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자키 준이치로 단편집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용기 외 옮김 / 책사랑(도서출판)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데뷔작인 '문신'은 지금은 절판이 되어서 책을 구할수가 없었다. 다행인지 올해 1월에 비록 PDF파일이지만 이북으로 출간되었다. 호평을 받았던 단편이라 그래도 분량이 꽤 될줄 알았는데, 페이지가 20페이지도 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마스무라 야스조가 1966년 동명의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젊은 문신사 세이키치가 활동하던 시기는, 사람들이 그나마 '어리석음'이라는 귀한 덕을 가지고 있을 때였고 오직 아름다운 사람만이 '강자'이던 시대였다. 강자가 되기 위해 다들 아름다워지고 싶었으며, 때문에 몸에 문신을 새기는 고통 정도는 누구나 견딜 용의가 있었다. 세이키치는 문신을 새기는 동안 살의 욱신거림을 참지 못하고 신음이 격렬해질 때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어쩌면 그것은 그정도의 아름다움을 갖기 위해 응당 견뎌야 할 의례였으며, 그것을 감내하는 것만이 진정 '탐미적 삶'의 완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피부에 자신의 혼을 실은 문신을 새기는 것이 그의 숙원이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가마에서 삐져나와 있는 한 소녀의 발을 본다. 바로 쫓아 갔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한 세이키치는 딱 오년 만에 그녀를 다시 만난다. 다시는 그 소녀를 놓치지 않겠다고 생각한 그는 그녀를 잠재우고 등에 커다란 거미 문신을 새기기 시작한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가장 많이 오버랩 되는 작품은 아무래도 한강의 '채식주의자'였다. 연작 중 두번째 '몽고반점'에서 처제의 몸에 그림을 그려 넣는 형부의 모습이 나온다. 결국 그는 예술의 완성을 꿈꾸며 처제와 관계를 갖는다. 탐미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사회적 범주에서 보자면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미친짓이다. 탐미주의는 바로 이러한 도덕적 한계의 언저리에서 도착적 집착을 보인다. 그것을 극복하느냐 못하느냐가 완성하느냐 못하느냐의 결과로 가름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위험하다. 위험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지, 아름다운 것은 하나 같이 위험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대부분의 아름다운 것들은 위태롭다. 문신을 새길 때의 고통을 견디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어떠한 아름다움도 저항을 극복하지 않고 가질 수 없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극악의 규율조차 짓밟고 미를 향하는 본능만이 예술의 완성에 다다를 수 있다. 


세이키치는 문신을 새기기 전 소녀에게 ' 비료(肥料)'라는 그림을 보여준다. 그 그림은 젊은 여자가 벚나무 줄기에 기대 서 있고, 그 아래에 겹겹이 남자들의 시체가 즐비한 그림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성장시키고 완성시키는 것은 그 발아래 무릎꿇고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수많은 탐미주의자들인 것이다. 소녀는 부들 부들 떨며 두려워 하지만, 거미의 문신이 완성되고 난 후의 그녀의 눈빛은 그 어떤 여자의 그것보다 더욱 욕망에 가득차 있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으니 소설은 조금만 핀트가 어긋나면 오해받기 딱 좋은 소설임에는 틀림 없다. 사실 몽고반점도 이상문학상을 받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그런 역겨운 소설이라며 내던졌을 지도 모른다. 경계에 서 있는 감정들은 항상 어느쪽으로 넘어지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크게 엇갈리기 마련이다. 희한하게도 우리가 거부감을 느끼는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매번 인간의 '욕망'이다. 우리는 그것이 여과되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될 때 불편함을 느낀다. 덧붙여서 내 욕망의 방향과 조금이라도 틀어진다면 우리는 가차없이 '쓰레기'라고 규정해버리곤 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인정을 받은 것은, 욕망에서 모든 부수적인 저항을 소거해 버리고 오직 '미'의 차원으로 작품을 승화시킨 업적을 인정 받아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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