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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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 그 소설의 주제가 보편적인 사회 윤리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를 넘나들기까지 할 때, 독자는 독서를 시작함과 동시에 작가와 공범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 일찌감치 자신의 위치를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가가 설치해놓은 복잡한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리.타.

로 시작하는 나보코프의 소설『롤리타』는 굳이 출간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설명이 없어도, 지금은 그 의미가 명백히 상징적인 명사가 되어버린 '롤리타'라는 제목만으로도 그 논란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변태적인 호기심으로 책을 펼친 사람들이라면 실망할지도 모를 이 소설은 막상, 그다지, 외설스럽지 않다. 외설은커녕 여타 기괴하거나 파격적이고 엽기적인 일부 소설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 문체나 문장이 더 없이 아름답고 목가적이다. 게다가 재미있는 상황극을 보는 것처럼 때로 웃기기까지 하다. 하지만 아름답고 유머 가득한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서른 일곱 살의 지적이고 잘 생기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학자이자 교수인 험버트는 법적으로 부녀 관계에 있는 이제 겨우 열두 살난 돌로레스(이하, 로)와 뻔뻔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맺는, 즉 님펫에 집착하는 소아성애자 변태성욕자다. 비록 그 과정에서 험버트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갈등하고, 망설였던, 험버트의 주장처럼 로가 먼저 그를 유혹했던, 로가 얼마나 당돌하고 막무가내이며 제멋대로에 되바라진 여자애였던지 간에 그 중 어느 것도 로가 이제 겨우 열두 살이고, 막 사춘기의 문턱에 들어선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화자가 주인공인 소설은 그 주인공이 범죄자이거나 악인일 때 간혹 심정적으로 주인공에게 동화되고, 더 나아가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스톡홀름 신드롬을 보이는 독자를 양산한다. 하지만 독자는 나쁜 주인공과 좋은 주인공을 냉정하게 구분해야 한다. 소설속 휴머니즘을 지탱하는 관습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는 누가 주인공인가가 아니라 주인공의 절대 의지가 선한가 악한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독자는 좀 더 이성적인 독서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하필 어린 여자아이에게 성애를 느끼는 심리적, 육체적으로 성적소수자인 험버트를 동정하고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험버트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

험버트는 어린 로를 사랑하고 그녀가 떠났을 때는 절절하기 그지 없는 내밀한 고백으로 그녀를 붙잡으려고 하지만 로는 그런 험버트의 사랑을 오히려 이용하고 배신한다. 이런 과정에서 로가 사뭇 어린 팜므파탈로 보여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은 로는 강하고 현명한 아이일 뿐이다. 로는, 어디를 보나 험버트보다 못한 '퀼티'는 자신의 마음을 망쳤지만 험버트는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는 걸 구분할만큼 충분히 현명하고, 열 일곱의 나이에 임산부가 되지만 돌아오라는 험버트의 유혹을 뿌리치고 장애를 가진 노동자 남편과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강한 아이다.

가끔 어떤 소설은 읽고난 후 작가가 소설 속에 심어 놓은 기호를 제대로 짚은 것인지, 혹시 과잉해석은 아닌지, 작가에게 속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낮은 이해력이 작가의 의도를 놓친 것은 아닌지 등등 독자를 작아지게 만든다. 어쨌든 나보코프의『롤리타』는 재미있지만 슬프고, 슬프지만 희극적인 그러나 결국은 서정적인 소설이다. 고전은 읽는 과정에서 느끼는 재미뿐 아니라 읽고 난 뒤의 지적 충만감에서도 그 만족도가 확실히 다르다. 아마도 이것이 고전의 힘인 듯.

- 덧.
험버트의 님펫 집착증은 정신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닌 다분히 육체적인 관계를 최종적인 목적으로 한다. 험버트는 파리에 있을 때 님펫의 조건에 근접하는 (아마 열 여섯쯤 되었을 나이의)매춘부를 돈으로 사서 육체적인 관계를 즐긴 전력이 있고, 로를 호텔로 유인해서 강력한 수면제를 먹이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도 그의 목적은 더 없이 분명했으니, 로가 잠들었을 때 호텔 로비를 전전하면서 갈등하고 고민한 것도 '마지막 선을 넘을 것인가'였다.
그러므로 험버트가 직접적인 성관계를 지양하는 '그저 소아애(小兒愛)'일 뿐이라고, 로를 범한 것은 여름 캠프에서 로가 동급생 남자애와 관계를 가진 것을 알고나서였다고 험버트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 험버트가 자신이 로의 첫번째 애인이 아니라는 얘기를 로에게 듣는 것은 관계가 끝난 뒤였다.(pp.183-188)
애석하게도 험버트의 성적 욕구는 '피부 접촉이나 포옹을 통해 정서적, 신체적 만족을 얻는' 수준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험버트를 그저 소아애가 아니라 소아성욕자라고 불러야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남자여서일까. 그래서 험버트의 무죄를 믿고 싶었던 것일까. 이러한 남성적 에고는 영화『롤리타』(1997, 애드리안 라인)에선 더욱 두드러지는데 어린 로가 알고 보니 사악한 마녀였다라는 해석은 역설적으로 남성들의 원죄 의식을 더욱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렇게 해서 개인적 독서와 사회적 독서는 긴밀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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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4-06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이라...[롤리타]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정말 유명한!
살아가기위해 영악한? 강한 롤리타와 남자들이 충분히 심정적으로 이해된다 하더라도 결국 인생을 망치게 만든건 어른!이잖아요
요즘의 정말 영악하고 악의적인 소녀들도 사실은 어른들이, 우리가, 사회가 그들을 망가뜨리는거겠죠?

인삼밭에그아낙네 2010-04-11 10:20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아이는 어른의 거울'은 정말 적절한 표현, 적확한 의미인 것 같아요.
 
태백산맥 세트 (무선) - 전10권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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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늘의 현실이 내일의 역사가 되는 순류는 현대인들에게 다가올 세대를 위해 지나간 시대를 기록할 사명을 숙제로 안긴다. 하지만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듯 패자의 역사는 왜곡되거나 은폐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역사는 흐른다'.

『태백산맥』은 민족의 분단 격동기를 향한 작가의 뜨거운 애정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 등장인물들 간의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대화가 다소 넘침으로 인하여 감상적으로 빠져드는 감이 없지 않다.
그중에서도 미군과 빨치산을 대조군으로 놓고 비교하는 장면은 미군이 우리 정부의 국군통수권을 장악한 가슴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이었음에도 그만 웃음이 나오고 말았는데 특히 마지막 10권, 휴전 성립 후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헌영 숙청 장면에 이르렀을 때는 "아아, 이런-" 하고 말았다. 지나친 이분법적 선악 구도가 오히려 리얼리티를 와해시켜버리면서 이성적 긴장감 대신 낭만적 감상이 부각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태백산맥』을 읽을 무렵 중국의 현대소설 몇 권을 함께 읽었는데 중국소설을 읽다 보면 어른을 위한 동화를 읽는 듯한 기분이 곧잘 든다. 내용이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서 때문인데 그들이 사고하는 과정은 마치 어린애들처럼 정반합의 전형을 따르는 순진성이 있다. 그런데 중국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태백산맥』의 빨치산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정서가 바로 이 순진성이다. 동지를 위해 헌신하고, 당령이라면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충성하는 그들의 순박한 열정은 무척이나 인간적이어서 마치 윤리 교과서를 읽는 듯 하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정말 순진한가?, 물으면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한 가지를 대라고 하면 나는 아마 한동안은 '순진성'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실 분단 전쟁과 빨치산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6권 이후부터 이런 감상적인 장면이 시시때때로 등장한다. 박헌영이 숙청되는 배경을 설명하는 대화도 그렇지만 빨치산 투쟁 중에 보여주었던 이현상 남부군 대장의 휴머니티를 칭송하는 부분은 그 옛날에 우스개 소리로만 들었던, '김일성 장군은 나이 열 몇살에 나뭇잎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는 북한 교과서 얘기만큼이나 동화적으로 읽힌다. 아마 나의 순진성이 그만큼 퇴색되어진 탓도 있을 것이고 이 소설이 실제로는 80년代에 씌어진 이유일 수도 있다. 80년代. 이 한 마디로도 참 많은 것이 설명되지 않는가.

『태백산맥』의 장점이라면 대하소설임에도 열 권이라는 숫자가 부담스럽지 않은 대중성을 빼놓을 수가 없다. 한 마디로 재미도 있고 가슴 뻐근한 감동도 있다. 다만, 소설의 전반부에서 이야기 진행이나 흐름과 상관없이 생뚱맞게 등장하는 성애 묘사는(예. 외서댁과 염상구, 하대치와 주막집 주모) 신문 연재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사뭇 아쉽게 느껴진다. 뭐, 남자들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겠다. 사실『태백산맥』에는 여러모로 남자들의 로망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다. 남자의 의리, 남자의 신념, 그리고 강한(?) 남자 등등.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가장 애정을 느꼈던 인물은 죽산댁(염상진의 아내)과 김사용이었다. 죽산댁은 그야말로 거친 격랑의 한 시절을 온 몸으로 버텨내는, 시대를 대변하는 민중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고 김범준, 김범우 형제의 아버지 김사용은 죽산댁과는 다른 의미에서 동시대를 살았던 민중의 한 축으로 소설의 지면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거대한 산으로 다가오는 인물이었다.

소설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문학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간혹 지나치다 싶게 관념적인 혹은 감상적인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좌익과 빨치산, 제주 4.3 항쟁, (충분하지는 않지만)거제도 수용소 등 군사독재의 그늘에 묻혀서 오랫동안 왜곡된 채 은폐되어 있던 기형의 역사를 양지로 끌어내고, 근대를 살아낸 농민의 치열하고 가슴 아픈 역사를 정면으로 밀도 있게 보여주는『태백산맥』은 그 자체만으로도 문학이 지탱해야 할 사회적, 역사적 기능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역사를 배우고, 역사를 바로 알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건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고 또한 후대에게 물려줘야 할 의무이다. 역사를 안다는 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첫 번째 걸음이기 때문이다. 

- 지나가는 말. 흔히 '맑시즘'이라고 부르는 마르크스 사상의 요체는 그의 대표 저서가『자본론』인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후 정치 경제학으로 발전하는) '경제사'다. 앨빈 토플러가『제3의 물결』에서 권력의 이동이 초기의 노동에서 (장원을 소유한)영주에게로 옮겨오는 과정을,『권력 이동』에서는 이들 권력이 근대를 지나면서 정보(information)를 차지하는 자에게 이동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 역사는 권력, 즉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계층 간의 엎치락 뒤치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기존의 계층(=자본을 소유한 권력자들)을 전복시키기 위한 선행 과정으로 계급 투쟁이 필연적이라는 점인데 이러한 계급 투쟁의 사상적 무장과 가장 잘 부합되는 것이 바로 맑시즘이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당시에 맑시즘은 계급 투쟁에 공고한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최고의 '주의'(-ism)였던 셈. 
아이러니한 것은 막상 맑시즘의 광풍이 몰아친 지역은 마르크스의 고향인 독일도 아니요,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유럽도 아닌 여전히 농토가 국부의 대부분을 지탱하고 있는 러시아를 비롯한 중국, 한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였다는 점이다. 왜 하필 농민이 혁명의 주체가 되었을까. 이는 맑시즘의 사상적 기초 중 유물 사관(=역사적 유물론)이 잘 설명하고 있는데 생산력의 주체, 생산 관계의 부조리, 소유의 불평등이 가장 집약되어 나타나는 대표 모델이 바로 농민과 지주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인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의 배경 역시 농노해방과 新기계 문명이 충돌하면서 이러한 계층간 불화가 극에 달하면서였다. 이로써 나치즘과 파시즘이 유럽을 집어 삼키고 있을 때 동아시아에선 맑시즘이 확산되고 있었던 배경이 설명된다.  

유물론은 역사를 필연으로 설명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역사는 거의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필연의 산물이든, 우연의 산물이든 역사는 이전의 기록 앞에 현재의 인간들을 데려다 놓는 것을 즐긴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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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래 대하소설과 관련된 얘기는 이미 시중에 차고 넘치므로 이 부분은 생략하고,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만 정리

1.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한강』을 연이어 읽는 동안 꽤 자주 떠올랐던 '남자의 논리'. 신문 연재글의 특징인지 특정 에피소드에서는 여지없이 남성적인 본위(本位)가 강하게 드러난다.

2. 역사를 올바로 아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자본주의가 팽창하고 물질의 가치가 중요하게 된 베이비붐 이후의 세대일수록 자기 안의 중심을 잡는 일이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아는 것은 개인의 중심을 잡는데 가장 큰 무형의 자산이다. 정신을 위해 할 수 있는,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가치 있는 투자(=역사 바로 알기)를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3.『한강』을 두고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주인공이 없어 글이 산만하며, 그래서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작가의 첫번째 대하소설 『태백산맥』보다 떨어진다는 평을 가끔 본다.『태백산맥』과『한강』은 읽는 관점을 달리 해야 한다.『한강』은 세태소설, 연대기에 가깝다.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독자에게 얘기를 전달하는 역할로만 읽히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한 예로 유일민, 유일표 형제는 다른 여느 인물들처럼 분단이 낳은 연좌제의 가장 큰 피해자로만 읽혀야 마땅하다.

4. 소설을 읽고 소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해방전후사의 인식』, 일명 '해전사'를 읽어봐도 좋겠다. 비슷한 제목의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역사를 보는 저술의 관점이 다르므로 주의해야 한다.

대하소설은 시작했을 때 한참에 몰아서 같이 읽는 것이 좋은데 어쩌다『아리랑』혼자 뒤처진 것이 아쉽다. 

- 조정래 대하소설 3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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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반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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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받으면 반드시 정답을 말해야 하고, 사지선다 중에 고르라면 해당사항이 없는데도 꼭 그 안에서 대답을 고르던, 지금보다 훨씬 고지식하던 시절, 한 때 성악설에 마음이 기울었던 적이 있었다. 그 시절엔 인간의 선한 의지가 악(惡)한 쪽으로 변이를 일으키는 것보다 차라리 악한 의지가 선(善)하게 교화되는 것이려니 믿는 쪽이 더 쉬웠다.

쑤퉁의 장편『쌀』에는 홍수로 물에 잠긴 시골 고향을 떠나 보따리 하나만 가지고 타향 도시로 온 청년 우룽을 중심으로 '대홍기쌀집'과 얽힌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대홍기쌀집의 두 딸 쯔윈과 치윈, 그녀들의 아버지 펑사장, 뤼대감 등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모두 하나같이 나쁜 인간들이다. 그들은 간음하고, 살인을 교사하고, 밀수를 하고,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는 것에 일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이다.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대신 우룽과 빠오위(쯔윈의 아들이자 우룽에겐 조카)의 대사가 눈에 띈다. 

"너도 나에게 복수를 하러 온 것이냐? 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날 찾아온 것이냐?"
"난 지금 날 위해 복수를 하는 것뿐이야.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네놈을 증오하는지 모르겠어. 처음 네놈의 면상을 봤을 때부터 들끓기 시작하던 증오심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 나도 그런 내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으니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아마 이유가 없는 모양이야." - p. 362 

신흥 공업 도시인 '와장가'라는 공간은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케 한다. 아편, 무기 밀수, 살인, 간음... 그곳에선 세상의 악한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 "왜 나를 못 살게 구는 거냐, 내가 당신들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우룽은 끊임없이 외친다. 그러나 우룽은 또한 누구보다도 더 빨리 악의 질서에 재빠르게 순응하고 흡수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왜일까. 이유는 없다.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이유 없음, 이것이 이 소설이 성악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읽는 동안 정서를 불편하게 헤집는 듯한 쑤퉁의 소설은 그래서 읽고 나면 힘에 부치는 상대와 한바탕 씨름을 한 기분이 든다. 사실 은유와 의미의 중첩에 탁월한 매력을 풍기는 쑤퉁의 진가는, 이건 아마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특히 여성 심리묘사에서 발휘되는 것 같다. 당연히 장편에 비하면 여성을 화자로 삼는 중단편집이 한층 읽기에 수월하다. 그러니 중단편집을 먼저 읽어보고 장편을 읽는 것도 쑤퉁이라는 작가와 친해지는 한 방법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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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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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너무 수다스럽다. 책을 읽다 보면 "아, 게보린" 소리가 절로 난다.
소설의 전반부 1/3은 삼미슈퍼스타즈의 3년 동안 기록의 대행진 보고서다. 20년이나 지난 옛 신문의 스포츠난을 읽는 듯한 이 기분을 어찌할꼬. 남자들이 군대 간 얘기를 하는 것과 쌍벽을 이루는 것이 있다면 바로 남자들이 스포츠 얘기를 하는 거 아닐까 한다.
아이에서 중년의 남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화자 '나'가 서술하는 이 소설은 '나'가 청소년기 학생일 땐 교조적인 냄새가 제법 풍기고, 본격적으로 생존 경쟁에 뛰어드는 청년기로 오면 갑자기 사회소설이 되고, 한바탕 내외풍을 맞아 시련을 겪고 난 중년기에 접어들면 마치 인생에 달관한 듯 처세소설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소설에서 작가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한결같이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고, 치기 힘든 공은 치지 말라'고 강변한다. 과연 그럴까? 바쁜 걸음을 늦추고, 지금 절대적인 가치를 주고 있는 것들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의문을 가지라는 충고는 일견 매우 바람직하게 들리지만 사실 여기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작가의 '이상주의'를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주장하듯 '잡기 힘들면 안 잡고, 치기 힘들면 안 치는' 것은 '야구'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야구가 뭔가. 우리가 아는 야구란 달리고 쫓아가고 때론 펜스를 기어오르고 때론 잔디 위를 구르고, 가끔 양팀 감독들이 나와서 부푼 배도 부딪쳐주고, 운 좋으면 방망이와 글러브가 아니라 주먹과 발로 대결하는 타자와 투수의 K1 라이브도 볼 수 있는... 승부는 9회말 투아웃부터라는 그 유명한 수식을 달고 다니는 스포츠 아닌가.
그러니, 뭐하러 그렇게 힘들게 경기를 해? 전력질주 하지 마, 승부에 연연해하지마, 승부보다 중요한 건 즐거움이야,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전력질주도 하고 때로는 주저앉아 쉬기도 하는 것이 인생 아닌가? 달려보지 않은 자는 전력질주한 직후에 마시는 한 모금의 물맛을 절대로 알 수 없다.
전반부는 삼미슈퍼스타즈의 원년 기록을 줄줄 읊어대는 그래서 마치 스포츠 중계를 듣는 것 같은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저변에는 IMF를 힘들게 통과한 중년의 향수와 응원이 컸지 않았을까...
그런 이유로,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고,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는 조성훈과 모두가 포기한 경기를 혼자 끝까지 승부하던 감사용(영화《슈퍼스타 감사용》) 중 한 사람을 고르라면 나는 감사용을 지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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