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데뷔 25주년 기념작품'이라는 불명확한 수식어를 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어둠의 저편>이 발간되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양을 쫓는 모험>, <댄스댄스댄스>의 시기에서 환상과 비일상이라는 돌파구로 사회적인 단절감을 극복하던 작가는, <태엽감는 새>와 <해변의 카프카>를 펴내면서 더이상 현실을 비껴가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신작 <어둠의 저편>은 그의 후기 작품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속도감 있는 영화 장면처럼 분단위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자정의 시각에서 시작되어 어둠이 저편으로 물러나는 아침에 결말을 맞는다. 자정 직전인 11시56분에 마리는 도시의 한곳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앉아 귀가를 거부하고 있으며 같은 시각 마리의 언니, 에리는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다. 마리는 어둠의 한가운데에서 행동하고 소통하고 이동하는 반면 에리는 단절되고 침묵하며 옮겨진다. 마리는 어둠이 저편으로 물러날 때까지 잠들지 않고 언니 에리는 아침이 되어도 깨어나지 않는다. <어둠의 저편>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은 이전 작품에서 유사점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마리는 <댄스댄스댄스>의 어린 유키가 자란 모습이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성장통을 앓던 유키는 마리로 옮겨와 조금씩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유키가 사진작가인 엄마 아메와 소통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리는 언니 에리와 소통할 수 없다. 에리는 재능을 부여받고 주목받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유키의 엄마와 닮았다. 그러나 유키의 엄마가 외팔이 시인에서 위안을 찾고 재능을 견고하게 다듬을 수 있었던 반면에 에리는 그런 대상을 찾지 못해 방의 저편에 갈 수밖에 없다.           

하루키는 그의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보편적 폭력성'이라는 주제를 추적해 왔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의 '우익 거물'과 <댄스댄스댄스>의 고혼다, 그리고 <태엽감는 새>의 와타야 노보루를 잇는 '보편적 폭력성'을 지닌 인물은 <어둠의 저편>에서 중국인 매춘부를 폭행하는 시라가와로 표현된다. 고혼다와 와타야 노보루, 그리고 시라가와는 어둠의 저편 무의식 속에서 숨기고 있는 폭력성을 바깥으로 끌어내어 이용하고 행사한다. <태엽감는 새>의 호텔방에서 '저쪽 세계'로 이어지던 '벽'은 <어둠의 저편>에서 시라가와의 사무실과 에리가 잠들어 갇힌 공간으로 연결시켜 현실의 중국인 매춘부뿐만 아니라 에리를 시라가와의 폭력성의 대상으로 삼는다. 트롬본 연주자에서 사법고시생이 되려는 다카하시의 입을 통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자신의 내부에 '저쪽 세계'가 이미 몰래 숨어 들어와 있는데도,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와타야 노보루는 '나'의 야구방망이를 통해 단죄되지만 시라가와는 자신의 폭력을 '저쪽 세계'에 봉인해 둔채 오른손의 통증을 의아해 하며 아침을 맞는다. 단죄해줄 대상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보편적 폭력성'의 증거는 휴대전화로 응축되어 세상을 배회한다.   
<댄스댄스댄스>에서 무심한 듯 세심하게 유키를 보살펴 주던 '나'는, '나'가 등장하지 않는 3인칭 시점의 <어둠의 저편>에서는 고오로기와 다카하시로 이분되어 나타난다. 불안하게 자신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으려는 마리에게 귀를 기울여주고 손을 내밀어 잡아준다. 언니 에리를 이쪽 세계로 오도록 하는 몫은 마리에게 남겨지고 마리는 언니의 귀에 대고 '돌아오라'고 속삭인다. 마리는 '단단하게 가지고 있는 자신의 것'을 현실에 드러내야 할 과제를 부여받은 것이다.

<어둠의 저편>에서는 그의 작품들 중 전기 작품군이라 할 수 있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댄스댄스댄스>와 <티비피플> 등의 단편 들에서 볼 수 있었던 참신하고 생동감 있는 표현을 찾아보기 힘들다. 작가는 이제 단순하고 경쾌한 댄스 스텝을 거부하고 묵직한 원숙함을 보여준다. 핀볼게임과 주크박스, 원스텝다운 바가 아쉽고 그리워지겠지만, 필연적으로 작가가 인생을 살아온 시간의 더께가 제몫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댄스댄스댄스>의 '나'가  내뱉는 '목표가 있고 시행착오가 있어 사물은 비로소 이룩되는 법이지'라는 말은 모텔 알파빌의 지배인인 카오루의 세상을 사는 방식으로 보여진다. 카오루는 혹독한 시행착오를 겪은 후 일관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인물이다. 세상에 휘둘림 없이 '선'의 강한 힘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지녔다. 반면 고오로기는 욕망과 폭력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쫓겨다니며 이름을 바꾸고 힘닿는 데까지 욕망과 폭력으로부터 피해다니는 수동적인 선택을 한다.

고오로기의 입을 통해 '아무리 빨리 달려도 끝까지 도망칠 수가 없어. 자기 그림자를 뿌리칠 수 없는 것처럼.'이라고 말하는 하루키는, 그러나 어둠이 저편으로 물러설 무렵 아직은 시간이 있다.,라는 긍정의 메시지를 보낸다. <양을 쫓는 모험>의 강가에 앉아 쥐의 죽음을 슬퍼하는 '나'는 이제 <어둠의 저편>의 마리가 되어 다카하시의 위로를 받으며 다가올 새날의 징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덧붙임, <댄스댄스댄스>의 '팔 짚고 엎드려 굽혀 펴기' 식의 번역을 해오던 출판사는 여전히 그때의 성향을 버리지 못한 듯하다. 이 책의 번역은 그다지 거슬리지 않지만 역자의 말 초반의 네다섯 페이지를 할애한 자화자찬격의 출판사의 이력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또한 '통독 후 다시 읽고 싶은 대목을 언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친절하게 삽입된 소제목들은 혹시라도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면 심각한 월권이 아닌가 싶다. 책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불필요한 한자 주석 또한 마찬가지로 작가의 의도인지 편집자나 역자의 과잉친절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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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ika 2005-06-27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제가 여행 간 사이에 하루키 책이 ....그새 출간되다니....
참나, 책 살 돈도 없는 백수 신세인데, 하루키 책을 안살수도 없고, 당분간 커피 마시기를 자제하고, 책 사야겠네요..ㅠ.ㅠ

superfrog 2005-06-27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카님, 그러게요.. 그새 출간하다니, 라이카님도 없는 새에.^^
헤헤, 저도 백수 신세에 밥 먹기를 줄이고 책을 샀어요..ㅋㅋ 책, 재미나게 보세요!

어룸 2005-06-27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그래요...그런 의지가 있어야 금붕어님의 몸매가 될수 있는거였군요...!! 아아...깨달음을 얻고 갑니다!!(ㅋㅋ결국 책얘기는 한마디도 없음. 그래도 추천은 했다구요!!^^a)

superfrog 2005-06-27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밥 양은 줄이고 횟수를 늘렸다는..쿨럭!;;;
toofool님, 뭔 깨달음을 얻고 그러세요! 어여 이벤트 채점이나 하시라구요!ㅋㅋ(에.. 추천은 캄사합니다!^^)

부리 2005-07-07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붕어님 리뷰 읽고나니 이 책이 마구마구 읽고 싶어집니다. 다른 분이 쓴 서평을 보고 이 책 샀다가 다른 사람 줘버렸다는... 학생이었는데요 저희 병원에 입원했기에 그냥 줬죠..다시 살까봐요

superfrog 2005-07-09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부리님, 감사합니다!! 리뷰를 보고 읽고 싶어졌다고 하는 것만큼 더 좋은 칭찬이 어디 있겠어요..^^ (어, 근데 역시나야.. 하시며 실망하심 어쩐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