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VS 사람 - 정혜신의 심리평전 2
정혜신 지음 / 개마고원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나는 인간을 다룬 글을 좋아한다. 평전, 자서전, 인터뷰는 물론이고 정혜신이나 강준만의 인물비평도 좋다. 특히 정혜신이 쓰는 ‘심리평전’은 독특한 재미가 있다. 역사가가 쓰는 평전은 학문적 엄밀성을 담보할 수 없는 인간의 심리보다는 눈에 보이는 사실을 중시하게 된다. 어떤 행동을 했는가, 어떤 배경이나 상황에서 그러한 선택을 했는가가 초점이 된다. 하지만 심리학자 정혜신은 그러한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 인간의 심리와 무의식을 꿰뚫어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나는 그래서 정혜신의 글을 좋아한다.

   
  나는 모든 사람이 대단하다고 느끼며, 동시에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외적으로 이룬 성취나 사회적 위치를 감안하면 ‘대단하다’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오지만, 휘장을 걷고 한 발짝만 안으로 다가서면 대단한 사람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반복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 7쪽  
   


  저자는 모든 사람은 대단하지만 동시에 대단하지 않다고 말한다. 아마도 인간이라는 존재자체로 대단하지만, 또 인간이기에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거기서 거기라는 말인 것 같다. 정혜신은 정몽준이나 이명박, 박근혜를 다루는 글에서는 그 금언의 가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대단해보이지만 결국은 대단하지 않은, 한 인간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것이다. 하지만 정혜신은 이창동과 박찬욱, 문성근을 다룰 때는 지극히 얌전해진다. 이름만 들어도 대단해보이는 사람들이 정말로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사실밖에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라이벌매치라 보러 갔는데 볼넷만 뿌려대고 제대로 된 승부는 나오지 않으니 답답한 것이다. 이럴 바에는 ‘vs’라는 대결방식을 버리고, 개개인에 더 집중하는 것이 옳았다. ‘개별화’, 그것이 정혜신이 인간을 바라보는 원래의 시선이 아니었던가?

   
  나는 ‘개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진보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문제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 8쪽
 
   

  글을 읽다보면 인간이란 자기의 마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결국 대통령이든 ‘일개’ 시민이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고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상식적으로 옳은 것인지 치열하게 성찰할 때 그 개인으로서나 그 사회로서나 발전할 수 있다. 그럼, 내면에 눈을 돌리지 않고, 자기의 무의식적인 욕망이 덕지덕지 묻은 결정을 해놓고서는 ‘우국의 결단’이라고 칭하는 사람은 어떤가? 답이 없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의 상담소를 찾는 수밖에.

   
  고뇌하고 회의하는 ‘자기성찰’이 동반된 행동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법이다. - 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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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여호 2011-06-03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저 사람일 뿐이죠...
멋진 글 잘 읽고 갑니다.

송도둘리 2011-06-03 18: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사람 VS 사람 - 정혜신의 심리평전 2
정혜신 지음 / 개마고원 / 2005년 2월
절판


나는 모든 사람이 대단하다고 느끼며, 동시에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외적으로 이룬 성취나 사회적 위치를 감안하면 ‘대단하다’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오지만, 휘장을 걷고 한 발짝만 안으로 다가서면 대단한 사람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반복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7쪽

나는 ‘개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진보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문제에서는 특히나 그렇다.-8쪽

내가 경험했다고 해서 그 문제의 보편성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동일한 경험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사안이라도 그때마다 개별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29쪽

IBM 회장을 지낸 한 경영자는 기업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자신의 성공사례를 참조하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자신의 성공사례에서 ‘일정한’ 틀을 취해서 적용하기 시작하면 ‘새로운’ 성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앨빈 토플러도 "과거의 성공을 미래의 가장 위험한 요소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30쪽

게임 설계자는 게임에 중독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전체 구조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환경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다.-56쪽

현실감각을 유지하려면 타인의 행위 뒤의 동기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현상적 시각이 필요하다. 내가 보고 싶은 상황만 보지 말고 나와 타인의 전체적 현실을 동시에 인식해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으니 문제다.-63쪽

"영화촬영 현장이란 때때로, 또는 자주 소외의 구조 속에 빠질 때가 많다. 역할이 작을수록 중심에서 멀어진다. 중심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심지어 지금 어떤 장면을 찍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수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현장의 변두리에서 고개를 파묻은 채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스스로 인식하면서 작업에 임할 수 있는 열린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이창동의 발언)-89쪽

96년 문성근은 한 대학의 강연장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각자 개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바탕으로 부자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버지와의 일정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119쪽

그에 대해 김민기는 웃으면서 "사는데 소시민적인 삶이고 자시고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반문한다.-162쪽

불문학자인 김화영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 출판사들이 우리 작가의 작품 중에서 번역출판하길 원하는 첫째 조건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작품이란다.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은 삶의 근원적 딜레마를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199쪽

고뇌하고 회의하는 ‘자기성찰’이 동반된 행동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법이다.-204쪽

부끄러움이란 ‘자아에 집중하고 자존감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감정’ 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대로 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남자는 자기 중심이 튼실한 매력적인 남자라는 게 내 생각이다.-229쪽

"상식적 판단에서 옳은 일이라면 바꾸지 말자. 내가 죽을 때까지 그 원칙에서 흔들리지 말고 나아가자" 고 다짐한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또 지위가 달라진다고 해서 자신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손석희의 발언) -273쪽

"골프를 못 배워서 사람 사귀는 게 불가능한 사회라면 이미 썩은 사회이므로 혼자 지내는 쪽을 택하겠다" (손석희의 발언)-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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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 외로움에게 - 지구 위를 혼자 여행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 개정증보판
김남희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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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이렇게 평온하기만 해도 되는 걸까. 갈등도, 상처도, 흔들림도 없는 날들이 고요히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쳐서 독이 되곤 했던 외로움마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일상은 평화로웠다. 간이 안 된 국처럼 싱거운 인생이라니. 한 번뿐인 삶을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내 유일한 무기는 타인의 슬픔을 알아채던 예민한 감정선뿐이었는데, 나는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잡문에 불과한 여행기마저 써지지 않았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외로움이 나를 여기까지 몰고 왔음을. 외로움이 내가 가진 전 재산이었음을. 결국 이번 여행은 제 발로 뛰어든 셈이었다. 한밤중에 나를 서성이게 하고, 타인의 온기를 더듬게 만들고, 찰나일지언정 소통을 꿈꾸게 하는 외로움 속으로. 짜릿한 지옥이냐, 지루한 천국이냐의 갈림길에서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그 결과, 지금 난 서울에서 삼만 리 떨어진 칠레의 산 속을 혼자서 헤매고 있다. 벌써 한 시간째다. 

  한 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연재물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외로움이 내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는 표현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신문 한 면에 사진 몇 개와 함께 실린 글쓴이의 여행기는 길지 않았지만, 그 솔직한 고백들에는 나로 하여금 글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신문을 다 읽고, 나는 자발적으로 글쓴이가 지은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제목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 책을 골라 읽게 되었다. 그녀의 글에서 끌림을 느꼈던 것은 뭔가 그녀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 텐데, 막상 책을 읽다보니 나와는 다른 점이 더 많아보였다. 그녀는 완전한 ‘유목민’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착민’ 중에서도 정착민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여행을 통해서 인생을 배우고 있었지만 나는 변변한 여행조차 다녀본 적이 없다.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군 입대 전에 일주일 여정으로 남도를 둘러봤던 것이 전부였다. 그 여행조차도 후반 며칠 간은 외가와 친가를 번갈아가면서 용돈을 받아내는(!) 순회모금행사에 불과했다. 때문에 나는 여행을 통해 배운다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오히려 여행은 돈낭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정착민’으로서의 내 자신을 합리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은이가 여행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어려움을 겪고, 새로운 장소에서 몸과 마음을 달래는 과정을 보면서 유목민에 대한 동경이 다시 살아났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알 것 같이 말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나. 많이 알고 배운 듯 하지만 사람들과의 공감능력은 떨어지는 나. 이런 나에게는 없는 야성과 열정, 실패와 도전, 감동과 공감이 유목민의 삶에는 살아 숨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정착민의 안정된 삶을 살아가지만 유목민이 가지고 있는 사슴과 호랑이 가죽도 부러운 것이다. 나는 그동안 수확한 쌀 몇 되를 주고 이렇게 그네들의 ‘무용담’을 듣고 있지만, 눈은 계속 ‘게르’ 안에 놓인 호랑이 가죽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유목민의 얼굴의 상처와 성치 못한 한쪽 다리가 그 가죽을 얻기 위한 댓가였음을 알기에 그저 침만 꿀꺽 삼키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무용담 듣기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직접 유목민의 삶을 체험해볼 때 막연한 동경과 갈증은 사라질 것이다. 다시 정착민의 삶으로 돌아오더라도 유목민의 삶의 교훈, 즉 공감과 열정의 능력은 정착민의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더 많이 가지려 할수록 공허해질 뿐이고, 비울수록 채워진다는 것을. 삶의 질은 많이 갖는 데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덜 갖되 더 충실한 삶’을 사는 데 있다는 것을. 세상을 바꾸는 일은 내 일상의 작은 변화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기쁘게 해나갈 때 내가 사는 세상의 희망도 커질 것임을 믿는다. 여행은 그렇게 삶과 세상을 향한 나의 믿음을 변화시켜 주었다. - 306쪽      
   


  이 에세이에 담긴 김남희 씨의 글은 미려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며 연상되는 글쓴이의 목소리는 낮게 깔리고 이따금 뜸을 들이는 느린 말투였다. 신문에서 읽었던 여행기는 재치 있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완급이 잘 조절된 느낌이었는데, 이 책에 담긴 글들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너무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그 점은 아쉽다. 끝으로 지은이는 소심하고 비관적이며 까다롭다고 본인을 평가하고 있지만 이런 ‘거친’ 경험들을 하면서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 결코 ‘소심’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대범한 체 하며 폼을 잡으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찬 나 같은 이에게 소심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아무튼 김남희 씨의 앞으로의 여정에도 행운이 가득하기를 빌어본다. 그리고 삶에 대한 다른 생각과 시도들, 그리고 조금은 힘을 뺀, 더 재미있는 글들도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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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둘리 2011-05-17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안 사실인데 작년에 개정증보판이 나온 모양이네요. 이 서평은 2009년에 나온 초판을 보고 쓴 것이라, 개정판과는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 지구 위를 혼자 여행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 개정증보판
김남희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0월
품절


스스로 변화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에겐 누군가 나타나 길을 열어준다. -25쪽

산다는 일은 누구에게나 신성임을 몸으로 증거하던/검은 피부의 가난한 사람들이,/내게 말을 걸어왔다./어떻게든 살아지는 거라고./누구에게나 가끔은 견디기 어려운 날들이 찾아오기도 하는 거라고./너는 그런 날들 중의 하루를 지나가고 있는 것뿐이라고. - 53쪽-53쪽

누군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다면 변화는 절대로 그냥 찾아오지 않아. 모든 자유에는 슬프게도 피의 냄새가 깃들어 있는 거라고. 내가 너처럼 따뜻한 가슴을 가진 지성인들에게 바라는 게 뭔지 알아? 너의 여동생과 아내에게 기다리라고만 말할 게 아니라, 누군가 야스민처럼 사회적인 관습에 대항해 싸울 때 적어도 그들 편에 서주는 거야. -102쪽

길들여진 것을 보는 것. 그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길들여진 영혼을 대하는 건 언제나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갇혀 있는 동물이나 비상하지 못하는 새나 (비록 그 자유의 비상에는 죽음의 공포가 따른다 해도) 체제와 사회에 길들어 순해진 사람들을 보는 것, 자기 앞에 놓인 생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은 사람의 얼굴을 대하는 것, 그건 늘 나를 불편하게 한다. 아직은 내가 자유의 깃발에 목숨을 걸기 때문일까.-144쪽

이상했다. 어째서 아름다운 것들은 함께 바라보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걸까.-196쪽

절박함을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것, 어쩌면 그게 우리 세대의 치명적인 약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상처받고, 넘어지고, 울면서 좌절도 하지만 그 모든 아픔이 생존의 절박함에서는 벗어난 것들이 아니었을까. 다른 생각이라고는 할 틈조차 없이 살기 위해 달려들어야만 했던 이들에 비해 내가 끌어안았던 고민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덫이었으니까.-272쪽

아들에게 열심히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그래서 아들과 함께 발전하고 성장하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문세에 관한 언급 중에서)-278쪽

"이런 말하기 정말 미안하지만…….", "내가 하는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우린 살면서 이런 말들을 너무 쉽게 하면서 살아간다고. 하기 미안한 말과 들어서 오해할 수 있는 말은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게 좋은 거라고. (이문세에 관한 언급 중에서)-283쪽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더 많이 가지려 할수록 공허해질 뿐이고, 비울수록 채워진다는 것을. 삶의 질은 많이 갖는 데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덜 갖되 더 충실한 삶’을 사는 데 있다는 것을. 세상을 바꾸는 일은 내 일상의 작은 변화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기쁘게 해나갈 때 내가 사는 세상의 희망도 커질 것임을 믿는다. 여행은 그렇게 삶과 세상을 향한 나의 믿음을 변화시켜 주었다. -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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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둘리 2011-05-17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개정증보판이 나왔다고 합니다.이 밑줄긋기는 2009년에 나온 초판을 보고 쓴 것이라, 개정판과는 페이지나 문장 인용이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위대한 유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2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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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고전에 속한다. 으레 고전을 읽을 때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기 마련인데, 이 책을 읽을 때만큼은 그런 경직된 마음을 풀어도 좋다. 우선 이 책은 너무도 재미있다. 마치 TV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철저하고 단순하게 ‘캐릭터화’ 되어있다. 또,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의 엉뚱한 대사와 해학적인 행동들은 작가의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준다. 주제 또한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다. 바로 동서고금을 통틀어 오랫동안 다루어졌다고도 할 수 있는, 부와 명예 그리고 행복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때문에 나는 오랜만에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는 속도감을 느끼면서 책을 읽었다.

  주인공 핍은 대장장이인 매부의 집에서 얹혀살고 있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핍의 누나는 동생을 '손수' 키웠지만 사랑을 주지는 못했다. 핍은 누나의 질책과 호통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유년기는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이다. 때문에 이 시기에 사랑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는 자아정체성 형성에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핍은 자존감이 아주 낮은 아이로 그려진다. 그러다가 핍은 우연한 기회에 예쁘지만 차가운 성격의 에스텔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낮은 자존감은 폭발한다. 그녀의 화려함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녀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핍의 내면은 자괴감으로 타들어간다.

  어쩌면 핍이 에스텔러를 좋아하게 된 것도 낮은 자존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부모에게 학대받은 아이는 자신을 학대하는 '실재'의 부모와 사랑하는 부모에 대한 '기대' 속에서 괴로워한다. 자신이 학대의 피해자라고 생각지 못하고, 원인을 자신에게 찾아 내면에서 스스로 학대를 반복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성장해서도 지속적으로 자신을 학대해줄 새로운 사람을 찾는다. 매 맞고 자란 아이가 때리는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이처럼 자기학대에 익숙한 핍은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에스텔러를 사모한다. 에스텔러와 핍 사이에 놓인 간극은 핍의 자존감을 더욱 갉아먹지만 핍의 동경은 깊어간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자기를 둘러싼 환경을 더욱 혐오하게 된다.

대체 인간은 유년으로부터, 그리고 부모로부터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70쪽 (김형경의 『사람풍경』70쪽)

   
  우리 누나의 양육 방식은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누구한테 양육을 받든지 간에 아이들이 존재하는 조그만 세계에서, 부당한 처사만큼 아이들에게 예민하게 인식되고 세세하게 느껴지는 것은 없다. 아이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처사가 그저 조그만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는 작은 존재이고 아이의 세계도 작다. 그리고 그런 작은 세계에서 아이의 흔들목마는 비율로 칠 때, 우락부락한 아일랜드 사냥개만큼이나 커다랗고 높이 솟은 존재로 보이는 법이다. (중략) 내가 당한 그 모든 처벌과 구박, 밥굶기와 잠 못 자기, 그리고 참회를 강요하는 그 밖의 여러 고행들을 통해 나는 이 확신을 키워 나갔으므로, 내가 정신적으로 소심하고 매우 예민하게 된 주된 원인은 바로 혼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이 확신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간 탓에 있다고 믿는다. (『위대한 유산』, 1권 118-119쪽)
 
   

  하루하루를 고통과 권태 속에서 보내던 핍은 로또에 당첨된 것과 같은 행운을 얻는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핍을 유산상속자로 지정하여 핍이 신사로서의 교육을 받도록 지원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핍은 이것으로 에스텔러와 격이 맞을 정도의 부와 사회적 지위를 갈망하던 자신의 꿈을 이룬다. 핍은 이제 자기의 고향땅과 자기를 아껴주었던 매부를 더이상 찾지 않는다. 고향에서의 시간들을 망각한 채 런던에서의 새로운 생활만이 온전한 자기 자신인듯이 행동한다. 하지만 생활은 점점 방탕해져서 빚이 쌓이고 사교계의 생활에서도 큰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던 와중에 자신의 후원자의 정체가 드러나고, 핍은 거의 손에 쥐어진 것 같았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핍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은 전개되고 만다. '막대한 유산'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말았지만, 지갑 속에 돈이 사라지고 몸이 병들어 사경을 헤매는 극단적인 몰락 속에서 핍은 '위대한 유산'을 얻는다. 자신이 그토록 비천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가장 귀한 것이며 혐오했던 사람들이 실은 성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에 대한 나의 모든 혐오감은 완전히 녹아 없어졌으며,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쫓기고 부상당하고 족쇄에 묶인 이 사람에게서 나는 오직, 내 은인이 되고자 했던 사람, 그리고 나에 대한 깊은 애정과 감사와 관대함의 감정을 기나긴 세월 동안 조금도 변함없이 간직해 온, 그런 사람의 모습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나는 오직, 조에게 배은망덕하게 행동했던 나 자신보다 훨씬 훌륭한 인간의 모습만을 발견했던 것이다. (『위대한 유산』, 2권 356쪽)
 
   

  '마음이 진정한 신사가 아닌 사람이 행동에 있어서 진정한 신사가 된 적은 세상이 시작된 이래 결코 없었다'(『위대한 유산』, 1권 332쪽)는 말에서 잘 드러나듯 이 책의 주제의식은 다소 식상한 감이 있다. 바로 돈이나 명예보다 중요한 것이 인품이며, 소중한 것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은 너무도 자주 들어온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주제의식이 그만큼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된다. 모두가 다 알지만 또 그만큼 잊기 쉬운 것이기도 하고. 어쨌든 핍의 유산 상속과정을 지켜보면서 두 가지의 생각할 거리를 얻을 수 있었다.

  첫째는 지금, 여기를 긍정하라는 메시지이다. 핍은 자기 자신부터 자신의 출신, 가족, 고향 모두를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결국 핍에게 남은 것은 자신이 가장 혐오하던 것들뿐이다. 자기 자신과 주위를 둘러보던 눈에 낀 백태를 걷어냈을 때 비로소 소중한 것들을 찾게 된다. 둘째는 관계 안에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핍은 누이와의 관계에서, 에스텔러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핍의 내상이 치유되는 과정을 보면 친구 허버트와 웨믹, 그리고 매부 핍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믿었던 연인에게서 배신당하고 자신을 파멸로 이끈 미스 해비셤과는 대조적이다. 해비셤은 마치 병원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듯 그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켰지만 핍은 달랐다. 결국 상처를 얻더라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 해답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과 타인과의 관계가 서로 맞물려 선순환할 때 자아는 성장하는 것일까. 고전의 보편성, 다시 익숙한 - 하지만 결코 쉽지는 않은 - 가르침에 귀기울여 본다.

   
  하지만 또한 그녀가 햇빛을 차단해 버림으로써 무한히 많은 다른 것들을 차단해 버렸다는 것, 그녀가 세상을 등짐으로써 치유의 힘이 있는 수많은 자연스러운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해 버렸다는 것, 그녀가 세상을 등짐으로써 치유의 힘이 있는 수많은 자연스러운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해 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마음이 자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창조주께서 정해 놓은 질서를 거스르는 모든 마음이 언제나 틀림없이 그러는 것처럼 점점 병들어 갔다는 것 등도 나는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내가 어떻게 그녀를 동정심 없이 바라볼 수 있었겠는가? (『위대한 유산』, 2권 269쪽)
 
   

마르틴 부버는 '너에게서 생성되어 나를 겨냥한다.'는 말을 했다. 관계없는 성장이란 없다. (하지현의 『관계의 재구성』,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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