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이 소설은 같은 문장이 도돌이표처럼 계속 돌아와 읽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미친 소설일 수 있다.
다른 어떤 이에게 이 소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나를 잘 이해하는 소설이라며 극찬하게 만드는 최고의 소설일지도 모른다.
극단적으로 호불호가 갈릴 이 소설이 지금 많은 이에게 읽히는 이유란, 일차적으로 욘 포세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겠다. 한 번은 읽어보게 하는 힘이 아직까지 있는 것이다, 노벨문학상이란.
제목에서 영혼의 이끌림을 느낀 이도 있을 수 있다. 멜랑콜리아, 우울증, 고대 그리스에서 검은 쓸개즙이 과도하게 분비되어 생기는 기질로 정의되어 온 이 단어 자체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등장하는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화가다.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다. 그는 연인도 있다. 그림 공부를 하러 독일로 떠난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헬레나라는 연인이 있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린다. 지금 그는 스승인 한스 구데에게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하숙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리니까. 옆방에서 그의 연인 헬레나의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그는 가야 한다. 그는 의심한다. 내가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고 스승이 판단하면 어떡하지? 그림을 그리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림을 잘 그리는 내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생각은 꼬리를 물고 돌고 돌아 반복되고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리는데.....
내가 이 소설에 집중하게 된 건 75페이지의 '희고 검은 천'의 묘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그 전까지 긴가민가 따라가던 라스 헤르테르비그에게서 나는 검은 쓸개즙의 탁하고 지독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내 몸 속에도 흐르는 검은 액체, 한 번 멜랑콜리아에 잠식되기 시작하면 침대나 소파 위에 눕거나 앉은 채 꼼짝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의심한다. 다른 평범한 일은 할 수 없다. 짐을 싸거나 잔을 잡고 뭔가를 마시거나 앞에 앉은 상대방에게 말을 걸 수 없다. 눈앞을 온통 희고 검은 천이 지배하기에, 그것에 대해서밖에 말할 수 없다.
희곡 작가이자 소설가인 욘 포세는 어느 날 미술관에서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그림 <보르그외위섬>을 우연히 보고 충격을 받아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멜랑콜리아1'과 '멜랑콜리아2'사이에 짧게 삽입된 작가 비드메의 이야기에서 소설 전체의 시작점을 알 수 있다. '그는 라스헤르테르비그가 그린 구름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비밀스러운 본성을 예술의 형태로 표현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노르웨이 교회의 사제와 만나기 위해 어둠 속의 빗길을 걸었다'(345쪽) 민음사 책 표지에 실린 그 그림, 흰 구름과 검은 대지가 교차되는 그림 앞에서 찾아내려 애쓴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한 긴 소설.
예술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내는 작업이고, 길고 어려운 작업 속에서 많은 이들이 검은 쓸개즙 아래 쓸려내려갔고,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라스는 정신병원에 갇혔다 고향으로 돌아왔고 광기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생애를 가진 화가에 대해 소설을 쓰는 비드메라는 소설가를 등장시킨 작가 욘 포세의 작품 [멜랑콜리아]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어떤 힘인지에 대해 설명하려면 다른 한 권의 책이 필요할 것이다...
나 역시 검은 쓸개즙을 뱉어내지는 못하고 도리어 꿀꺽 삼키기만 하는 인간 유형에 해당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