져 정의를 실현하려고 들겠는가, 라고 말로를 지지한다. 탐정소설이 남자들에게 특히 인기를 끄는 건 역시 주인공을 통해 남자들의 로망을 실현하는 대리만족의 의미가 크지 않을까.
역자의 역주에 오랜만에 만족하면서 읽었다. 역자와 편집자의 작가에 대한 애정이 전반에서 느껴지는 한 권이었다.

덧1> 책의 만듦새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겉표지를 벗기고 속지를 보는 순간 "아, 예쁘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덧2> 말라르메의 고양이와 챈들러의 고양이가 만나는 상상을 해봤다. 아마도 제 인간주인보다 시니컬하고 삐딱한 대화를 하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일드 44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판매량이 저조해 한때 절판됐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바뀐 표지 상단의 요란한 홍보문구는 확실히 '부끄러움은 왜 나의 몫인가!' 원망도 들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더이상 부끄럽지 않을 뿐더러 밑줄 쫙 긋고 별 100개쯤 달아주고 싶은 건 역시 '소설이 재미있어서'다. 그렇다. 소설은 재미있으면 다아~ 용서 된다.


작가는 70년대 말~90년 대 초 옛소련에서 일어난 52명의 아동살해사건에서 이 소설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차일드44』를 구성하는 역사적 사건은 크게 두 개인데, 하나는 작가가 말하는 아동 연쇄살인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우크라이나 대기근(대학살)이다.
소설은 1933년 우크라이나 대기근 시절 우크라이나 한 지역에서 출발한다. 더 이상 먹을 거라곤 남지 않은 마을에 사는 소년은 우연히 발견한 고양이를 포획하러 동생을 데리고 숲속으로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소년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이후 소년은 고양이와 함께 실종되고 동생은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시간은 훌쩍 뛰어 넘어 1953년 모스크바로 이동한다.
전쟁영웅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레오는 유능한 MGB(KGB전신)의 상급요원 조사관이다. 그러나 출세길이 보장되고 한창 잘 나가던 레오에게 어느날 시련이 닥친다. 아내 라이사가 스파이혐의로 수사 리스트에 오른 것. 아내에게 씌어진 혐의가 자신의 충성심을 확인하려는 일종의 시험인 걸 알지만 레오는 아내를 선택하고 그 대가로 좌천당한다.

『차일드44』는 주인공이 아동연쇄살인을 조사하지만 추리물은 아니다. 한편 주인공이 냉전시대 권력의 아귀다툼 한복판에 있지만 그렇다고 정치물도 아니다. 이 소설은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데, 이는 주인공 '레오'의 탓이 크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스릴러의 성격이 강한데 이 스릴러는 전적으로 레오의 순진할 정도로 원리원칙을 우선으로 하는 성격에서 기인한다. 전제정치가 지배하는 공포사회에 최적화된 것 같은 인물형인 레오는 당이 하는 일이므로 옳고, 당의 모든 결정은 대의라고 믿는다.『태백산맥』때 그런 얘기를 쓴 적이 있는데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에겐 어린아이 같은 순수성이 있다. 오로지 인민과 당이 선(善)의 모든 것이고, 대의가 모든 것에 앞선다고 믿는 그들은 스스로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레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레오에게 최초 균열의 단초를 제공하는 이가 수의사 아나톨리다. 아나톨리가 등장하는 장면은 소설 초반 몇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데, 이 따뜻하고 긍정적인 인물은 잠깐 등장했다 사라진 후에도 그 잔영이 오래 남는다. 아나톨리의 인간적인 본성은 레오의 '당의 대의'를 향한 신념에 최초의 균열을 일으키고 그 균열에 힘을 가하는 인물이 바로 레오의 아내 라이사다. 라이사는 이제 막 알을 깨고 바깥으로 나온 레오에게 그가 알고 있던 세상 바깥에 있는 또다른 세상으로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단순히 스파이소설이라고 치부하기엔『차일드44』는 가지고 있는 미덕이 많다.
일견 조지 오웰의『1984』를 연상케 하는,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공포사회의 경직된 분위기는 피가 난무하는 잔인한 장면 없이도 좁은 공간에 갇혀 감시 받는 것 같은 억압되고 폐쇄적인 공포를 자아낸다. 소설을 읽던 중간에 M에게 소설 초반 레오에게 닥친 시련을 얘기해줬더니 영화 <이퀼리브리엄>이랑 비슷한 내용이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면 두 작품 모두 전제정치가 지배하는 사회를 동일한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개인을 부정하고 개인의 인간성을 그들 시스템의 적으로 간주하고 억업하는 과정은 어쩌면 그렇게 공식적인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스티븐 킹은 소설은 첫째도 둘째도 재미가 있어야 된다고 했다.『차일드44』는 일단 재미있다. 무엇보다도 깔끔한 문장이 주는 몰입감은 최고다. 호흡이 짧고 건조한 느낌이 드는 단문은 그 속도감이 굉장해서 특히 추격 장면 등은 지면을 벗어나 한편의 영상을 보는 현장감을 준다. 무엇보다 꽤 오래전에 흥미가 다했다고 생각했던 장르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동력! 덕분에 아마존에서 오랜만에 책을 검색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식 세탁소 - 정미경 소설집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K의 관계의 가난에 마음이 쓰였다 (p.104)
(->나는 K의 가난한 관계에 마음이 쓰였다)

 

예시한 문장처럼 매끄럽지 않은 문장이 제법 있는데 단순히 작가의 개성적인 문체라기 보다는 전반적으로 퇴고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작가의 이력을 생각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 참고로 내 책장엔 이번 소설을 제외한 작가의 전작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모든 작가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국내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동굴에 틀어박혀 마늘과 쑥으로 100일을 버틴 이들의 특정 유전자를 물려받았나 의심이 들 때가 있다. 도통 자기 내면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일 뿐더러 외부 세계와 소통할 생각도 없어보인다. 내 얘길 좀 들어봐, 내 얘길 좀 들어줘....... 끊임없이 이어지는 도무지 소화할 수 없는, 소통불가한 타인의 혼잣말에 귀기울이는 것은 숫제 징벌 받는 기분까지 들게 한다. 맞고 사는 아내의 반복되는 넋두리도 한두 번이지. 자신의 얘기를 하는 건 괜찮다. 하지만 그런 넋두리라도 일기가 아닌 이상 뭔가 확장되는 세계의 찌끄러기라도 있어야 하지 않나.

이번 단편집에 수록된 일곱 개 목차의 공통점이라면 '미숙한 인간이 미숙한 행동을 벌이는 이야기'라는 것인데 똑똑한 인물도, 똑똑치 못한 인물도 다들 하나 같이 삶의 바다를 건너는 것에 미숙하다. 하물며 그 바다에 부는 풍랑이 그닥 대단치 않아도 그에 반응하는 태도는 가히 허리케인급 태풍을 만난 듯 과장되고 호들갑스럽다. 더욱 불편한 점은 그럴 주제도 못 되면서 그들 스스로 뒤집어 쓴 위악의 껍질이다. 위악도 영리한 인간이 부려야지, 미숙한 인간의 위악은 그 자체로 범죄다. 이건 도무지 갱생의 여지가 없기 때문.
그럼에도 이 단편집엔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보석이 하나 숨어 있는데, 바로 마지막 목차「프랑스식 세탁소」에 액자식으로 등장하는 요리사 르와조의 이야기다. 길지 않은 분량이고 그나마 액자식이라 띄엄띄엄 흩어져 있지만 이 부분만 똑 떼어내 간직하고 싶을 만큼 문장도 내용도 구성도 참 좋다. 배경과 인물이 서양으로 옮겨가면 이야기가 품고 있는 보편성도 달라지는 걸까, 궁금해지는 대목.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 상반기에 읽은 소설 중 단연 베스트.

소설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순수하게 '기술'적인 의미로 '아, 이 작가는 정말 글을 잘 쓰는구나' 감탄했다.

 

이야기를 관통하는 시대 배경은 1950년대 초 미국 정가에서 시작해 미국 사회 전체를 뒤흔든 매카시즘이다. 그리고 미국 월가에서 촉발된 대공황, 두 번의 세계대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주축이 되어 냉전구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 대립을 이용해 헤게모니를 쥐려는 미국 정가의 욕망이 아이라 린골드라는 한 인물의 개인사와 맞물려 미국 사회를 까발린다.

『위대한 개츠비』가 전후(1920년-) 미국 경제성장기와 맞물린 한 인간의 애정사가 어떻게 비극으로 치닫는지 보여줬다면,『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는 전후(1950년-) 미국 정치사와 맞물린 한 인간의 성장기가 본인은 물론 주변인을 어떤 식으로 나락으로 떨어뜨리는가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치밀한 플롯과 서사의 얼개는 '이게 바로 문학'이라고 웅변하는 듯 하다.

특히 작가가 정신없이 몰아치는 장면은 한낱 단어들이 헤쳐모였을 뿐인 문장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을 강렬하게 들쑤시고 풀어헤친다. 그중에서도 작중화자(=나) 네이선이 이브와 아이라의 자택 파티에서 계층과 계급의 갈등이 대립 끝에 결국 폭발하는 과정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장면은(pp.223-254) 페이지를 통째로 옮기고 싶을 정도로 즉물적이고 원색적이다.

 

대공황을 겪은 전후(戰後) 미국 사회에서 슬럼 지역에 사는 유대인 이민가족이란 계급적으로나 계층적으로나 주류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밑바닥층, 소외 계층을 의미한다.

아이라는 바로 이 밑바닥에서 시작해 참전용사를 거쳐 인기 라디오 드라마 성우가 되고, 당대 인기 여배우인 아내 이브의 후광을 업고 직업적 명성을 얻을 뿐만 아니라 가난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그리하여 아이라는 링컨이 잘 어울리는 배우, 인기 성우, 이브의 남편이 됐지만 유감스럽게도 여기에 아이라를 구성하는 타이틀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공산당원'이다.
아마 10년 전이었다면 혹은 10년 후였다면 이 타이틀이 아이라에게 그만큼의 몰락을 가져다주진 않았겠지만 불행히도 아이라가 살던 시대는 '선동의 시대'였다. 이른바 조 매카시가 국회에서 종이 몇 장을 흔들며 '이 안에 미국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공산주의자 리스트가 있다'고 의회와 시민을 선동하고, 철강산업 현장과 광산 등지에선 스탈린 사상에 경도된 공산주의자가 노동자와 하층민을 선동하는 시대였던 것.


아이라의 형이자 모범적인 영어교사인 머리가 설명하듯 아이라와 이브의 문제는 여느 재혼가정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갈등일 뿐이지만 개인의 가정사에 정치적인 이해 관계가 개입되면 별 거 아닌 개인사도 순식간에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어떤' 음모와 결탁된 것으로 돌변한다. 진짜 불행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가족이 해체되고 미디어를 통해 전국에 통째 발가벗겨진 개인의 삶이 다시 회복 못할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시대는 바뀌고 위정자는 살아남는다. 어느 시대에나 한낱 개인의 불행을 발판 삼아 시대의 행운을 거머쥐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아이라는 여러가지로 연민을 느끼게 하는 인물인데 아이라의 대척점에 있는 네이선을 통해 그의 결핍이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경제적, 인종적, 교육적 약자인 아이라는 유일한 스승 존 오데이로부터 선동과 민중을 배우지만 아버지와 머리 선생님, 친구 아이라를 가진 네이선은 대학에서 만난 스승을 통해 예술의 대상은 대중이며 정치의 대상은 민중이라는, 차이와 선동을 배제한 순수문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지적 발견)에 눈을 뜬다. 이러한 네이선의 성장을 통해 역설적이지만 결국 아이라는 완벽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약점과 단점이 더 많은 인간이고, 아이라에게 결핍된 부분은 그의 탓이 아니며 아이라는 그저 시대의 불운을 피해 가지 못한 희생자였을 뿐임을 이해하게 된다.

 

소설을 읽다 보면 묘하게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구분이 뚜렷하다. 아이라와 머리는 끊임없이 말하는 자이고, 네이선은 듣는 자이며 그에 어울리게 직업도 아이라와 머리는 각각 성우, 영어교사이고 네이선은 작가이다. 이는 시대를 기록하고 증언하는 작가의 역할을 되짚게 하는 부분이다.

 

어떤 대상을 얘기할 때 정작 본질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세태는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인 듯, 소설에는 이런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한 예로, 유성영화 시대가 열리면서 스크린을 떠나 브로드웨이를 거쳐 라디오 드라마 인기 성우가 된 여배우에 대한 화제는 여배우의 연기나 필모그래피가 아닌 헤어스타일, 입었던 옷, 과거와 출생의 비밀에 집중된다. 그를 놓고 한창 수다를 떠는 아내와 아내의 동네친구들을 향해 남편이 끼어든다. "목소리 좋던데."

사인을 해달라는 어린 팬에게 인기 TV출연자는 '네 배경이 무엇이냐' 묻는 것도 맥락이 같다. 뿐만 아니라 아이라가 이브에게 읽으라고 건넸던 아서 밀러의 저작 <초점>의 주제 또한 인간 본연의 가치를 외면하는 세태를 비웃는데 이런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이 소설 전반에 걸쳐 고루 등장한다.

 

삶은 길다. 긴 삶이다 보니 살다 보면 실수할 때도 있다. 다행히 삶은 공평해서 실수를 하면 실수를 바로 잡을 기회도 같이 온다. 그런데 인간이란 늘 현명한 건 아니어서 간혹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놓친다. 그리고 실수가 거듭 되고 만회할 기회를 거듭 놓칠 때 그 동안의 빚을 받으려는 듯 불행이 혹은 불운이 불쑥 찾아온다.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실수를 만회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때가 오고야 마는 것이다. 아이라 역시 자신의 삶을 바로 잡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떤 실수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큰 비극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아이라는 자넬 만났지. 녀석이 결코 되어본 적이 없고, 결코 가져본 적이 없는 모든 걸 가진 소년을 만난 거야. 아이라가 자넬 끌어당긴 게 아니었네. 자네 부친은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아닐세. 자네가 아이라를 끌어당긴 거야. 그날 아이라가 뉴어크에 건너왔을 때 낙태는 여전히 쓰라린 상처였어. 그래서 아이라에게 자네가 못 견디기게 매혹적인 존재로 비친 거지. 아이라는 매정한 가족에, 눈도 나쁘고, 교육도 못 받은 뉴어크의 소년이었는데, 자넨 모든 것을 가진 잘 자란 소년이었고, 아이라의 할 왕자였던 거지. 자네가 바로 조니 오데이 린골드였던 거야. 자네는 그런 존재였어. 자네가 알든 모르든 그게 자네의 일이었네. 아이라의 본성, 그 커다란 몸에 들어찬 엄청난 힘, 그 모든 살인적 분노에서 그애 자신을 지키도록 돕는 것. 그건 평생 내 일이기도 했어. 많은 사람들의 일이기도 했고. 아이라는 절대 드문 경우가 아닐세. 많은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나? 이게 자네가 물은 '그것'일세. 그런 사람은 어디에나 있어. 도처에 널려 있지." -pp.495-4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