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고 - 역사적 오류에 얽힌 이야기 혹은 우리 가슴속에 묻어둔 희망을 두드리는 이야기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삼우반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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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마 저자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을 것이나 읽다 보면 껄껄껄 웃게 되는 장면이 두엇 있다.
지동설이 천동설을 완전히 밀어낸 그 시절, 유럽인의 관심은 온통 황금과 꿀이 넘치는 지상의 낙원인 인도에 '보다 빨리 가는 길'의 개척에 쏠려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항로가 발견되던 시절에 가장 인정받던 항해사 콜럼버스도 큰 소리 탕탕 치고 뱃길에 오른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알려진 동쪽 항로로 향하던 때, 영리하게도 서쪽 항로를 선택한 콜럼버스는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육지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곳은 황금도 꿀도 없는 황량한 대지일 뿐이다. 실망하여 돌아온 콜럼버스, 역시 기쁜 소식을 기다리다 실망하는 사람들.
나를 웃게 한 부분이 여기서 등장한다. 콜럼버스가 새로 발견한 대륙이 인도의 어느 한 자락이라고 생각하는 바람에 세계 지도의 크기가 확 줄어든 것이다. (아메리카)대륙 한 개가 통째로 사라졌으니 당연한 결과다. 생각보다 작은 지구의 크기에 실망했을 사람들의 표정이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책은, 신대륙의 최초 발견자는 콜럼버스인데 어쩌다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이 대륙을 차지하게 되었는가 하는 해프닝의 전말을 들려준다. 내용 중 심히 공감이 갔던 부분은, '당시의 아메리카를 오늘의 아메리카와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부분.
사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땅에 누구의 이름을 붙이든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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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B의 질문에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답변하지 않았다. 오직 그를 침묵시키려고만 했을 뿐이다. 그의 책들을 찢고 금지하고 불태우고 압류했다. 정치적인 압력수단을 동원해 그가 다른 지역에 머물러 있어도 집필금지령을 내렸다. 그가 대답할 수 없고 보고도 할 수 없게 되자마자, A의 패거리는 그를 향해 온갖 험담을 퍼부어댔다. 그것은 더 이상 싸움이 아니라 방책 없는 자에 대한 유린이었을 뿐이다.
B는 말할 수도 쓸 수도 없게 되었고, 그의 저서들은 서랍 속으로 말없이 들어가야만 했다. A는 인쇄소, 설교단, 대학 강단, 종교국, 국가공권력 전부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 모든 기구를 거침없이 가동시켰다. B는 발걸음 하나까지 감시를 받았고, 그의 말 한마디까지 누군가 엿들었으며, 편지는 모두 누군가 가로챘다. 단 한 사람에 대해서 머리가 백 개나 달린 조직이 우세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도 없다. 다만 때 이른 죽음만이 B를 망명이나 화형대에서 구원해주었다.
그의 시체를 앞에 두고도 승리에 찬 교조주의자들은 눈이 뒤집힌 증오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갉아먹는 석회처럼 의심과 비방을 그의 무덤 속에까지 던져넣고, 그의 이름 위에도 재를 뿌렸다. oo의 독재뿐 아니라 모든 정신적 독재의 원칙 자체에 대항해 싸웠던 이 유일한 인물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잊어버리고 사라지게 만들려고 했다.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중

* A는 칼뱅, B는 카스텔리오.  

인명은 일부러 A와 B로 표기했다.
역자도 언급하듯이,

이 두 인물의 대립적 초상화에서 주인공들의 이름을 빼면 이런 전체적인 구도는 극히 보편적인 모습을 보인다. (중략) 등장인물의 이름과 구체적인 상황은 바뀌어도 근본적인 구조는 늘 비슷한 것 

이니까. 
어디서 본 듯 익숙한 본문의 내용은, 16세기 한 인문학자의 투쟁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현실과 중첩되어 수시로 책을 덮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5세기 전에 일어난 일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재와 놀랄만큼 닮아 있다. 

1월은 츠바이크와 함께 보낸 달이라고 해도 무색하지 않다. 지난 달 구입 목록에서 밀려난 츠바이크의 책을 월 초에 도서관에서 잔뜩 짊어지고 왔는데 결국 세 권은 읽지 못하고 반납했다. 이 중『어제의 세계』는 구입해서 읽을 생각. 

많은 양의 독서와 깊은 사유를 통해 인간의 심리와 타인의 삶을 통찰하는 것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츠바이크는 무엇보다도 인물에 접근하는 방식이 돋보인다. 인간 심리와 행동의 저변을 들여다보는 츠바이크의 통찰력은 언제나 놀랍고 신비하다.
나는 인물 평전을 좋아하지 않는데 어렸을 때 문학전집과 함께 재미나게 읽었던 위인전이 실은 미사여구 일색의 미화담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서부터 영- 재미가 없어졌다. 츠바이크의 소설은 그렇게나 좋아하면서도 그래서 늘 좋아하는 작가 목록에 이름을 올려 놓고도 그의 평전을 읽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 것도 그런 기억 탓이다. 혹시 나처럼 안 좋은 기억 때문에 평전을 멀리 해 온 사람이 있다면 한번쯤 츠바이크의 평전을 시도해봐도 괜찮을 듯 하다.

- 1월에 읽은 츠바이크의 인물 평전

『천재광기열정1』
1권은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니체' '클라이스트'를 다룬다. 2권에 등장하는 인물은 '발자크' '디킨스' '스탕달' '카사노바'.
첫번째 등장인물 '톨스토이'편에서부터 쏟아지는 관념적인 문장들의 소나기에 작가님 너무 하삼!!! 내내 칭얼칭얼 하면서 겨우 읽고 2권은 다음 기회로...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정치적, 종교적으로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로 타인을 유린하고 짓밟는 권력을 보면서 장면마다 구절마다 참 가슴 아프게 읽은 책. 우리는 모두 누구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고, 내 의견이 존중받길 원하듯 다른 이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헤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와 다르니까, 내 맘에 안 드니까, 라는 이유로 상대를 제거한다면 우라사와 나오키의『몬스터』에 등장하는 괴물처럼 결국 혼자 남게 되어 누구도 내 이름을 불러 줄 이가 없게 될 것이다.

『메리 스튜어트』
동 시대를 살았던 두 여왕, 엘리자베스와 메리는 원하는 것을 스스로 얻어야 하는 사람과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삶에 대처하는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실례(實例)다.
개인적으로 나는 메리보다 엘리자베스에게 끌린다. 츠바이크가 비열하고 저급하다고 비난하는, 엘리자베스가 메리를 감금하기로 한 선택은 (그녀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으로 보인다.

『아메리고』
신대륙의 최초 발견자는 콜럼버스인데 어쩌다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이 대륙을 차지하게 되었는가 하는 해프닝의 전말을 들려준다. 내용 중 심히 공감이 갔던 부분은, '당시의 아메리카를 오늘의 아메리카와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부분. 사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땅에 누구의 이름을 붙이든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 심리 묘사가 탁월한 츠바이크의 소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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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은 실내를 빙 둘러보더니 발은 안 아프고 소리만 요란한 것들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쓰레기통이나 입구에 줄지어 선 링거 걸이 같은. 조폭? 입 모양만으로 김 간호사가 묻자 최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원장 안 나와? 이거 병원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외친 놈이 양복 윗도리와 쫄티를 순식간에 벗어던지며 앞으로 나섰다. 비늘 하나하나가 선명한 용의 목이 젖가슴을 향해 내려와 있고 나머지 부분은 등 쪽으로 넘어가도록 그려진 문신이었다. 초음파나 엑스레이 기사를 하다 보면 갖가지 모양의 문신을 보게 되고 어지간한 건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배꼽이나 젖꼭지의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문신을 한 사람이 와도 겁날 건 없었다. 촬영을 위해 불쾌한 액체를 삼킨 채 기계 위에 누운 인간처럼 겸손하고 무욕한 사람을 딴 곳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우니까.
침묵을 깬 건 최 간호사였다.
"어머, 컬러 문신이야." - p.24,「나릿빛 사진의 추억」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첫번째 수록인「나릿빛 사진의 추억」을 읽을 때였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이었는데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책장을 펼치고 예의 조근조근 차분하고 감성적인 문장들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 때,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웃고 말았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한 남자가 한 여자랑 연애를 했는데 이 남자가 정말정말 가난한 남자였던 거다. 얼마나 가난한가 하니 연애를 하는 동안 찍은 사진을 현상할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결국 여자랑 헤어지고 1년이 지나는 동안 현실을 받아들인 남자는 한 개인 병원에 엑스레이 사진사로 취직한다. 덕분에 헤어진 여자랑 찍은 사진도 현상할 수 있게 됐다. 근데 이게 문제의 시발점이 된다.
맥주 한 잔 하면서 현상한 (야한)사진들을 보니 취기도 오르고 아무래도 여자에게 돌려줘야겠다 싶다. 그래서 여자한테 전화를 하지만 1년 전에 헤어진 여자는 이미 예전의 그 여자가 아니다. 게다가 여자는 냉정하게도 사진은 남자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한다. 통화 직후에 남자는 사진과 필름을 모두 오려서 쓰레기 봉투에 넣어서 버린다.
그런데 이튿날, 갑자기 불쑥 찾아온 여자가 사진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여자는 제법 유명세를 가진 남자와 결혼을 목전에 앞두고 있었던 것. 문제는 남편 될 남자가 여자한테 사진과 필름을 찾아오라고 시킨 것이다. 남편 될 남자는 여자의 과거에는 관대하지만 여자의 옛애인이 사진을 가지고 협박하는 건 용납 못한다고 한다. 물론 남자는 협박할 생각도 없고, 사진과 필름도 모두 버렸다고 솔직하게 얘기하지만 그 날부터 남자의 직장에 무시무시한 문신을 한 남자들이 죽치고 앉아 사진과 필름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기 시작한다.
없는 사진과 필름을 내놓으라고 하니 남자는 난감해진다. 여자는 매일같이 징징대고, 어깨들은 매일같이 병원 로비를 차지하고 앉아서 남자를 겁준다.

숨넘어가게 웃다가 이쯤에서 M군에게 전화했다. 위의 줄거리를 들려줬더니 M군이 웃지도 않고 "그럼 사진을 다시 찍어야지" 했다. 물론 소설의 결론도 그러하다. 남자와 여자는 다시 한번 옛정을 불태우고 여자의 사진을 찍고 그리고 해피엔딩인 거지. 

보통 독서는 독서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정미경 작가는 온라인 서점에 신작 소개가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클릭했다가 거기에 달린 리뷰를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된 작가.
마침 우리 동네 도서관에 그녀의 소설이 있어서 읽어 보고 구매를 결정해야지 했는데 늘 그렇듯이 도서관에서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참 뜬금 없고 기약이 없는 일이라 에라, 모르겠다, 출간 소설 중 한 권을 제외하고 신작 소설을 포함한 그녀의 소설을 모두 주문했다. 빠진 한 권은『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인데 운동권 후일담 소설. 나는 공모 작가님의 영향으로 (특히 여성작가가 쓴)운동권 후일담 소설에 알러지가 있다.
이전에 접한 적이 없는 생소한 작가의 소설을 한번에 주문한다는 건 확실히 모험이지만 신작『내 아들의 연인』을 제외하고 내리 세 권을 차례로 읽은 소감은 일단 '만족'이다. 작가의 감각적인 정서가 감각적인 문체로 잘 정서된 느낌이 든다.
소설 속 상처를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체로 차분하고 조근조근하지만 무거운 내용에 비해 막상 읽히는 건 그다지 무겁지 않다. 깊긴 하되 바닥이 맑은 우물 같다고나 할까. 각양의 인물들이 간직한 상처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보듬어 안는 방식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작가의 기본 정서는 '가벼움'이 아닐까 추측하게 한다. 자기 안으로 파고들다 못해 침잠해버려서 나중엔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몰라 헤매는 작가들이 많은데 정미경 작가는 그들에 비하면 영리하구나 싶다. 
깊이와 무거움이 다르듯 가벼움과 경박 역시 다르다. 개인적 소감으로 정미경 작가는 그 차이를 구분할 줄 아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장밋빛 인생』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단편 소설집이고 남자와 여자의 얘기다. 작가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대부분 남자인 것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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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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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디에 있나요? 제 말은 들리나요? 어쩌면 이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겠어요. 

이정희가 김해연에게 보낸 편지의 첫 문장이다. 김해연은 연인이 보낸 편지의 첫 문장을 읽은 직후 경찰서로 연행된다. 그리고 "정희씨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묻는 김해연에게 돌아온 대답은 '어젯밤에 죽었다'는 이정희의 부음이었다.
연인의 죽음. 그리고 연인이 남긴 한 장의 편지. 소설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인간은, 세상은, 우주는 우연한 존재인가. 국경은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인가, 외부에 있는 것인가.
전작『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작가가 던졌던 물음은 여전히 진행 중인 듯하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사실은 완벽하게 가짜였던 세상이었음을 깨닫고 절망하는 김해연. 세상은 이제 무엇도 분명하지 않으며, 무엇이 옳다 그르다 확신할 수 없는 혼돈으로 변한다.
김해연의 여정에 동참해보지만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내가 맞닥뜨린 것도 역시 '아무 것도 분명한 것이 없다' 다. 구체적으로, 소설을 읽는 동안 가장 궁금했던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서)이정희는 왜 죽었는가, 자살인가 타살인가, 누가 이정희를 죽였는가에 대한 '상징적인 의문'은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에도 의문으로 남는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 할아버지가 간직했던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다면『밤은 노래한다』는 연인이 남긴 편지에서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소설은 비슷한가, 이번 소설은 혹시 이전 소설의 연장선에 있는 것인가, 자연 궁금해진다. 

두 소설은 여러모로 비교할만 하다. 일단 나의 외부 혹은 내가 사는 세상의 바깥이 (시대적 배경에 충실하여)『네가 누구든』에선 우주였다면『밤은』에선 간도로 좁혀지고, 소설의 주제를 이루는 주요 함의인 '우연한 존재'로서의 인물 역시 이전 소설은 내(주체)가 관찰하는 강시우(객체)였다면 이번 소설에선 김해연인 '나 자신'(주체)으로 좁혀진다는 점이 눈에 띈다. 공통점이라면 작가는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소설에서도 역시 그 '누구'이면서 아무 것도 아닌 '누구'는 그래서 우연적 존재이면서 또한 필연적 존재인가 고민한다. 

이번에는 손가락이 잘린 사내 하나가 내 얼굴을 골똘히 내려다보고 서 있다. 몇 달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서 자신은 변절하지 않았다고 소리치다가는, 또 얼마간은 자신이 정말 변절하지 않은 것인가고 의심하다가는, 또 얼마간은 자신은 이미 변절한 것이라고 생각하다가는, 또 얼마간은 자신이 변절했는지 변절하지 않았는지 확신하지 못하다가는 결국 일본 경찰의 앞잡이가 된 사람. 최도식.
너, 아직도 안 죽었니? 너는 살려주꼬마. 너만은 살려주꼬마. - p.162
 

'민생단 사건'은 이번 소설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생소한 역사다. 독서 도중에 집중이 흐트러지는 일이 적지 않았던 이유는 '민생단'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했던 탓이다. 그러나 독서내내 씨름 하는 기분이었던 것은 예전 소설과 구분되는 문체 탓이 크지 않았나 싶다.
『밤은 노래한다』는 거의 잊혀지다시피 한, 그러나 분명히 존재했던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에 한 여자를 지순하게 사랑했던 한 남자의 사랑을 끌어들이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작가의 다른 소설에 비해 아름다운 문장이 많다. 혹여 관념적인 장문 속에서 길을 잃어 자칫 그 미문들을 놓친다면 아까운 일이다.

소설이 끝나면 한홍구 교수의 해제가 기다리고 있다. 꽤 생소한 역사적 사건 '민생단사건'을 잘 모르면 소설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한홍구 교수의 해제 앞 절반을 먼저 읽어보고 소설을 시작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단, 해제 중 '밤이 부른 노래'라는 소제목의 내용은 소설의 줄거리를 A to Z로 아주 친절하게 풀어놓았으므로 스킵하는 주의가 필요하다.

표지의 그림은 에곤 쉴레 Egon Schiele의 자화상인데 민음사판『인간실격』의 표지 역시 쉴레의 자화상이다. 이 외에도 어느 책이었던가, 쉴레의 그림을 표지로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겐, 아직까지는, 이 화가는 멀고 먼 그대라 표지를 볼 때마다 위화감을 느낀다... 

이 소설은 구입 과정에 약간의 사연이 있다.  

저자 사인본 예약 이벤트를 발견한 그날 바로 예약 주문을 하고 원래 날짜보다 거의 일주일이나 지나서야 손에 받아든『밤은 노래한다』, 그.러.나. 조심조심 펼친 책 안에 저자의 사인이 없는 것이다! 보고 또 봐도 없다! 우째 이런 일이...
실망해서 앉아 있는데 마침 두 통의 전화가 차례로 왔다. 처음은 B양. 책에 사인이 없다고 했더니 우짜노~ 라면서 그냥 웃기만 했다. 다음 전화는 M군. 역시 책에 사인이 없다고 했더니 내게 몇 가지를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M군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내가 책을 구입했던 온라인 서점에서 배송에 실수가 있었다고 사인본으로 책을 다시 보내 줄 거라는 얘기였다. 만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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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
장아이링 지음, 김은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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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소곤거리듯 외쳤다.
"어서 가요!"
잠시 어리둥절하던 그가 곧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출입문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렸다. 입구에 사람이 없긴 했지만 달려나가면서 바로 어둡고 비좁은 계단 난간을 잡으려면 문기둥을 잡고 돌아나가야만 했다. 연거푸 몇 개의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 내려가며 울리는 쿵쿵 소리가 그녀의 귀를 때렸다. - p.59


여자는 남고, 남자는 달아났다. (그리고)
도로는 봉쇄되고, 여자는 도로에 갇혔다.

동명의 소설을 각색, 감독한 이안 감독의 영화《색,계》를 보고 난 후 계속 궁금했다.
"어서 가요!" 여자의 말을 들었을 때, 혼자 달아날 때, 여자의 처형을 묵인할 때, 남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서 가요!" 남자에게 그 말을 할 때, 홀로 인력거를 탈 때, 흔들리는 인력거 위에서 거리가 봉쇄되는 것을 보면서, 여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대방의 사랑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사랑이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을 맞이한 여자와 남자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궁금했다.

『색, 계』는 영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그 인기를 배경으로 주목을 받게 된 소설로 국내에 출간된 장 아이링의 다른 책이 그렇듯 이 책 역시 7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 단편집이다 (다만, 첫번째 수록작「망연기」는 소설이 아니고 작가의 짤막한 작품 소개글이다).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연극과 현실 속에서 진행되는 실제 삶의 다른 점은 '내가 아닌 남의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반면 연극과 실제 삶의 공통점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하는 책임을 가진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의 딸, 누구의 친구, 누구의 상사 혹은 직원, 누구의 이웃 등등...
그러므로 연극에서 막이 내리는 것과 인생이 종착역에 다다르는 것은 어떤 점에선 같은 의미를 지닌다. 연극이든 삶이든 어느 한 쪽이 끝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맡았던 역할과 함께 소멸되어 진다. 하물며 실제 삶이 연극이 되어 버린 이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소설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그러니까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그들의 이야기인데, 여자는 모든 것을 '끝내려는' 순간 남자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느끼고, 남자는 모든 것이 '끝난' 순간 여자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구나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럼 그들은 자신의 마음은 어디에 두었을까.

영화는 많은 여운과 해석을 낳게 했으나 의외로 소설은 짧은 길이만큼이나 서사가 단순하게 다가온다. 사실 소설『색,계』는, 그녀의 다른 소설집『경성지련』『첫번째 향로』도 그렇지만, 읽고 났을 때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 그녀의 소설을 읽다 보면 끝내 집을 뛰쳐나가지 못한 노라의 정서가 느껴진달까, 그런 면에서 전근대 격동기를 살아내는 여성을 지면 속에서 다루는 힘은 여성 작가인 장아이링보다 오히려 남성 작가인 쑤퉁 쪽이 한결 노련해 보인다. 시대를 거스르지도, 시대에 순응하지도 못한 못한 작가의 재능에 연민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참고로『색,계』의 단편 목록 중에선 동명인「색,계」가 가장 낫다.

원작인 소설보다 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영화가 더 좋았던,『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과『색, 계』의 공통점은 영화 말미의 시퀀스가 소설과 다르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원작과 별개로 감독이 자신만의 해석을 덧입히는 것인데 감독의 이러한 재해석으로 이들 두 영화는 원작과 또다른 독자적인 서사를 가지게 되고 원작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된다.    

덧.
남자가 달아난 후 혼자 거리로 나와 인력거에 탄 그녀가 인력거꾼에게 가자고 한 곳은 친척이 사는 '위위엔루'인데 '위위엔루'의 한자가 '愚園路'(우원로)이다. 이것이 실제 지명인지 작가의 의도적인 작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번역되어진 것보다 장아이링의 문장이 한층 은유적이고 다층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찜찜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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