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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 외로움에게 - 지구 위를 혼자 여행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 개정증보판
김남희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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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삶이 이렇게 평온하기만 해도 되는 걸까. 갈등도, 상처도, 흔들림도 없는 날들이 고요히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쳐서 독이 되곤 했던 외로움마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일상은 평화로웠다. 간이 안 된 국처럼 싱거운 인생이라니. 한 번뿐인 삶을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내 유일한 무기는 타인의 슬픔을 알아채던 예민한 감정선뿐이었는데, 나는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잡문에 불과한 여행기마저 써지지 않았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외로움이 나를 여기까지 몰고 왔음을. 외로움이 내가 가진 전 재산이었음을. 결국 이번 여행은 제 발로 뛰어든 셈이었다. 한밤중에 나를 서성이게 하고, 타인의 온기를 더듬게 만들고, 찰나일지언정 소통을 꿈꾸게 하는 외로움 속으로. 짜릿한 지옥이냐, 지루한 천국이냐의 갈림길에서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그 결과, 지금 난 서울에서 삼만 리 떨어진 칠레의 산 속을 혼자서 헤매고 있다. 벌써 한 시간째다.
한 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연재물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외로움이 내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는 표현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신문 한 면에 사진 몇 개와 함께 실린 글쓴이의 여행기는 길지 않았지만, 그 솔직한 고백들에는 나로 하여금 글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신문을 다 읽고, 나는 자발적으로 글쓴이가 지은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제목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 책을 골라 읽게 되었다. 그녀의 글에서 끌림을 느꼈던 것은 뭔가 그녀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 텐데, 막상 책을 읽다보니 나와는 다른 점이 더 많아보였다. 그녀는 완전한 ‘유목민’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착민’ 중에서도 정착민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여행을 통해서 인생을 배우고 있었지만 나는 변변한 여행조차 다녀본 적이 없다.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군 입대 전에 일주일 여정으로 남도를 둘러봤던 것이 전부였다. 그 여행조차도 후반 며칠 간은 외가와 친가를 번갈아가면서 용돈을 받아내는(!) 순회모금행사에 불과했다. 때문에 나는 여행을 통해 배운다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오히려 여행은 돈낭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정착민’으로서의 내 자신을 합리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은이가 여행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어려움을 겪고, 새로운 장소에서 몸과 마음을 달래는 과정을 보면서 유목민에 대한 동경이 다시 살아났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알 것 같이 말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나. 많이 알고 배운 듯 하지만 사람들과의 공감능력은 떨어지는 나. 이런 나에게는 없는 야성과 열정, 실패와 도전, 감동과 공감이 유목민의 삶에는 살아 숨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정착민의 안정된 삶을 살아가지만 유목민이 가지고 있는 사슴과 호랑이 가죽도 부러운 것이다. 나는 그동안 수확한 쌀 몇 되를 주고 이렇게 그네들의 ‘무용담’을 듣고 있지만, 눈은 계속 ‘게르’ 안에 놓인 호랑이 가죽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유목민의 얼굴의 상처와 성치 못한 한쪽 다리가 그 가죽을 얻기 위한 댓가였음을 알기에 그저 침만 꿀꺽 삼키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무용담 듣기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직접 유목민의 삶을 체험해볼 때 막연한 동경과 갈증은 사라질 것이다. 다시 정착민의 삶으로 돌아오더라도 유목민의 삶의 교훈, 즉 공감과 열정의 능력은 정착민의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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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더 많이 가지려 할수록 공허해질 뿐이고, 비울수록 채워진다는 것을. 삶의 질은 많이 갖는 데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덜 갖되 더 충실한 삶’을 사는 데 있다는 것을. 세상을 바꾸는 일은 내 일상의 작은 변화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기쁘게 해나갈 때 내가 사는 세상의 희망도 커질 것임을 믿는다. 여행은 그렇게 삶과 세상을 향한 나의 믿음을 변화시켜 주었다. - 30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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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세이에 담긴 김남희 씨의 글은 미려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며 연상되는 글쓴이의 목소리는 낮게 깔리고 이따금 뜸을 들이는 느린 말투였다. 신문에서 읽었던 여행기는 재치 있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완급이 잘 조절된 느낌이었는데, 이 책에 담긴 글들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너무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그 점은 아쉽다. 끝으로 지은이는 소심하고 비관적이며 까다롭다고 본인을 평가하고 있지만 이런 ‘거친’ 경험들을 하면서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 결코 ‘소심’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대범한 체 하며 폼을 잡으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찬 나 같은 이에게 소심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아무튼 김남희 씨의 앞으로의 여정에도 행운이 가득하기를 빌어본다. 그리고 삶에 대한 다른 생각과 시도들, 그리고 조금은 힘을 뺀, 더 재미있는 글들도 나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