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발론 연대기 - 전8권 세트
장 마르칼 지음, 김정란 옮김 / 북스피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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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발론 연대기>는 북스피어의 첫번째 출간작인데, 무려 8권짜리다. 출판사의 뚝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책의 만듦새를 보면 단순히 그렇게 치부할 일은 아니다. 정말 정성들여 만들었다. 일단 8권까지 나와 있는 모든 인물소개와 권두언(서평과 저자의 말, 편집자의 말 등 해당 책에 대한 안내), 그리고 책 말미의 글들을 거의 훑었는데, 감동의 물결이 벌써부터 밀려온다.

<아발론 연대기>는 흔히 말하는 '아더 왕 전설'이다. 저자는 여러 판본을 수집해서 이야기의 틀을 잡았다고 하는데, 판본마다 이야기는 (당연히) 극과 극이었다고. 일단 정말정말정말 정성들여 만든 책이다.

아더 왕 전설은 다른 모든 전설이 그렇지만 많은 이야기의 원형이 되어주며, 이후 기독교 문화권 문학들에 영감을 제공한다. 아더 왕 이야기의 주요 등장인물 이름과 주요 장소 목록만 봐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이렇게 열심히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보다 열심히 읽어주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막 들고 있다. 초감동의 책 8권이다. 각 권마다 마지막에 저자가 해당 책의 이야기에 관해 적은 해설은 정말 최고다. 교수 출신이라는데 알아먹기 쉽게 참 잘도 썼다.

재미있는 것은,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다는 예언에서 싹트는 비극은 서구에서 상당히 파퓰러한 비극적/신화적 장치인 모양이다. 게다가 성배의 전설도 나오고. 마법사 멀린도 나오고.

기네비어 왕비와 란슬롯 이야기를 설명하던 작가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와 비교해 설명하는데, 여기에 폴 클로델의 회심과 회심 직후 쓴 편지가 나온다. 이거 좀 웃긴다.

"순전히 육체적인 사랑이 피우는 낭만적인 안개와 저 트리스탄이라는 덩치 큰 멍청이가 내지르는 징징대는 울음소리는 내게 아주 우습게 느껴지네. 인간의 사랑은 만족과 함께 가지 못할 때에만 아름답네. 어떤 작가도 만족한 관능을 묘사하지는 않지. 왜냐하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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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1-03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자인 김정란 씨는 워낙 글을 잘 쓰시는 분이에요. 입담, 글발 다 좋죠. 그리고 이 책의 편집을 맡은 분도 내공이 만만찮은 분이죠. 제가 아는 바로는, 예전 알라딘 편집장인 임지호 씨인데.

이메진 2006-01-03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표지에 깔린 유리코팅도 굉장하더라구요!

marina🦊 2006-01-03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_ 김정란 씨의 내공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임지호 씨가 그런 분이셨군요!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신화 관련 책들을 왕창 사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메진_ 그렇죠. ㅎㅎ 빌려 읽고 나면 사고 싶어질 것 같아서 애초에 사서 읽었다니까요.
 
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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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 에도가와 란포상을 받은 작품. 당시 란포 상 심사위원이었던 미야베 미유키가 칭찬한 바와 같이 신인의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는 상당히 치밀한 전개가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신물을 내고 있던 쉬크한 현대 일본 추리물이 아니라 천만 다행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 뭐 이런 것도 아니다. 물론 반전이 있긴 하지만 반전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건이 점차 그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생기는 안도감 같은 걸 느낄 수 있으니까. 어쨌건 상당히 재미있는 작품이로소이다.

살짝 억지스러운 대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말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입은 다물겠으나, 뭐랄까, 실소를 자아내는 설정을 발견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범인이건 누구건 할 것 없이 그들이 왜 그렇게 살았는지, 왜 이 지경까지 왔는지를 대단히 강렬하게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주인공인 난고와 준이치의 심리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게 되더라. 이 책의 가장 멋진 점(?)은 사형제도에 대한 통찰이다. 사실 통찰이라기보다는 사형집행을 당하는 사람과 집행하는 사람 구형하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심적 고통에 대해 적는다는 점이다. 사형 집행에 참여했던 간수 난고가 겪은 갈등과 괴로움, 사형집행시 벌어지는 일들을 읽고 있자면 정말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일단 무죄임에도 사형수가 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억울할테고, 단지 직업이라는 이유로 남의 생명을 빼앗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간수들 역시 괴롭기는 매한가지라는 것. 생계를 위해 저지를 죄, 그 죄를 깊이 뉘우치는 사람에게 반드시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가의 문제 같은 건 차치하고라도, 사형제도가 과연 범죄예방에 효과가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들어서면 정말 머리가 빠개질 지경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이 책은, 살인죄로 사형당하게 생긴 죄인의 무죄를 밝히기 위한 사람들의 분투를 그리면서, 그와 동시에 살의에 사로잡히는 인간들을 그린다는 사실. 마지막 대목에서는 마구 책장을 넘기면서 "이봐, 제발 살아남아, 감옥같은데 가지 말아줘"하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나카모리 검사가 마음에 듭니다. 그럼 이만.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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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츠마 이야기 - 살인사건 편
타케모토 노바라 지음, 김소영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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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말하면 아주 애교스러운 추리소설. 로코코 풍의 소녀를 싫어하는 남자들로서는 초반을 넘기기가 단팥빵 100개를 먹기보다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읽으면서 너무 깔깔대고 웃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친 것이 미안할 따름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에 바치는 오마주와도 같은 트릭을 사용해 살인을 저지르게 하다니, 이 작가는 참.

다음은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정리한 두어가지 감상을 합한 것이다.

+ <흑사관 살인사건>에 대해

휴가 때 런던에 가면서 책을 몇 권 읽었는데(인천에서의 탑승대기시간과 싱가폴에서의 환승대기시간까지 24시간이 넘는 여정이었다), 그 중 한 권이 <흑사관 살인사건>이었다. 엄청나게 어려워서 한참을 끙끙대며 읽었더랬다. 현학적이고 잘난체하는, 너무 똑똑해서 기가 막힌 이야기다. 좀 심각할 정도로. 결론적으로 난 그 책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유는, 딱히 이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만드는 책이 아니었다, 내게는.

<시모츠마 이야기: 살인사건 편>을 읽다가 <흑사관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했다. 혼자 깔깔거리고 웃다가, 이 책을 읽을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아서, 여기 해당 대목을 옮겨둔다. 참고로, 주인공인 모모코는 로리로리한 의상을 즐겨입는 영원한 로리타 룩의 맹신자. 그녀는 촌스러운 폭주족 출신("뇌수를 배추벌레에게 마구 잡아먹힌 듯한") 소녀 이치고와 절친하다기보다는 우연으로 묶여 가까이 지내는 친구사이다. (영화 <불량공주 모모코>의 원작인 <시모츠마 이야기>가 이 책의 전편이다) 모모코와 이치고는 우연히 살인사건에 휘말리는데, 공교롭게도 이치고가 살인용의자로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모코는, 이치고만큼 멍청한 경비원아저씨와 이치고의 누명을 풀기 위해 만나 대화를 나눈다. 다음이 그 대목이다.

"우리는 이치고를 용의자로 세움으로서, 승객 대부분을 범인으로 의심해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전제 하에 다시 검증을 시작해야 해요."
"점점 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수학 수업 같다고. 아카가와 지로의 미스터리는 훨씬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데." (여기서 일단 한번 웃었다. 아카가와 지로의 미스터리같이 쉽다, 는 말은 숙어집에 넣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그리 무시타로의 탐정소설은 훨씬 어렵다구요."
"누구야, 그게?"
"<흑사관 살인사건>을 쓴 사람이에요."
"신인인가?"
"아뇨,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분이죠."
"아, 너 틀렸어. 그거 흑사감이 아니라 삼각산의 머시기잖아. 에도가와 란포."
(참고로 이 어이없는 대답을 옮기면서 오타는 전혀 없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란포는 삼각산이 아니라 <삼각관의 공포>네요. 그리고 흑사감이 아니라 흑사관. 뭐, 무시타로의 경우는 미스터리라고 하기보다는 안티 미스터리 수업을 사용한 현학 소설이지만."
(이쯤 되면 로리로리한 소녀를 무시할 수는 없겠다. 로리타 문화의 대변자라는 책의 저자 타케모토 노바라는 물론이고.)
"안튐 미스터리?"
"추리소설로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쓴 궁극의 추리소설이라구요. 정녕 모르신단 말씀?"
"바보 취급하지 마. 나도 미스터리라면 꽤 안다구. 그러고 보니 옛날에 그런 종류도 읽었던가. 맞다 맞다, 생각났다. 하지만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트릭이 복잡해서. 역시 미스터리의 진정한 묘미는 기발한 트릭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전차 시간이 어찌저찌 되었다더라 하는 건 느슨해서 성에 안 찬다구."
분명 그건, 니시무라 쿄타로가 쓴 작품입니다. 오구리 무시타로와 니시무라 쿄타로. 타로밖에 안 맞잖아요! 게다가 니시무리 교타로는 전혀 안티 미스터리가 아니란 말이죠. 얘기하고 있는 상대의 일자무식에 질려 있자니(하지만 오구리 무시타로 같은 건 미스터리 광이라도 보통 잘 안 읽는 편이긴 하지) (이 대복에서 다시 한번 웃었음), '쯔치우라 모터스'라는 글자가 앞 호주머니 부분에 들어간 남색 정비공 작업복을 입은, 보기 드물게 풀 죽은 이치고가 머리가락을 잡아 헝클면서 가게로 들어왔습니다.
-168p.

참고. 위의 인용문을 봐서 알겠지만, 이 책은 일본어 한글 표기원칙을 준수하지 않는다.

+ 건프라에 대해

게다가 <시모츠마 이야기- 살인사건편>은 알고 보니 애거서 크리스티에 바치는 거대한 오마주였다(자세한 얘기는 책 후기에 다시 적겠다). 게다가, 여기 로리로리한 의상을 디자인하는 이소베 님(Baby, The Stars Shine Bright의 대표 겸 총 디자이너로 나오는)은 알고 보니 건담 마니아! <개구리 전사 케로로>를 떠올리며(그리고 로리로리와 비슷한 닉을 가진 모 님을 떠올리며^^) 이 인물을 읽으니 엄청 웃긴다. 특히 다음의 대목.
 
일단 다음의 대목은 이런 상황이다. 모모코가 밤을 새워 만든 견본 옷을 이소베 님은 밤을 새워 패턴을 만들고 또한 완성하려고 애쓴다. 모모코는 이소베 님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가 디자인한 옷 때문인가보다 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찾아가는데, 이소베 님 사모님께 듣고 보니...

"그래서 원인은요?"
"그게 류가사키 씨의 네글리제 패턴과 계속 씨름하면서 그 사이에 다른 일, 새로운 점포 건 회의 같은 것도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을 별로 못 잤어요. 오늘 오전에야 겨우 인정할 만한 패턴을 그려냈다고 생각하자 신바람이 나서 말이죠. 곧바로 집에 가서 잤어야 하는 건데 맥주를 마시며 한동한 뜸했던 아키하바라에 나갔거든요.
그랬는데 피규어 상점에서 말이에요. 하이퍼 하비(프라모델 전문지) 한정의, 현재로선 손에 넣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엄청나게 진귀한 빨간색 모빌 수트 인 액션 샤아 아즈나블 전용 돔을 찾아내고 만 것입니다. 컬렉터가 눈물을 삼키며 내놓았겠지요. 그래서 비싸긴 했지만 구입했어요. 그리고 나서 흥분한 나머지 손에 넣은 보물을 끌어안고 아키하바라의 보도를 껑충껑충 뛰다가 발이 미끄러져서 뒤로 벌렁 넘어지는 바람에... 뇌진탕을 일으키고 구급차에 실려가는 신세가 되었어요."
(중략)
그랬습니다. 경애하는 이소베 님의 사적인 모습은 무슨 까닭에선지, 건담 매니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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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1-03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뭘 좀 알아야 제대로 키득댈 것 같지만. 솔깃한 걸요. 로코코풍 소녀도 괜찮아서.^^

marina🦊 2006-01-03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사에서 동료들과 "우울할 때 읽어봐"라며 돌려 읽었는데, 전권인 <시모츠마 이야기>도 사 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있습니다. 으하하

marina🦊 2006-01-12 0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정말 너무너무 즐겁게 읽었거든요. ^^
 
문명의 붕괴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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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멸망한 고대 문명에 대해 관심이 많다. 초등학교 때 가장 열심히 읽은 책들은 <세계 7대 불가사의>와 같은 책들과 추리소설이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인가에서 나온, 하드커버에 엄청 두껍고 무거운 세계의 미스터리 관련 책(제목도 기억 안나고 -ㅅ-)은 이해를 잘 못해서 교과서처럼 끼고 살았더랬다(그런데도 제목이 기억 안난다). 어쨌건, 일이 비교적 적었던(그나마 한 일은 모두 밀려버렸다), 쓴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는 내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몇몇 고대문명이 어떻게 번성했고 어떻게 멸망했는지에 대한 한 해석을 보여준다. 급속한 인구 증가로 인한 환경 훼손, 기후 변화, 교역 사회의 불안과 같은 요소는 그가 제시하는 요인들. 지금까지 이스터 섬의 몰락과 핏케언 섬과 헨더슨 섬의 몰락 이야기를 읽었다. 이스터 섬에는 그래도 사람들이 남아 거주중이었다. 쓰러져 있던 거석상들은 원래 서 있던 것들이었다. 기타등등. 그런데 핏케언 섬과 핸더슨 섬은 완전한 무인도가 되어버렸다.

사실 다이아몬드의 설명 자체가 내게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설명만으로 문명의 붕괴를 납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도로 발전하지 않은 문화들이 외부 조건으로 전멸하는 건 그렇다 쳐도, 문명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사회를 누렸던 곳에서 붕괴해버리는 건 이해가 쉽지 않으니까. 그리고 다이아몬드는 확신을 하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제시하는 것이니까.(철학을 비롯한 인문사회학 공부를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뭘 믿고 뭘 아느냐에 따라 동일한 세계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다. 현재 세상사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천년도 넘은 일을, 문자기록도 없는 상황에서 퇴적층과 분뇨 분석으로만 결론지을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이아몬드의 말을 •?않는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 책을 쓴 목적은 과거 문명 붕괴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대 문명이 붕괴하지 않게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다음 인용문은 이스터 섬에 대한 글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 붕괴한 문명, 아무도 남지 않은 사회-를 떠올릴 때 마다 떠올리는 광경과 연관된 이야기다.

"(이스터)섬 사람들이 자초한 환경 파괴를 부인하는 대안적 이론이나 반론은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주어진다.
(중략)
세 번째 반론은 이스터 섬 사람들이 모든 나무를 베어버릴 만큼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하기야 모든 나무가 사라지면 어떤 결과가 닥칠지 누구라도 예상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런 점에서 카트린 오를리아크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숲을 왜 파괴했을까?"하고 반문한다. 실제로 이런 반문은 카트린 오를리아크 뿐만 아니라 나를 비롯해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내 제자들, 즉 인간으로 인한 환경 파괴론을 주장하는 모든 학자들을 괴롭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니는 '이스터 섬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한 그루의 나무를 베면서 뭐라고 말했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해본다. 요즘의 벌목꾼들처럼, 그들도 "나무를 베는 게 아니야. 할 일을 하는 거라고!"라고 외쳤을까? 아니면 "테크놀로지가 우리 문제를 해결해줄 거야!"혹은 "이스터 섬 어딘가에 다른 야자나무가 없다는 증거가 없잖아. 섬을 샅샅히 뒤지면 틀림없이 찾아낼 수 있을거야. 성급하게 벌목을 금지시키거나 두려움을 퍼뜨리는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돼!"라고 소리쳤을까?
-163 p

요즘 나를 매혹시키는 건, 홀로 남은 인간이 있는 풍경이다. the descent에서 본 것과 같은. 다이아몬드의 비유처럼, 우리는 고립된 섬에 사는 사람들과도 같다. 지구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유일하게 우주에서 인간이 사는 땅이므로. 이 섬이 붕괴하면 인류가 붕괴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가면, 홀로 남은 인간이 있는 풍경. 핏케언 섬에서 마지막까지 생존했을 인간. (두명 남았다고 동반자살을 할 정도로 인간이란 종족이 나이브하다고는 믿지 않는 나.) 사회의 붕괴를 목도하고, 주변인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울고, 그리고 살아남아 닥치는 대로 잡아먹으며 죽을 날을 기다리던 인간이 있는 풍경. 뵈클린의 <죽음의 섬>에 매혹되었던 것과 비슷한 이유인 듯 하지만. 혼자 있는 걸 좋아하지만 혼자 남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내게는 상당히 포악한 장면이다. 그런데도, 가끔, 그런 장면은 나를 홀린다.

참고, 핏케언 섬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바운티호의 반란>에 등장한다. 바운티호에 반란을 일으킨 주요 인물들이 핏케언 섬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무인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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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종 살인자 밀리언셀러 클럽 25
로베르트 반 훌릭 지음, 이희재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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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반 홀릭의 명판관 디 공 시리즈. 황금가기에서 단편집인 <쇠못살인자>가 이미 나왔다. <쇠종살인자>는 장편이지만, 여러 사건을 해결한다는 면에서 단편 식의 짧은 호흡으로 책을 읽기에 큰 무리가 없다.

강간치사 사건으로 시작, 워낙 여러 사건이 등장해서 정신이 없었지만, 절반이 넘어가니 상당히 흡입력이 있다. 특히 큰 제목으로 뽑힌 '쇠종살인자' 사건을 읽다가는 깜짝 놀랐다. 마지막 디 공의 해설을 듣다가 가슴이 짠해오는 기분이 들었는데, 거의 오이디푸스 이야기 같은 식의 슬픈 이야기였다. <소년탐정 김전일>에 나오는 식의, 슬픈 복수담과 죽는 순간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던 슬픈 진실을 잘 살린 작품이다.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지 않는 디 공의 명쾌한 설명에 찬사를. 나만 그런지 모르겠는데(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확실히 감상적이 되었다), 죄인이 불쌍해지는 것을 보면 OTL. 죄인을 심문하거나 죽이는 방식이 너무나 잔인하며 구시대적이지만, 당시에 그렇게 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 같으면 전화나 이메일로 통신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 모든 게 불가능해, 사람이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는 사건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구식 즐거움이 있다. 나쁜 놈의 첩자가 디 공을 음모에 몰아넣으려는 서찰을 가지고 가다가 디 공의 수하에게 붙잡힌다던가 그런 것.

디 공은 뛰어난 판결로 황제의 휘호를 받는데, 그 내용은 '목숨보다 정의가 중하다'라는 내용. -ㅅ-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쇠못살인자>를 재미있게 읽은 사람에게는 강력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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