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드스톡행 마지막 버스 동서 미스터리 북스 100
콜린 덱스터 지음, 문영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옥스퍼드 운하사건>을 읽고 콜린 덱스터의 팬이 되지 않는 사람은 추리를 경멸하거나 혐오하는 인간 뿐이다. 모스 경감은 내가 본 그 어떤 탐정/형사보다 귀여웠다. 문자그래도 귀여운 아저씨. 그리고 추리는 정직하게 한다. 정.직.하.게. 동서문화사의 책 답게 천재 탐정이 어쩌구 하는 띠지가 붙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책을 집에 두고 왔다), 천재적이라는 수식어는 아무래도 이 평범한 듯 특별한 아저씨에게는 맞지 않는다. <우드스톡행 마지막 버스>가 장편 처녀작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옥스퍼드 운하 살인사건> 때와는 모스 경감의 나이 차가 꽤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귀여운 루이스 형사도 <우드스톡-> 부터 등장한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 루이스가 모스 경감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것! -ㅇ- (하지만 모스에게 무시당하는 것 만큼은 <우드스톡->이나 <옥스퍼드->나 달라진 게 없다.)

간략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옥스퍼드에서 두 여인이 오지 않는 우드스톡행 버스를 기다리다 히치하이킹을 한다. 그런데 한 여인이 강간을 당한 시체로 발견되고, 다른 한 명은 종적이 묘연하다. 동행이었던 여인은 종적만 묘연한 게 아니라 아예 누군지조차 파악할 수 없는 상황. 모스 경감과 루이스는 이 사건에 뛰어드는데, 진상을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모스 경감은 수없이 가설을 뒤집으며 진상에 접근해간다.

모스 경감은 유머 감각이 넘치고, 담배를 많이 피우며, 여자를 보면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성범죄를 싫어하며, 범인을 잡기 위해 잠이고 뭣이고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다. 사실, CSI의 애청자로서- 이 책을 보면 세상에 범인이 정액을 남기고 갔는데 -ㅅ- 심리 추리에 열을 올리는 모스 경감이 답답해 보이긴 한다. 그 당시 DNA 검사를 했을 리는 만무하다 쳐도, 루이스에게 범인에게서 온 편지의 지문 감식을 하지 않아 한마디 듣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실로 놀라울 정도.

하지만 범인을 이끌어내는 심리 추리는 가히 감동적이다. 대단한 트릭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점 때문에 범인은 그 정체가 은닉되고 있는가를 치밀하게 추리하는 모스 경감의 투지와 영감이 경이로울 뿐이다. 정말- 덱스터의 전집이 출간되면 정말 좋겠다. 사실 시니컬하고 사건을 몰고 다니는(특히 연쇄 살인을 몰고 다니는) 탐정들보다 모스 경감이 내 취향인 것 같기 때문이다. 에헤헤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행보다 오래 남는 사진 찍기
강영의 글.사진 / 북하우스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잔뜩 피곤에 „“아서 걷기도 힘든 다리를 끌고 집에 들어간 어젯밤. 주문한 CD와 책 택배가 도착해 있었다. <우드스톡행 마지막 버스>와 <여행보다 오래남는 사진찍기>. 사실은 덱스터의 <우드스톡->을 먼저 읽고 싶었지만,(잠도 안 자고 그대로 다 읽고 싶었다 ㅠㅠ) <여행보다->쪽이 사진도 많고 글도 얼마 없어서 읽기 시작했다. 200-201 페이지에 보면 파리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남자의 사진 오른쪽에 "무중력 상태의 몇 초. 낯선 공간으로의 유체이탈. 자지 않고 꾸는 꿈."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 책이 딱 그러했다. 아주 차가운 계곡 물에 머리를 감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내가 여행에 미친 인간이기때문에 더욱 그렇겠지.)

정성들여 썼다는 느낌이 든다. "그때 카메라를 들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 거리에 관한 기억은 지금쯤 먼지처럼 흩어졌을 것이다"(p.19)와 같은 순간이 수없이 이어붙어 있다.

아쉬운 점이라면, 각 챕터별로 붙어 있는, 이른바 사진찍는 법이랄까 하는 것에 대한 간단한 강의(혹은 감상) 부분이 너무 알맹이가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사진과 함께 적혀있는 글들이 감상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렇게 챕터를 시작하는 부분, 사진찍기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좀 더 스트레이트하게 갔어야 하지 않았나. 그래도, 프로 포토그래퍼들의 사진을 보면서 카메라 탓만 하는 많은 '마음은 프로, 눈도 프로'인 사진 애호가들에게 '기다림'의 중요함을 가르쳐 주었다는 데 의의를 두고 싶다. "어느 카메라 쓰셨어요?"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기다렸어요?"인 경우가 꽤 된다. 특히 인물이 들어간 컷들 말이다.

쉽게 읽히지만 가슴에 오래 남는다. 이 책을 읽고 장기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건 아무래도 거짓말일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이어리 메피스토(Mephisto) 14
척 팔라닉 지음, 최필원 옮김 / 책세상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척 팔라닉을 좋아하는가? 아마도. 그렇지만 그의 책을 다 읽거나 한 건 아니다. 그의 책이 술술 읽히더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이게 뭐지? 응? 뭐라 그랬지? 이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하지? 누구였지? 내가 그의 책을 읽은 경험으로 말하자면, 척 팔라닉의 책은 절반 가까이 읽을 때 까지는 계속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하다. 중간에 독서를 잠시 멈추어야 하는 상황이라도 생겨서,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면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진다. 심지어 책을 다 읽은 다음에 모든 물음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 다시 앞부분을 뒤적거린 뒤에야 알게 된다. 척 팔라닉이 설명이나 해명에, 인과관계의 명쾌한 답변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다이어리>의 책 뒷표지에는 줄거리가 나와있지 않다. 혹시나 해서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었는데, 그래도 내용이 어떻게 진행될런지는 알 수가 없다.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알라딘에서 책의 줄거리를 옮겨오자면 다음과 같다.

줄거리- 작품의 배경으로 설정된 웨이탠시 섬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휴양지. 이동 주택 주차구역에서 자란 미스티는 웨이탠시 섬 출신인 부유한 청년의 청혼을 받자 자신의 꿈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3년이 지난 후, 여느 날처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미스티는, 차 안에서 자살을 시도한 남편 피터를 발견한다. 남편은 식물인간이 되고, 그녀는 혼자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허영심 많은 시어머니와 괴짜인 딸은 이미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미스티가 훌륭한 화가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술과 아스피린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견디던 미스티는 미술학교를 그만둔 지 13년만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스티를 제외한 섬 사람들 모두가 공유하는 비밀이 한 가지 있었는데...

문제는, 책을 읽다 보면 미스티가 정말 피터의 청혼을 받아들이면서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는가 의문이 든다. 어쨌건, 이야기를 따라가려면 책의 절반 정도까지는 읽어야 한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공포소설이라고 했는데, 어디가 공포인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할 정도였다. 나중에야 알 수 있다. 귀에 매달린 귀걸이를 찢듯이 빼 내어 미스티에게 건넨 사람이 혹시-. 뭐 이런 것. 결과적으로, 영화로 만든다면 대단히 매혹적일 것 같다. 하지만 영화로 만드는 게 쉬울 것 같다는 말은 차마 못 하겠다. 이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바꾸려면, 일단 이야기를 해체해 어둠 속에 앙상한 뼈대를 더듬어 하나씩 붙여 나가야 할 것이고, 그렇게 이야기가 형체를 갖추면 다시 이야기를 장조림 고기 뜯듯이 다시 떼어내고 섞어서 마치 이 책의 상태처럼 정신없이 흔들어 던쳐놓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척 팔라닉의 매력이다. 의미없어보이는 문장들의 나열이 팽팽하게 긴장감을 조성한다. 팔라닉의 맛을 알 즈음이면 익사 직전까지 이야기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상태가 된다. 다시 말해, 이야기 속의 미스티가 강요된 예술가의 고통 상태에 놓일 즈음, 읽는 사람 역시 비슷한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된다. 여전히 이게 어떻게 생겨먹은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 나도 모르는 커다란 수레바퀴가 끼익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는 게 들리니까. 사족 하나. 미스티를 임신시키기 위한 피터의 행동들은 그야말로 urban girls' niightmare.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척 팔라닉의 책은 <서바이버>. 그런데 <다이어리>를 읽고 나니 <자장가>가 심히 궁금해진다.

ps. 한국판 표지나 내지 편집도 나쁘지는 않지만, 미국판의 표지와 내지 편집은 대단히 훌륭하다. 책 속에 나오는 다이어리를 닮은- 피로 쓴 듯한 글씨체로 제목 와 Chuck Palahniuk의 이름이 적혀있다. 푤치면 역시 피로 쓴 듯한 글씨체로,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Where do you get your inspiration?"이라고 적혀있다. 명심해야 할 것 한가지. 절대 질문에 답하지 말 것. 원서에는 각 챕터의 날짜들 역시 피로 공들여 쓴 것 같은 음산함-을 지니고 있다.
궁금한 점 한가지. anchor books의 이 판본에는 맨 마지막에 편지 하나가 게재되어 있다. 척 팔라닉에게 보내는 편지로, "많은 편지를 받으시겠지만, 이 글을 읽어봐주세요."라면서 "이 글의 대부분을 이번 여름에 썼습니다. (중략) 정말 돈은 제 목표가 아닙니다. 나는 이 글이 출판되어 가능한한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어떤 점에서는 이 책이 한 사람을 계몽할 수 있겠지요."라고 한다. 다시 말해, 미래의 미스티가 이 책을 읽고 그녀의 삶을 이런 식으로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당부의 말을 담고 있는 것. 노라 아담스라는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마치 이 책의 진짜 저자인양, 이 이야기가 사실인 양 암시하는 이 마지막 장이- 왜 이 부분이 한국 출판본에서는 빠져 있는 것인지? (겨우 한장밖에 안되는데.) 아니면 내가 산 한국판 책에만 그 한장이 빠져있는 것인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5-03-30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라님, 이 책이군요, 리뷰 당선 된 것이.
좀 늦었지만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marina🦊 2005-03-30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리뷰 당선은 그저 황송할 따름이지요 -ㅅ-
척 팔라닉이 워낙 매력 있는 작가라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마냐 2005-04-04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축하드림다. 저도 곧 리뷰로 화답하겠슴다. 척 팔라닉, 정말 장난 아니죠. ^^

marina🦊 2005-04-04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리뷰 고대하겠습니다.
척 팔라닉 좋아하시는 분을 만나 반갑습니다.
 
바디 스내처 - 이색작가총서 1
잭 피니 지음, 강수백 옮김 / 너머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잭 피니의 <바디스내처>를 다 읽었다. SF 공포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다른 SF 소설 류를 읽었을 때 처럼 과학적인 논리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공상과학공포소설.


미국의 한 소도시의 의사 마일즈가 옛 여자친구 베키의 방문을 받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고등학교 때 연인 사이였지만 이제 두 사람은 나이도 들었고 둘 다 이혼 경력이 한번씩 있는 상태. 베키는 친구 윌마가 자기를 키워준 삼촌이 삼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하며 도움을 청한다. 베키와 함께 윌마를 찾아 이야기를 들은 마일즈. 생긴 것도 말하는 것도, 심지어 옛 기억도 다 똑같은데 그 사람이 아니라니! 문제는 그런 증상(?)의 식구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러던 마일즈는 친구 잭의 부름으로 그의 집에 찾아간다. 잭은 이상한 물체를 보여주는데, 시체인 동시에 시체가 아닌, 그러니까 한 번도 생명을 얻은 적이 없을 것 같이 생겼지만 인간과 똑같이 생긴 물체(?)가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그 물체가 잭과 거의 흡사하게 생겼다는 것. 잭과 잭의 아내, 그리고 마일즈와 베키는 거대한 꼬투리에서 사람이 자라나 진짜 그 사람을 대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잭과 잭의 아내, 마일즈와 베키, 이 네 사람은 자신들을 닮은 물체가 성장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겁한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책 자체로 이미 베스트셀러였던 데다가 영화로도 몇 번이나 만들어진 이 작품은 1955년에 씌여졌다. 사랑하는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존재로 변해간다는 설정, 생김새는 똑같지만 특유의 감정이 결여되어 있는 존재로 알맹이가 쏙 바뀐다는 설정은 무섭기 그지없다. 이른바 "내가 니 엄마로 보이니" 얘기인 것이다. 인격이 사라진 인격체들, 게다가 거대한 포자에서 사람들이 만들어진다는 설정, 그리고 진짜 사람과 그 물체가 바꿔치기당한다는 설정은 공포 그 자체. 잭과 베키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 이 상황과 맞부닥치는 며칠간의 이야기를 그린 이 책은 350여 페이지임에도 금방 읽힌다. (그리고 진짜 무섭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은 확실히 공포소설에서 가장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장치인 것 같다.


진짜 재미있는 건,
1. 밀 밸리라는 소설 속 소도시는 실제로 잭 피니가 죽을 때 까지 살던 도시 이름이라는 것.
2. 주인공 마일즈의 친구 잭(잭 피니와 이름이 같은)의 직업이 소설가라는 것.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어쩌면 경험담인지도 모른다- 는 것이다. 헤헤.


마일즈는 그렇게 교체된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지만, 가짜에게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가짜는 말한다. "그건 그리 나쁘지 않아. 야망이나 희망, 그런 것들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덧붙인다. "그런 감정에 수반되는 긴장과 고민까지 자네는 갈망의 대상이라고 말할 셈인가? 그건 그리 나쁘지 않아, 마일즈. 진심으로 하는 얘기야. 그건 평화롭고, 조용해. 음식은 여전히 맛있고, 책을 읽어도 재미있고..."
"하지만 글을 쓸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거지."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더 이상 힘겹게, 희망을 가지고 글을 쓰려고 악전고투하지는 않는다는 얘기군. 아니면 그런 감정들을 더 이상 느끼지 않거나. 그것들은 다 사라져 버렸다는 뜻이야. 안 그런가, 매니?"



글을 쓰고 싶은 욕망과 잘 써 지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절망을 느끼지 않고, 그저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구나, 음식은 맛있구나 하는 생각을 건조하게 하는 삶이 살아있는 것이냐, 아니냐. 아니다. 공포소설이지만, <바디스내처>는 진짜 '살아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섹스가 오로지 종족 보존의 수단인가? 식사는 오로지 생명 연장의 수단인가? 그런 거 아니란 말이다. 잭 피니는 글을 쓰는 것에 비유했지만 사실 글 뿐이 아니다. 잘 생긴 사람을 보면서 그냥 잘생긴 사람이구나 하고 감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사랑이 주는 절망과 희열을 모두 겪게 만드는 욕망 없이 대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아간단 말인가. 욕망이 없으면 고통도 없어지겠지만, 그래서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디 스내처 - 이색작가총서 1
잭 피니 지음, 강수백 옮김 / 너머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잭 피니의 <바디스내처>를 다 읽었다. SF 공포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다른 SF 소설 류를 읽었을 때 처럼 과학적인 논리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공상과학공포소설.


미국의 한 소도시의 의사 마일즈가 옛 여자친구 베키의 방문을 받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고등학교 때 연인 사이였지만 이제 두 사람은 나이도 들었고 둘 다 이혼 경력이 한번씩 있는 상태. 베키는 친구 윌마가 자기를 키워준 삼촌이 삼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하며 도움을 청한다. 베키와 함께 윌마를 찾아 이야기를 들은 마일즈. 생긴 것도 말하는 것도, 심지어 옛 기억도 다 똑같은데 그 사람이 아니라니! 문제는 그런 증상(?)의 식구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러던 마일즈는 친구 잭의 부름으로 그의 집에 찾아간다. 잭은 이상한 물체를 보여주는데, 시체인 동시에 시체가 아닌, 그러니까 한 번도 생명을 얻은 적이 없을 것 같이 생겼지만 인간과 똑같이 생긴 물체(?)가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그 물체가 잭과 거의 흡사하게 생겼다는 것. 잭과 잭의 아내, 그리고 마일즈와 베키는 거대한 꼬투리에서 사람이 자라나 진짜 그 사람을 대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잭과 잭의 아내, 마일즈와 베키, 이 네 사람은 자신들을 닮은 물체가 성장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겁한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책 자체로 이미 베스트셀러였던 데다가 영화로도 몇 번이나 만들어진 이 작품은 1955년에 씌여졌다. 사랑하는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존재로 변해간다는 설정, 생김새는 똑같지만 특유의 감정이 결여되어 있는 존재로 알맹이가 쏙 바뀐다는 설정은 무섭기 그지없다. 이른바 "내가 니 엄마로 보이니" 얘기인 것이다. 인격이 사라진 인격체들, 게다가 거대한 포자에서 사람들이 만들어진다는 설정, 그리고 진짜 사람과 그 물체가 바꿔치기당한다는 설정은 공포 그 자체. 잭과 베키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 이 상황과 맞부닥치는 며칠간의 이야기를 그린 이 책은 350여 페이지임에도 금방 읽힌다. (그리고 진짜 무섭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은 확실히 공포소설에서 가장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장치인 것 같다.


진짜 재미있는 건,
1. 밀 밸리라는 소설 속 소도시는 실제로 잭 피니가 죽을 때 까지 살던 도시 이름이라는 것.
2. 주인공 마일즈의 친구 잭(잭 피니와 이름이 같은)의 직업이 소설가라는 것.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어쩌면 경험담인지도 모른다- 는 것이다. 헤헤.


마일즈는 그렇게 교체된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지만, 가짜에게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가짜는 말한다. "그건 그리 나쁘지 않아. 야망이나 희망, 그런 것들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덧붙인다. "그런 감정에 수반되는 긴장과 고민까지 자네는 갈망의 대상이라고 말할 셈인가? 그건 그리 나쁘지 않아, 마일즈. 진심으로 하는 얘기야. 그건 평화롭고, 조용해. 음식은 여전히 맛있고, 책을 읽어도 재미있고..."
"하지만 글을 쓸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거지."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더 이상 힘겹게, 희망을 가지고 글을 쓰려고 악전고투하지는 않는다는 얘기군. 아니면 그런 감정들을 더 이상 느끼지 않거나. 그것들은 다 사라져 버렸다는 뜻이야. 안 그런가, 매니?"



글을 쓰고 싶은 욕망과 잘 써 지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절망을 느끼지 않고, 그저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구나, 음식은 맛있구나 하는 생각을 건조하게 하는 삶이 살아있는 것이냐, 아니냐. 아니다. 공포소설이지만, <바디스내처>는 진짜 '살아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섹스가 오로지 종족 보존의 수단인가? 식사는 오로지 생명 연장의 수단인가? 그런 거 아니란 말이다. 잭 피니는 글을 쓰는 것에 비유했지만 사실 글 뿐이 아니다. 잘 생긴 사람을 보면서 그냥 잘생긴 사람이구나 하고 감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사랑이 주는 절망과 희열을 모두 겪게 만드는 욕망 없이 대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아간단 말인가. 욕망이 없으면 고통도 없어지겠지만, 그래서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