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다시는 그 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진짜라는 것을. 나는 그가 한 일을 보았다. 한때 나는 그 자의 눈앞에서 걸어 다녔다.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두 번 다시는 내 운명을 걸고 그 자를 만나러 가지 않겠다. .........  

당신이 목숨을 걸지 않으면 그들도 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알아차린다. 어쩌면 당신은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영혼을 내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자신은 그러지 않을테다.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p.12,13)


장담컨데 제목만 보고 이 책을 고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무슨 따분한 제목이란 말인가. 실제로 나도 이 책을 보기 전까지 이는 경로효친 사상 혹은 사회복지를 새삼 강조하고자 하는 코맥매카시의 메시지가 아닐까 했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더 로드'를 먼저본 터라서,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 하는 책을 썼으니 이번엔 아마도 아들이 아버지를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일거라 지레 짐작하기도 했다. 

성격 급하게 미리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이 책의 제목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는 사실 노인을 위한 암시라기보단, 노인을 향한 경고에 가깝다. 

[사진은 영화의 스틸컷을 첨부했습니다]


'노인'이 갖는 상징성


노인을 향한 경고라는 것은 나이든 사람이 아니다.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그것은 장밋빛 뺨, 양두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의 싯귀를 읽고 나서 다시 맨 위의 보안관 벨의 독백을 보자. 그는 보안관이지만 안톤 시거 같은 살인마와 다시 마주치고 싶어하지도 않고 영혼을 걸지도 않겠다고 한다. 그는 노련하기 때문에 모든 사태를 쉽게 파악하고, 넘치는 지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자신의 영혼을 내건 모험을 하지도 않으며, 적극적으로 시거를 잡으려 하지도 않고 다만 가만히 서서 상황이 호전되기만을 기다린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다는 것은, 그저 많이 알고 사태를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행동하지 않는 이에게 던지는 일종의 경고 같은 말이다. 노인은 늙은 사람이 아니고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겁만 먹고 두려워하는 우리 대부분의 모습을 표현한 단어이다.


꿈에서 나는 아버지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서 그토록 춥고 어두운 세상의 어딘가에서 불을 피우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언제든 닿으면 아버지가 거기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p.339)



벨 VS (쉬거 혹은 모스)


소설의 전체 대결구도는 물론 시거와 모스이다. 모스는 쫓기는 사람이고 시거는 쫓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들 둘은 또 벨 보안관과 대조를 이룬다. 그들이 한 편에 서서 벨과 대조를 이루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모스는 우연한 기회에 거액의 돈을 손에 넣는다. 이 돈은 마약상들의 거래 과정에서 우연히 모스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모스는 돈에 대한 열정으로 인생을 내던진다. 시거 또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 또한 돈에 대한 열정이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그 열정은 돈보다는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에 대한 열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이 둘의 열정을 돈을 가지기 위한 젊은이의 무모함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전체적으로 소설에서 흐르는 분위기가 단순치가 않다. 그들은 돈이 아니라 무엇이든 자신의 인생을 쏟아 부을 무엇인가가 있었다면 삶을 내던졌을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 열정이 빗나간 것이거나, 사회가 만든 기준에 맞지 않는 저급한 것이라고 할 지라도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라며, 사회가 만들어 놓은 good과 evil 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good 과 bad를 행해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가 안된다고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내 열정이 그것을 원하고 있다면 하는 것! 그것이 시거와 모스가 가진 치열함이다. 



동전의 양면, 원칙(?)있는 살인




매우 전형적인 살인마의 행태를 보여주면서도 또 이전의 인물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인물은 단연 시거이다. 그의 살인행태가 이전 다른 소설이나 영화의 그것과 비슷한 이유는 무감각 하기 때문이다. 그저 본인에게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쉽게 사람을 죽이고도 일말의 감정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저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 그에게는 그가 갈 길만 남아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에게는 나름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죽이려고 했지만, 동전이 뒤집어져서 펼쳐지면 그냥 죽이지 않기도 한다. 그건 그가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피해자가 운이 좋은 것이다. 그는 '운'의 존재를 인정한다. 


22년이나 굴러다니던 동전이 상점 주인의 목숨을 구해주듯이, 우연히 선택한 길에서 살아난 사람은 그저 운이 좋은 것이다. 그는 그런 운명의 시계까지 억지로 되돌려 놓지는 않는다. 그는 나름 원칙이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잔인해서 차가 필요하면 그냥 운전자를 죽일 뿐이고 돈이 필요하면 돈을 가진 자를 죽이려 할 뿐이다. 단, 그가 운을 인정하는 범위는 자신의 라인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만이다.


1958년, 22년을 떠돈 끝에 여기에 온거요. 그리고 지금 여기 있소....

앞면이거나 뒷면이겠지. 당신이 말해 보시오. 어서.

내가 이기면 무엇을 얻는 겁니까?

전부를 얻소. 시거가 말했다. 전부.

(p.68)



욕망의 시험양 모스


모스는 가장 평범하고 일반적인 캐릭터이다. 평범하다는 것은 그가 겪게될 난관에 비하면 너무 노멀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누구나 평범하게 살면서도 그런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갖지못하지만 갖고 싶은 것들을 탐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노멀한 욕망이지만, 그 대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신의 수준 그 이상을 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세상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모스는 우연히 넣은 200만 달러의 돈으로 인해 인생 자체가 큰 시험에 빠진다. 운명에 대항해 보려고도 했고 그것을 피해보려고 발버둥도 친다. 하지만, 시거라는 큰 장애물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뿐이다. 결국, 부인도 잃고 자신도 잃고 돈도 잃고, 모든 것을 읽고 그에게는 이루지 못한 욕망만이 신기루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꿈꾸는 대부분의 욕망을 이루지 못한다. 다만 거기에 대처하는 자세에서 벨처럼 멀리서 관망하며 '나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던지, 아니면, 모스처럼 '난 내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그것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의심치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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