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2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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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고전에 속한다. 으레 고전을 읽을 때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기 마련인데, 이 책을 읽을 때만큼은 그런 경직된 마음을 풀어도 좋다. 우선 이 책은 너무도 재미있다. 마치 TV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철저하고 단순하게 ‘캐릭터화’ 되어있다. 또,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의 엉뚱한 대사와 해학적인 행동들은 작가의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준다. 주제 또한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다. 바로 동서고금을 통틀어 오랫동안 다루어졌다고도 할 수 있는, 부와 명예 그리고 행복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때문에 나는 오랜만에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는 속도감을 느끼면서 책을 읽었다.

  주인공 핍은 대장장이인 매부의 집에서 얹혀살고 있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핍의 누나는 동생을 '손수' 키웠지만 사랑을 주지는 못했다. 핍은 누나의 질책과 호통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유년기는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이다. 때문에 이 시기에 사랑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는 자아정체성 형성에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핍은 자존감이 아주 낮은 아이로 그려진다. 그러다가 핍은 우연한 기회에 예쁘지만 차가운 성격의 에스텔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낮은 자존감은 폭발한다. 그녀의 화려함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녀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핍의 내면은 자괴감으로 타들어간다.

  어쩌면 핍이 에스텔러를 좋아하게 된 것도 낮은 자존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부모에게 학대받은 아이는 자신을 학대하는 '실재'의 부모와 사랑하는 부모에 대한 '기대' 속에서 괴로워한다. 자신이 학대의 피해자라고 생각지 못하고, 원인을 자신에게 찾아 내면에서 스스로 학대를 반복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성장해서도 지속적으로 자신을 학대해줄 새로운 사람을 찾는다. 매 맞고 자란 아이가 때리는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이처럼 자기학대에 익숙한 핍은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에스텔러를 사모한다. 에스텔러와 핍 사이에 놓인 간극은 핍의 자존감을 더욱 갉아먹지만 핍의 동경은 깊어간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자기를 둘러싼 환경을 더욱 혐오하게 된다.

대체 인간은 유년으로부터, 그리고 부모로부터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70쪽 (김형경의 『사람풍경』70쪽)

   
  우리 누나의 양육 방식은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누구한테 양육을 받든지 간에 아이들이 존재하는 조그만 세계에서, 부당한 처사만큼 아이들에게 예민하게 인식되고 세세하게 느껴지는 것은 없다. 아이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처사가 그저 조그만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는 작은 존재이고 아이의 세계도 작다. 그리고 그런 작은 세계에서 아이의 흔들목마는 비율로 칠 때, 우락부락한 아일랜드 사냥개만큼이나 커다랗고 높이 솟은 존재로 보이는 법이다. (중략) 내가 당한 그 모든 처벌과 구박, 밥굶기와 잠 못 자기, 그리고 참회를 강요하는 그 밖의 여러 고행들을 통해 나는 이 확신을 키워 나갔으므로, 내가 정신적으로 소심하고 매우 예민하게 된 주된 원인은 바로 혼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이 확신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간 탓에 있다고 믿는다. (『위대한 유산』, 1권 118-119쪽)
 
   

  하루하루를 고통과 권태 속에서 보내던 핍은 로또에 당첨된 것과 같은 행운을 얻는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핍을 유산상속자로 지정하여 핍이 신사로서의 교육을 받도록 지원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핍은 이것으로 에스텔러와 격이 맞을 정도의 부와 사회적 지위를 갈망하던 자신의 꿈을 이룬다. 핍은 이제 자기의 고향땅과 자기를 아껴주었던 매부를 더이상 찾지 않는다. 고향에서의 시간들을 망각한 채 런던에서의 새로운 생활만이 온전한 자기 자신인듯이 행동한다. 하지만 생활은 점점 방탕해져서 빚이 쌓이고 사교계의 생활에서도 큰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던 와중에 자신의 후원자의 정체가 드러나고, 핍은 거의 손에 쥐어진 것 같았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핍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은 전개되고 만다. '막대한 유산'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말았지만, 지갑 속에 돈이 사라지고 몸이 병들어 사경을 헤매는 극단적인 몰락 속에서 핍은 '위대한 유산'을 얻는다. 자신이 그토록 비천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가장 귀한 것이며 혐오했던 사람들이 실은 성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에 대한 나의 모든 혐오감은 완전히 녹아 없어졌으며,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쫓기고 부상당하고 족쇄에 묶인 이 사람에게서 나는 오직, 내 은인이 되고자 했던 사람, 그리고 나에 대한 깊은 애정과 감사와 관대함의 감정을 기나긴 세월 동안 조금도 변함없이 간직해 온, 그런 사람의 모습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나는 오직, 조에게 배은망덕하게 행동했던 나 자신보다 훨씬 훌륭한 인간의 모습만을 발견했던 것이다. (『위대한 유산』, 2권 356쪽)
 
   

  '마음이 진정한 신사가 아닌 사람이 행동에 있어서 진정한 신사가 된 적은 세상이 시작된 이래 결코 없었다'(『위대한 유산』, 1권 332쪽)는 말에서 잘 드러나듯 이 책의 주제의식은 다소 식상한 감이 있다. 바로 돈이나 명예보다 중요한 것이 인품이며, 소중한 것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은 너무도 자주 들어온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주제의식이 그만큼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된다. 모두가 다 알지만 또 그만큼 잊기 쉬운 것이기도 하고. 어쨌든 핍의 유산 상속과정을 지켜보면서 두 가지의 생각할 거리를 얻을 수 있었다.

  첫째는 지금, 여기를 긍정하라는 메시지이다. 핍은 자기 자신부터 자신의 출신, 가족, 고향 모두를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결국 핍에게 남은 것은 자신이 가장 혐오하던 것들뿐이다. 자기 자신과 주위를 둘러보던 눈에 낀 백태를 걷어냈을 때 비로소 소중한 것들을 찾게 된다. 둘째는 관계 안에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핍은 누이와의 관계에서, 에스텔러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핍의 내상이 치유되는 과정을 보면 친구 허버트와 웨믹, 그리고 매부 핍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믿었던 연인에게서 배신당하고 자신을 파멸로 이끈 미스 해비셤과는 대조적이다. 해비셤은 마치 병원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듯 그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켰지만 핍은 달랐다. 결국 상처를 얻더라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 해답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과 타인과의 관계가 서로 맞물려 선순환할 때 자아는 성장하는 것일까. 고전의 보편성, 다시 익숙한 - 하지만 결코 쉽지는 않은 - 가르침에 귀기울여 본다.

   
  하지만 또한 그녀가 햇빛을 차단해 버림으로써 무한히 많은 다른 것들을 차단해 버렸다는 것, 그녀가 세상을 등짐으로써 치유의 힘이 있는 수많은 자연스러운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해 버렸다는 것, 그녀가 세상을 등짐으로써 치유의 힘이 있는 수많은 자연스러운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해 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마음이 자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창조주께서 정해 놓은 질서를 거스르는 모든 마음이 언제나 틀림없이 그러는 것처럼 점점 병들어 갔다는 것 등도 나는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내가 어떻게 그녀를 동정심 없이 바라볼 수 있었겠는가? (『위대한 유산』, 2권 269쪽)
 
   

마르틴 부버는 '너에게서 생성되어 나를 겨냥한다.'는 말을 했다. 관계없는 성장이란 없다. (하지현의 『관계의 재구성』,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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