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반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질문을 받으면 반드시 정답을 말해야 하고, 사지선다 중에 고르라면 해당사항이 없는데도 꼭 그 안에서 대답을 고르던, 지금보다 훨씬 고지식하던 시절, 한 때 성악설에 마음이 기울었던 적이 있었다. 그 시절엔 인간의 선한 의지가 악(惡)한 쪽으로 변이를 일으키는 것보다 차라리 악한 의지가 선(善)하게 교화되는 것이려니 믿는 쪽이 더 쉬웠다.

쑤퉁의 장편『쌀』에는 홍수로 물에 잠긴 시골 고향을 떠나 보따리 하나만 가지고 타향 도시로 온 청년 우룽을 중심으로 '대홍기쌀집'과 얽힌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대홍기쌀집의 두 딸 쯔윈과 치윈, 그녀들의 아버지 펑사장, 뤼대감 등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모두 하나같이 나쁜 인간들이다. 그들은 간음하고, 살인을 교사하고, 밀수를 하고,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는 것에 일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이다.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대신 우룽과 빠오위(쯔윈의 아들이자 우룽에겐 조카)의 대사가 눈에 띈다. 

"너도 나에게 복수를 하러 온 것이냐? 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날 찾아온 것이냐?"
"난 지금 날 위해 복수를 하는 것뿐이야.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네놈을 증오하는지 모르겠어. 처음 네놈의 면상을 봤을 때부터 들끓기 시작하던 증오심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 나도 그런 내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으니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아마 이유가 없는 모양이야." - p. 362 

신흥 공업 도시인 '와장가'라는 공간은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케 한다. 아편, 무기 밀수, 살인, 간음... 그곳에선 세상의 악한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 "왜 나를 못 살게 구는 거냐, 내가 당신들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우룽은 끊임없이 외친다. 그러나 우룽은 또한 누구보다도 더 빨리 악의 질서에 재빠르게 순응하고 흡수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왜일까. 이유는 없다.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이유 없음, 이것이 이 소설이 성악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읽는 동안 정서를 불편하게 헤집는 듯한 쑤퉁의 소설은 그래서 읽고 나면 힘에 부치는 상대와 한바탕 씨름을 한 기분이 든다. 사실 은유와 의미의 중첩에 탁월한 매력을 풍기는 쑤퉁의 진가는, 이건 아마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특히 여성 심리묘사에서 발휘되는 것 같다. 당연히 장편에 비하면 여성을 화자로 삼는 중단편집이 한층 읽기에 수월하다. 그러니 중단편집을 먼저 읽어보고 장편을 읽는 것도 쑤퉁이라는 작가와 친해지는 한 방법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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