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고 스트레스클리닉 소설Blue 4
김근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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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이것이 문제다. 만병의 근원. 바로 스트레스다. 스트레스가 우리에게 주는 해악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한창 놀 나이로만 보이는 초등학생에게조차 스트레스가 문제가 된다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하랴. 스트레스는 현대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필요악이다. 아마도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절대 사라지질 않을 보이지 않는 공포 그 자체다. 그런데 스트레스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삶의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만약 삶에 긴장감이 없다면 얼마나 무력할 것인가. 삶에 의욕이 없는 무기력한 사람을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문제는 스트레스가 삶의 활력소가 되어주기보단 고통이 되기에 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듯하다. 앞서 말했든지 이 스트레스는 어른 아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장차 이 사회를 이끌어갈 청소년들에게도 그들만의 스트레스가 있으며 그 고충은 말로 표현할 수도 어루만져 줄 수도 없다. 그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바로 그들 자신이다. 어쩌면 이 소설은 그런 고민을 갖고 있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바치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어제까지는 명문 외고에 다니던 엄친아 오자서. 하지만 그는 오늘부터 소위 똥통 학교라 불리는 우수고로 전학 온 문제아에 불과하다. 학창시절 한 가닥 사연 없는 이가 없을 리 만무하지만 그를 아는 이들에겐 그저 황당할 수밖에 없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그가 어떻게 해서 하루아침에 문제아가 되어 똥통 학교로 강제전학 당한 것일까. 남들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는 오자서는 새로 전학 온 학교에서의 첫날을 맞이한다. 첫날이니 만큼 무사히 하루를 보내기를 간절하게 빌어보지만 소용없다. 전학생을 타깃으로 삼는 교내 양아치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빵 셔틀 노릇을 해야 될 것만 같다. 그때 불현듯 들려오는 여학생의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자서와 같은 반인 소피아다. 괜한 참견이다 싶었는데 그녀는 양아치들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훈계를 둔다. 그런 그녀를 양아치들이 그냥 놔둘 리 만무하다. 하지만, 자서의 주먹과 발이 빨랐다. 그리고 그는 할아버지에게 어릴 적부터 훈련으로 단련된 몸이다. 그런 오자서에게 소피아는 돌연 자신이 속한 OHSC 클럽의 새 멤버가 되어 함께 하자고 한다. OHSC 즉, '우수고 스트레스 클리닉'은 학교 폭력과 왕따 등으로 교내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스트레스 제거를 목적으로 한 비밀 학생 단체다. 하지만, 오자서는 자신의 스트레스는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말과 함께 거절한다. 하지만, 소피아를 비롯한 SC 클럽 멤버들은 오자서를 영입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에게 접근한다. 그러던 중 전학 첫날 자신에게 당했던 양아치 일당에게 소피아와 함께 납치되고 마는데...

청소년 소설이라고 해서 그저 그런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재미는 물론 교훈까지 곁들여져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청소년 드라마 '학교'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 것은 그만큼 요즘의 학교생활의 모습을 잘 반영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설 속 이야기라는 점이 못내 아쉽기는 하다. 학교 내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해결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위 '똥통'이라 불리는 문제아 학교에서 그들 나름의 신념을 갖고서 행동할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것도 이유다. 날이 갈수록 교내 폭력이 심각해지고 있는 요즘의 태세에 하나의 방편은 될지언정 해결책은 되지 않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쾌함과 짜릿함은 감출 수 없다. 우수고 스트레스 클리닉 멤버들은 '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내 관점에서 아니,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는 다른 학생들에게 그것은 '정의'가 틀림없다. 그래서 비록 문제아들의 집합소일지언정 그들의 모임을 열렬히 환영한다.

학창시절의 스트레스는 결국 성인이 되어 사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폭발한다. 스트레스의 무서움은 순간의 크기보다 오랜 기간 누적된 무게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정작 현실 속에서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효율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쉽게 대답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어쩌면 조금은 황당하고 현실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우수고 스트레스 클리닉' 활동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이 많은 청소년들을 포함해 많은 이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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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현기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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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노경에 접어든 작가가 있다. 나이로 보나 얼굴의 주름으로 보나 늙었다고 말할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에게 늙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자신조차도. 세월의 무게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불멸의 삶을 얻고자 노력했던 무수히 많은 이들에게도 그것은 헛된 희망에 불과했다. 그렇게 사람은 늙어간다. 그러나 늙음, 나이 듦이라는 것은 그저 시간의 흐름에 지나지 않을까 생각되는 요즘이다. 그 이유는 나이 듦과 반대로 내 머릿속의 정신은 깊어져 가기 때문이다. 노경에 접어든 그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얼굴은 주름이 잡혔지만 심장만은 주름이 잡히지 않는 그러한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우리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은 심장의 뜨거움이다. 그 뜨거움이 세월의 무게에도 차가워지지도 녹슬지도 않은 채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는 이렇게 우리에게 자유와 나이 듦의 젊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41년 작가 인생에서 그동안 틈틈이 써왔던 산문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것이다. 14년이라는 긴 공백을 거쳐 발표된 세 번째 산문집이다. 긴 시간 동안 묻혀온 노 작가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어느 때보다 그 진중함이 느껴지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특히, 『남의 살』 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지구 상의 모든 동식물은 쌍생하기 위해서 제 살을 내어준다. 8월 중순이 되면 산에는 신갈나무와 상수리나무 잎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강풍에 의해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가위 벌레의 소행이다. 그 나뭇잎들에는 도토리가 매달려 있는데 거기에 구멍을 뚫고 알을 까놓는다. 그러니까 나무들이 제 몸의 일부, 제 살의 일부를 가위 벌레에게 내어준 것이다. 가위 벌레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푸른 초원에 무리 지어 있는 들짐승들도 무리에서 무리 중 작은 일부를 맹수에게 내어준다. 맹수들도 먹소 살아야 하니까. 동물들은 서로의 삶의 위해 자신의 살을 내어주며 희생을 한다.

인간은 다르다. 인간도 동물의 한 종류임에는 틀림없는데 무엇이 다를까. 인간도 살기 위해서 남의 살을 취한다. 하지만 자신의 살을 내어주지는 않는다. 동물들은 쌍생을 위해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며 자신도 남의 살의 일부를 취한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살을 내어주는 법이 없다. 생존을 넘어 불필요하게 살을 취하기도 한다. 단순히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더구나 때론 같은 인간의 살을 탐하기도 한다. 전쟁에 의한 학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인 듯하다. '인간의 발달은 모든 생물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것에 재앙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일부인 인간 자신에게도 무서운 위협이 되고 있다'라고 작가는 한탄한다. 오늘날 현대 사회 속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는 듯하다.

이런 것이 연륜이라고 하는 걸까. 세월의 무게를 거스를 수는 없다 해도 그에 반해 깊어지는 삶의 지혜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늙어감에 따라 예전과는 다른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다 말하는 노 작가의 말이 결코 허투루 나온 말 같지 않다. 새장 속에 갇힌 새는 멀리 볼 수도 날 수도 없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이 주는 한계를 벗어던지고 그것을 초월했을 때만이 인간의 모습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지금의 자유로움이 노 작가에게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눈앞의 가리어진 답답함을 걷어낼 수 있께 해준 듯하다. 짧은 글이 주는 무게와 여운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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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무라야마 유카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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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주위의 사랑이 필요하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이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갓 태어난 생명은 부모의 보살핌에 의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친다. 특히, 인간의 성장과정에 부모의 역할은 정말 중요하다. 절대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다. 하지만, 부모라는 존재 자체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렇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인간은 사랑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영국에서 실제로 아기들을 대상으로 실험이 진행됐다. 한 방의 아기들에게는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충분한 음식만 제공했고 다른 방의 아기들에게는 음식과 더불어 안아주고 볼을 비벼주고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들려줬다고 한다. 6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 음식만 제공했던 방의 아기들은 반 정도가 죽거나 병에 걸렸다. 결국 이후 이와 같은 실험은 금지되었다. 이 충격적인 실험 결과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것이 단순히 '의식주'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감정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게 한다.

해외근무를 하는 아버지를 따라 미국 보스턴에서 살고 있는 마후유. 그녀의 가족은 낯선 이곳에서 평범하지만 행복한 생활을 해나가지만 그것도 잠시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의 갈등은 심해진다. 그 이유까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어린 마후유에게는 언젠가부터 집안 분위기를 살피는 습관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버지는 어린 마후유를 대할 때는 한없이 다정한 아버지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집안에 울려 퍼지는 총성. 그 소리에 놀란 마후유는 아버지의 서재로 달려간다. 그곳에서 그녀가 목격한 것은 피가 흥건한 바닥에 쓰러져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잃고 그녀는 고국인 일본에서 어머니와 살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의 자살과 가족의 불행을 모두 마후유 그녀 탓으로 돌린 채 가정폭력을 일삼는다. 부모의 사랑이 한창 필요한 사춘기 시절을 어머니의 학대와 친구들의 따돌림 속에서 자라게 된 그녀는 결국 18살이 된 후 어머니가 있는 일본을 떠나 미국을 되돌아온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미국 사람인 마후유. 지금은 머피라는 미국 국적을 가진 미국인으로 살아간다. 사랑의 의미를 모른 채 살아온 그녀에게 삶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그녀를 사랑해주는 남자 랠리뿐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랠리에 대한 감정에 낯설어한다. 한 번도 사랑이란 것을 받아본 적 없는 그녀이기에 이런 감정이 사랑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런 그녀의 모습마저 사랑으로 감싸주는 랠리다. 결국 그녀는 랠리의 마음에 응답하게 되고 그와 결혼을 하게 된다. '너에게 다가온 사람은 모두 불행해진다'라고 했던 어머니의 저주도 이제 끝날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혼 직후 그녀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 랠리를 잃고 마는데...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과 닮은 랠리의 아이만 남겨둔 채 그는 그렇게 그녀 곁을 떠나간다. 평생 사랑의 감정을 모른 채 살아온 그녀가 희망이라는 '날개'를 달고 다시금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별을 담은 배>로 129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명실공히 일본을 대표하는 여류작가 중 한 명인 무라야마 유카의 이 소설은 인간에게 필요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흔하디흔한 소재라 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해 많고 많은 작가 중 한 명의 그렇고 그런 소설이라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작가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랑'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이보다 더 절실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싶다.

일본 작가의 소설이지만 이 소설의 배경은 태평양을 건너 광활한 미 대륙을 횡단한다. 미국의 중심 뉴욕에서 시작하여 태초의 지구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듯한 장엄한 그랜드 캐니언이 자리 잡은 애리조나까지 스케일이 크다. 남다른 스케일만큼이나 소설 속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야기의 큰 흐름은 '사랑'이지만 그 안에는 부모의 이혼, 아동학대, 집단 따돌림, 인종차별까지 모든 인간 군상의 모습을 다룬다. 처절하리만치 불행한 한 일본 여성이 낯선 이국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그 과정에서 슬픔을 경험하지만 결국 그녀가 찾아낸 것은 '희망'이었다.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갔기에 다시 오를 수 있는 희망이라는 '날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삶의 모습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동질감을 느끼고 위안을 받으면서 말이다. 비단 이것은 그녀뿐만이 아니라 적어도 그녀가 만난 모든 이들에게 같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성인이 된 이후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듯하다. 사랑, 그까짓 것 내가 살아가는데 머가 그리 중요할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아니던가. 아직 철이 덜 들었다고 할 수밖에 없을 듯한 생각들.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한 아이의 부모가 된 지금 더더욱. 내가 지금까지 받았던 사랑의 무게와 크기 그리고 이제 내가 주어야 할 사랑에 대해서 말이다.

소설을 읽고 난 지금 한가지 바램이 있다면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애리조나의 배경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었으면 한다. 머릿속의 상상들이 눈으로 직접 펼쳐질 때의 모습과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배우들이 어떻게 표현해낼지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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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덴탈 유니버스 - 우리가 몰랐던, 삶을 움직이는 모든 순간의 우주
앨런 라이트먼 지음, 김성훈 옮김 / 다산초당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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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토록 먼 우주에 매혹되는가?"

그렇다. 인류는 우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우주는 여전히 인류에게 신비한 존재이자 미지의 세계이며 개척함과 동시에 탐험해야 할 공간이다. 하지만 정작 인류가 우주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극히 제한적이다. 우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천문학자 및 과학자들에게도 우주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라는 신비한 공간에 매료되는지도 모르겠다. 우주를 알고자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알고자 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 이유는 우주의 기원은 곧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인 지구의 기원이며 그 속에서 유한한 생명체인 인류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를 알아가는 과정으로서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 그것이 과학자이자 인문학자인 이 책의 저자가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우주라 하면 천문학적인 과학 지식이 뒤따라야만 알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처럼 우주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기 전부터 사람들은 지구 밖을 공간을 상상해왔다. 그 상상이 멈추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기에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우주의 모습이 된 것이다. 비록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우주 공간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미지의 세계만큼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 있을까. 하다못해 하늘을 보면 쉽게 볼 수 있는 달과 별을 통해서 문학적인 감수성을 한껏 드러낼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우주를 범접할 수 없는 과학 이론으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여길 필요는 없을 듯하다. 저자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그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우주에 관한 과학 이론이 어느새 문학이라는 옷을 입고 서정적으로 변해가기 때문이다. 결국 우주에 대한 탐구는 과학적인 측면과 인문학적인 측면이 동시에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 책은 저자가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 나누어져 있다. 우연의 우주, 대칭적 우주, 영적 우주, 거대한 우주, 덧없는 우주, 법칙의 우주, 분리된 우주가 그것이다. 과학을 신봉하는 이들은 종교적인 면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종교인들은 과학을 그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이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는 문제다. 저자는 과학자이지만 종교적 접근 방식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같은 주제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많이 있다. 과연 그런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하나의 방법이 어쩌면 종교나 샤머니즘 같은 영적 접근 방식이 아닐까. 우주에 대한 탐구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의 일관된 접근 방식은 자칫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게 할 뿐이다. 하나의 이론에 다양한 이견들이 덧붙여질 때라야 비로소 진실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우리에게 해답이 필요 없는 질문도 필요'한 이유다.

우주는 여전히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진다. 그만큼 인간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인간이란 동물은 호기심이 많은 동물이다. 어쩌면 그 호기심이 인간의 문명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에게 호기심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우주에 대한 탐험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우주에 대한 탐구는 우리 자신 인간의 대한 탐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결국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곳에 있는 우주는 인간이란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을 소우주라 말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이러 이유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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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인 1
최지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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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삶. 이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유한한다. 즉, 언젠가는 그 생명의 불꽃이 꺼지기 마련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생명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불로불사의 삶은 어쩌면 인간의 끝없는 욕심에 의해 생겨난 모순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영원불멸의 삶을 원했던 이들 치고 오래도록 행복한 삶을 살았던 이가 드문 이유이기도 하다. 행운보다는 불행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좀 더 타당해 보인다.

뱀파이어. 우리가 알고 있는 불로불사의 존재 중 가장 친숙한 이름이다. 뱀파이어의 역사 또는 신화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그 유래는 기원전으로 올라간다. 기원전 125년경 그리스 신화에서 처음 뱀파이어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뱀파이어라는 어원은 1047년 러시아 대공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 또한, 뱀파이어 전설의 근원은 중동에서 발원하여 실크로드를 따라 지중해로 전해지게 되며 이후 슬라브 영토와 중부 유럽 지역으로  퍼져나간다. 뱀파이어라는 존재 자체는 그것이 지닌 오랜 역사만큼이나 여전히 우리들에게 신비한 존재로 여겨진다. 아마도 그 영향은 영화나 소설, 뮤지컬 등으로 뱀파이어가 지닌 묘한 매력을 만나왔기 때문이다. 특히, 뱀파이어와 인간의 사랑을 다룬 로맨스 소설이나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뱀파이어의 존재는 사실 동양보다 서양의 문화에 잘 어울린다. 물론, 동양에서도 그런 존재가 없진 않았다. 옛날 중국 영화에 등장했던 강시들이 비슷한 존재다. 흡혈귀 측면에서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그 둘은 차이가 많다. 엄밀히 말하자면 강시는 뱀파이어보다는 서양의 좀비에 가깝다. 뱀파이어를 떠올리면 인간과의 애절한 로맨스가 먼저 떠오르지만 강시나 좀비는 호러가 떠오른다는 점도 큰 차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이렇게 동양의 문화에 익숙지 않은 뱀파이어란 존재가 옛 조선 시대에 나타났다고 한다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점차 서양 문물이 흘러들어오는 ​조선 중기를 배경으로 말이다.

인조에 의해 소현세자가 죽임을 당하고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이 17대 조선 왕에 오른다. 소현세자를 비롯 세빈과 3명의 어린 아들 역시 역모로 몰려 죽거나 귀양에 보내진다. 그를 측근에서 보필하던 신하들도 그와 같은 운명을 맞이한다. 염일규. 그는 소현세자를 보필하던 무관이던 형의 역모 사건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 후 조정의 하급 관리 시체 나르는 일을 도맡아 오며 색주가를 넘나들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제주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조사하고 해결할 종사관에 그가 뽑히게 된다. 한순간 종 6품 벼슬에 오른 염일규는 사건보다 잿밥에 관심이 더 많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색주가를 넘나들었던 그다. 그러나 그런 염일규의 바램과는 달리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관비인 아리의 도움으로 연쇄살인사건의 조사는 철저하게 진행되고 점점 그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목에 물린 자국과 함께 몸 안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간 채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제주에 표류하게 된 하멜 선박에 있었던 고지인에 대한 존재를 알게 되지만 용의자의 탈옥으로 사건은 흐지부지하게 종결되고 만다. 한편, 그 과정에서 염일규는 자신을 도와주었던 관비 아리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아리는 염일규의 아이를 갖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마 후 조정으로부터 하멜 일행을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명이 떨어진다. 신분의 차이로 헤어질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은 결국 함께 제주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제주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고지인이 나타나며 절체절명의 순간이 찾아온다. 다행히 목숨은 부지했지만 목이 물린 채 쓰러진다. 고지인의 연쇄 살인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자신조차 고지인이 되어버린 염임규. 그는 과연 영원불멸의 삶을 얻었지만 인간의 피를 마셔야 하는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그리고 서서히 다가오는 또 다른 고지인과의 만남과 더 큰일이 염일규를 기다리고 있다.


학창시절 교과서를 통해 배웠던 하멜 표류기의 역사가 소설 속에서 되살아 났다. 서양의 뱀파이어 전설과 함께 한데 어우러져 새롭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재탄생했다. 조선 역사에서 과연 뱀파이어 존재가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존재들이 시공간을 넘어 완벽히 조화를 이뤄냈다고 밖에 할 수 없을 듯하다. 드라마 <닥터 이방인>의 원작인 <소설 북의>의 작가이자 또 다른 드라마 <추노>, <아이리스>, <공주의 남자>등의 프로듀서를 맡았던 저자답게 이번 소설도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다.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어도 될 만큼 스토리가 재미있다. 2권짜리 소설을 단숨에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처음 작가가 이 소설을 구상했을 때는 장르가 <트와일라잇>과 같은 고지인과 인간의 절절한 로맨스였다고 한다. 하지만, 초고를 다듬어 가는 과정에서 지금과 같은 무협 액션 스릴러 장르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주인공 염일규와 아리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너무 아쉽기는 했다. 뛰어넘을 수 없는 신분 차이로 인한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어느 순간 고지인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맥이 끊겨버린다. 중간중간 고지인이 된 염일규가 아내와 아이를 걱정하며 그들을 중심으로 하지만 결국 스토리의 큰 흐름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던 듯싶다. 그래서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다. 만약 앞서 얘기했듯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된다면 작가의 바램대로 두 남녀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에 좀 더 비중이 실리는 것도 좋을 듯하다. 국내 최초 조선 시대 뱀파이어 이야기 너무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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