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계
장아이링 지음, 김은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그녀가 소곤거리듯 외쳤다.
"어서 가요!"
잠시 어리둥절하던 그가 곧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출입문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렸다. 입구에 사람이 없긴 했지만 달려나가면서 바로 어둡고 비좁은 계단 난간을 잡으려면 문기둥을 잡고 돌아나가야만 했다. 연거푸 몇 개의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 내려가며 울리는 쿵쿵 소리가 그녀의 귀를 때렸다. - p.59


여자는 남고, 남자는 달아났다. (그리고)
도로는 봉쇄되고, 여자는 도로에 갇혔다.

동명의 소설을 각색, 감독한 이안 감독의 영화《색,계》를 보고 난 후 계속 궁금했다.
"어서 가요!" 여자의 말을 들었을 때, 혼자 달아날 때, 여자의 처형을 묵인할 때, 남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서 가요!" 남자에게 그 말을 할 때, 홀로 인력거를 탈 때, 흔들리는 인력거 위에서 거리가 봉쇄되는 것을 보면서, 여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대방의 사랑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사랑이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을 맞이한 여자와 남자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궁금했다.

『색, 계』는 영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그 인기를 배경으로 주목을 받게 된 소설로 국내에 출간된 장 아이링의 다른 책이 그렇듯 이 책 역시 7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 단편집이다 (다만, 첫번째 수록작「망연기」는 소설이 아니고 작가의 짤막한 작품 소개글이다).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연극과 현실 속에서 진행되는 실제 삶의 다른 점은 '내가 아닌 남의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반면 연극과 실제 삶의 공통점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하는 책임을 가진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의 딸, 누구의 친구, 누구의 상사 혹은 직원, 누구의 이웃 등등...
그러므로 연극에서 막이 내리는 것과 인생이 종착역에 다다르는 것은 어떤 점에선 같은 의미를 지닌다. 연극이든 삶이든 어느 한 쪽이 끝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맡았던 역할과 함께 소멸되어 진다. 하물며 실제 삶이 연극이 되어 버린 이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소설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그러니까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그들의 이야기인데, 여자는 모든 것을 '끝내려는' 순간 남자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느끼고, 남자는 모든 것이 '끝난' 순간 여자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구나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럼 그들은 자신의 마음은 어디에 두었을까.

영화는 많은 여운과 해석을 낳게 했으나 의외로 소설은 짧은 길이만큼이나 서사가 단순하게 다가온다. 사실 소설『색,계』는, 그녀의 다른 소설집『경성지련』『첫번째 향로』도 그렇지만, 읽고 났을 때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 그녀의 소설을 읽다 보면 끝내 집을 뛰쳐나가지 못한 노라의 정서가 느껴진달까, 그런 면에서 전근대 격동기를 살아내는 여성을 지면 속에서 다루는 힘은 여성 작가인 장아이링보다 오히려 남성 작가인 쑤퉁 쪽이 한결 노련해 보인다. 시대를 거스르지도, 시대에 순응하지도 못한 못한 작가의 재능에 연민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참고로『색,계』의 단편 목록 중에선 동명인「색,계」가 가장 낫다.

원작인 소설보다 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영화가 더 좋았던,『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과『색, 계』의 공통점은 영화 말미의 시퀀스가 소설과 다르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원작과 별개로 감독이 자신만의 해석을 덧입히는 것인데 감독의 이러한 재해석으로 이들 두 영화는 원작과 또다른 독자적인 서사를 가지게 되고 원작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된다.    

덧.
남자가 달아난 후 혼자 거리로 나와 인력거에 탄 그녀가 인력거꾼에게 가자고 한 곳은 친척이 사는 '위위엔루'인데 '위위엔루'의 한자가 '愚園路'(우원로)이다. 이것이 실제 지명인지 작가의 의도적인 작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번역되어진 것보다 장아이링의 문장이 한층 은유적이고 다층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찜찜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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