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현기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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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노경에 접어든 작가가 있다. 나이로 보나 얼굴의 주름으로 보나 늙었다고 말할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에게 늙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자신조차도. 세월의 무게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불멸의 삶을 얻고자 노력했던 무수히 많은 이들에게도 그것은 헛된 희망에 불과했다. 그렇게 사람은 늙어간다. 그러나 늙음, 나이 듦이라는 것은 그저 시간의 흐름에 지나지 않을까 생각되는 요즘이다. 그 이유는 나이 듦과 반대로 내 머릿속의 정신은 깊어져 가기 때문이다. 노경에 접어든 그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얼굴은 주름이 잡혔지만 심장만은 주름이 잡히지 않는 그러한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우리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은 심장의 뜨거움이다. 그 뜨거움이 세월의 무게에도 차가워지지도 녹슬지도 않은 채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는 이렇게 우리에게 자유와 나이 듦의 젊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41년 작가 인생에서 그동안 틈틈이 써왔던 산문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것이다. 14년이라는 긴 공백을 거쳐 발표된 세 번째 산문집이다. 긴 시간 동안 묻혀온 노 작가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어느 때보다 그 진중함이 느껴지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특히, 『남의 살』 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지구 상의 모든 동식물은 쌍생하기 위해서 제 살을 내어준다. 8월 중순이 되면 산에는 신갈나무와 상수리나무 잎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강풍에 의해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가위 벌레의 소행이다. 그 나뭇잎들에는 도토리가 매달려 있는데 거기에 구멍을 뚫고 알을 까놓는다. 그러니까 나무들이 제 몸의 일부, 제 살의 일부를 가위 벌레에게 내어준 것이다. 가위 벌레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푸른 초원에 무리 지어 있는 들짐승들도 무리에서 무리 중 작은 일부를 맹수에게 내어준다. 맹수들도 먹소 살아야 하니까. 동물들은 서로의 삶의 위해 자신의 살을 내어주며 희생을 한다.

인간은 다르다. 인간도 동물의 한 종류임에는 틀림없는데 무엇이 다를까. 인간도 살기 위해서 남의 살을 취한다. 하지만 자신의 살을 내어주지는 않는다. 동물들은 쌍생을 위해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며 자신도 남의 살의 일부를 취한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살을 내어주는 법이 없다. 생존을 넘어 불필요하게 살을 취하기도 한다. 단순히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더구나 때론 같은 인간의 살을 탐하기도 한다. 전쟁에 의한 학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인 듯하다. '인간의 발달은 모든 생물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것에 재앙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일부인 인간 자신에게도 무서운 위협이 되고 있다'라고 작가는 한탄한다. 오늘날 현대 사회 속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는 듯하다.

이런 것이 연륜이라고 하는 걸까. 세월의 무게를 거스를 수는 없다 해도 그에 반해 깊어지는 삶의 지혜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늙어감에 따라 예전과는 다른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다 말하는 노 작가의 말이 결코 허투루 나온 말 같지 않다. 새장 속에 갇힌 새는 멀리 볼 수도 날 수도 없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이 주는 한계를 벗어던지고 그것을 초월했을 때만이 인간의 모습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지금의 자유로움이 노 작가에게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눈앞의 가리어진 답답함을 걷어낼 수 있께 해준 듯하다. 짧은 글이 주는 무게와 여운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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