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기원 - 시리 허스트베트 에세이
시리 허스트베트 지음, 김선형 옮김 / 뮤진트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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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는 이른바 '어머니'가 아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들을 떠올릴 때마다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전형이나 클리셰도 아니고, 남녀의 위계질서에 갇힌 사람도 아니고, 위대한 어머니나 동정녀 마리아나 대자연이나 육아 잡지에 실리는 부드러운 광고에 등장하는 어머니상의 컬트도 아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관념들은 선악의 대비가 노골적인 엄격한 도덕주의로 어머니 노릇을 침범한다.

시리 허스트베트, 어머니의 기원, 뮤진트리, 40쪽


시리 허스트베트 개인의 어머니로 시작되는 에세이는 세계 전체의 '어머니'라는 관념-버지니아 울프가 '집안의 천사'라 정의한 가부장적 세계 속 어머니라는 개념-을 고찰하며 뻗어나가는 지적 여정을 거침없이 수행한다. 이 묵직한 에세이는 작가의 어머니로 시작해 여성혐오를 고찰하는 연구로 확장되며 한없이 깊어진다. 작가 본인이 겪은 여성혐오 사례들, '뇌 문신'이라 이름붙인 수많은 사례를 열거하며 여성혐오의 시작을 고대 그리스부터 추적해 현대 과학 연구까지 침범한 고정관념을 발견하고 타파한다.


시리 허스트베트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줄리엔 반 룬의 [생각하는 여자]라는 책에서였다. 철학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여성 사상가들을 찾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책으로 책 자체도 인상깊었고 책에서 소개된 이름을 전부 적어두었다. 시리 허스트베트의 데뷔작을 찾아 읽었고 작가 폴 오스터와 결혼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의 아내, 무의식적인 여성혐오적 사고방식, 에세이에서 허스트베트는 자신의 작품을 남편이 썼다고 굳게 믿는 기자와 독자들을 만났던 경험을 언급한다. 에세이에 실린 문학-과학-철학-사회학-기타 수많은 학문의 장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사유하는 그의 글을 읽으면 빛나는 지성을 결코 의심할 수 없다. 내 안에도 자리한 여성혐오적 사고방식을 발견하는 건 고통스럽다. 이 에세이는 불편하다. 그렇기에 반드시 읽어야 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훌륭할 리 없다는 선입견의 안경을 쓴 이들이 '감히 글을 쓰지 말고 아이를 낳고 키워라!' 외치며 분노하며 날뛰게 내버려 두고, 그는 유유히 자신의 글을 쓴다. 이제 반대로 정의한다. 폴 오스터가 시리 허스트베트의 남편이라니, 얼마나 좋을까!


-185쪽, 그리고 결단코 말하지만, 문학이 늘 편안한 여흥에 머물지는 않는다. 편안한 여흥일 때는 문학이 당신의 미래를 바꿀 수 없다. 개념적 틀과 반복되는 삶의 학습된 패턴에 갇힌 당신을 끌어낼 수도 없다. 편안한 여흥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나는 193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들에 약하고, 그런 영화들은 걸출하지 않더라도 내 허기를 충분히 채워준다. 문학이 대구 간 기름처럼 매일 아침 건강을 위해 삼켜야 하는 영양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오트밀에 잘못 부은 오렌지 주스와는 상당히 비슷할 수 있다.이게 대체 뭐지? 뭔가 잘못됐어. 내 예상과 전혀 다르잖아. 가끔 우리는 위대한 문학이 방향의 재설정을 요구하기 때문에 반감을 느낀다. 그런 책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방어기제를 내려놓아라. 심호흡하라. 예술은 섹스와 같다. 긴장을 풀지 않으면 즐길 수 없다.


-413쪽, 여자는 꼭 어머니가 되지 않더라도 처벌대상이 된다. 오히려 '자식이 없다'는 말은 이기적이다'와 동의어가 된다. 모든 여자는 부조리한 문화적 절대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이에 따르면 여자인 나는, 오로지 당신, 영원한 남자-아이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남자-아이를 달래주고, 진정시키고, 먹여주고, 품어주고, 우러러보고, 열렬히 사랑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이 충분히 만족할 만큼 내가 이 역할을 이행하지 않으면, 나는 버르장머리 없고 사악하고 매정한 나쁜 년, 즉 마녀가 된다. 내 앞에 쏟아지는 욕설과 주먹다짐과 발길질은 다 내가 자초한, 말하자면 당해 마땅한 처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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