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트
서하진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파란 강물이 구불구불 흐르고 형형색색의 요트가 바람결에 흐르고 “요트”라는 글씨까지 멋을 한껏 부린 표지라서 내심 밝고 유쾌한 이야기를 기대하며 작은 책을 펼쳤다. 그런데 자잘하고 섬세한 필치로 일상을 그려내긴 했지만 밝은 얘기들만은 아니었다.

<요트> <비망록, 비망록> <농담> <꿈> <퍼즐> <시간이 흘러가도> 등 여섯 편이 묶인 단편집이다. 특이한 점은 한편을 빼곤 모두 부부의 관계를 그렸다는 점이다. 한 그릇 안의 다른 두 밀가루 덩어리처럼, 소통부재가 가져올 수 있는 부부간에 일어날 수 있는 갈등, 믿음에 대한 배신, 다른 사람을 만나 문제가 생겨 해결 과정에서 의외의 결정을 내리는 남편, 변한 남편이 있는 세상으로 들어가야 하는가의 고민 등... 정답은 없다. 하지만 지금 당신 곁의 그 사람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여전히’ 그 사람인지 한번 생각해 볼만 하겠다. 그래서 계속 또는 영원히 함께 살 것인가, 아닌가... 그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모두 일상을 어느 정도는 무덤덤하게 또 어느 한편으론 꿀꿀하게 그리고 있지만 서하진은 일상의 환상보다는 현실을 일깨워준다. 자신의 상처의 흔적들을 소설로 엮으면서 독자들에게 위로를 받으라니... 이런 어폐가 없다. 하지만 다 읽고 가만히 책을 쓰다듬으며, 접었던 대목을 다시 펼치며 작가가 내게 바란 위로가 어떤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그건 어쩌면 인생에 선물은 없다는 것, 일상에 환상은 없다는 것, 우리가 꿀꿀하게 살아가는 것, 그 사실을 일깨우려 했던 것이 바로 작가가 말한 위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찌 됐든 상처는 끊임없이 생길 것이고 그 상처 또한 시간이 흐르면 일상 속에서 치유되고 또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 또 다른 상처에 맞설 수 있지 않겠는가.  

<요트>에서는 집값이 오르자 집을 팔아 작은 데로 옮기고 나머지 돈으로 요트를 사서 세계 일주를 하겠다는 남편, 그 남편을 포기시키려는 아내. 그러다 집을 나간 아이를 구슬리는 방편이 되는 요트. 남편을 꼬드기지 말라고 요트 여행을 부추기는 남편 친구를 만난 아내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꿈에 사로잡힌 한때가 제게도 있었습니다. 저의 꿈이란, 종이작업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작가가 되는 것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는 제법 문청 소리를 들었거든요. (...) 왜 포기했는가. (...) 매일 단어가 그 많은 책들이 담고 있는 언어가, 단지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것들이 내 나날 속으로 전혀, 한치도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 스스로 돌연한 영감이라 여겼던 것이 실은 헛된 언어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 사실을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나날이 낡아가는 상상력처럼 그 깨달음도 서서히 왔습니다. (...) 요트 여행, 그 오랜 꿈이 좌절된다면 남편도 허무해지겠지요. 그렇지만 곧 잊고 살아갈 것입니다. 꿈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까요.”

<비망록, 비망록>에서는 어머니의 둑음, 집을 나간 아버지의 불륜 연애사가 적혀있는 수첩을 읽는 아들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그 어머니의 지옥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느 날 그는 어머니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했다. 진실이 고통임을, 정직하다는 것이 씻을 수 없는 죄라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여자가 있다는 것보다 그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였다.”

<농담>은 사랑이나 공감 등보다는 현실적인 조건이나 이해관계를 따져 그럭저럭 결혼을 하고 결혼생활을 마치 계획뿐인 일상처럼 하던 커플에게 일을 그만두고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아내의 작은 반란이 일으키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그 전개과정과 남자의 행동에 따라 여자가 하는 생각, 의문 등의 심리변화가 흥미롭다.

<퍼즐>에서도 상대를 얕잡아봤던 여자의 생각이 재밌다. “지은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로서는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사실보다 그가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자신이, 안이하고 미지근하게 대처했던 그 모든 순간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대책을 찾을 것이나, 그 대책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너무도 막막한 것이므로 남편이 결국은 회사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판단, 늘 그랬듯 무리수를 두지 않으리라 여겼던 그 치명적 실수. 언제, 어떻게 브레이크를 걸어야 했던 것일까. 이 일이 자신의 인생 최대의 실수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밀려들었다.”

<시간이 흘러가도>에서도 비슷하다. “언제쯤이었을까. 남편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나는 이제 지쳤어, 라고 말했을 때 그건 중대한 신호였지만 나는 깨닫지 못했다. 나는 고래 심줄이 아니야, 라고 했을 때는 내 안의 뭔가가 움찔했지만 나는 그 사실을 무시했다. 나는 두려웠다. 모든 일은 서서히, 내가 방심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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