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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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전공자로 우연찮게 작가의 길로 들어선 브뤼노는 세속적 쾌락의 삶을 추구한 시대의 '내부자'이다. 반면 미셸은 생물학자로 세상을 분석적으로 바라보는 시대의 '외부자'이다. 이 둘은 이부 형제로 20세기 후반 서구 사회를 각각의 위치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 누구도 환멸감과 몰락의 느낌을 피해갈 수 없다. 그리고 이들 너머에는 마치 우주의 먼발치에서 인간의 삶을 훤히 내려다보는 신이라도 된 듯, 주인공의 역사를 전지적 관점에서 냉정하게 기술하는 인물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이것은 인류가 역사상 가장 풍요롭게 개인의 자유를 누렸다고 생각되는 20세기 후반의 서구 사회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소립자>가 주는 일차적인 충격은 작가의 이 같은 섬뜩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 이상이다. 히피/68 세대에 대한 환멸과, 현대문명과 도덕적 타락에 대한 비판, 아니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이토록 힘찬 필치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은 이제껏 보지 못했다. 거대한 비전과 상상력으로 박력 있게 밀어붙이는 작가의 뚝심은 한순간도 소설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며, 인간에 대한 싸늘한 시선과 파국으로 치닫는 충격적인 결말은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충격에 버금갈 정도다. 인류는 과연 희망이 없는 것일까. 작가는 지구를 날려버릴 레이저빔 버튼에 무심하게 손을 올려놓고 인류를 소멸시킨다. 이기심과 잔혹함이 없는, 사랑만을 꿈꾸는 새로운 종(種)의 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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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 논픽션총서 1
안인희 지음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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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국내에 나온 바그너 관련 서적들 중 가장 내실 있는 책은 김문환 교수의 <총체예술의 원류>였다. 재판이 나오면서 <바그너의 생애와 예술>이라는 제목이 앞서긴 했지만, 어쨌든 총체예술의 이념과 관련된 여러 미학적 문제들을 중심으로 다룬 책이었다. 이에 비해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는 미학보다는 독일 사회와 문화라는 콘텍스트에서 바그너를 다루고 있다. 물론 앞의 책에서도 시대의 풍운아로서의 바그너의 면모를 짚어내고 있지만, 안인희 씨의 이 책은 독일정신과 바그너와 현대사의 상관관계를 보다 폭넓은 시야로 조망한다(책을 읽다보면 신화-예술-정치의 관계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서 바그너가 선택되었다는 인상마저 종종 든다). 그래서인지 앞의 책이 민감한 사항, 특히 히틀러와의 관계에서 다소 신중한 입장을 견지한다면,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는 좀더 비판적이고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뿐만 아니라 확고한 관점과 주장이 성실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잘 조율되어 있고, 여기에 평이하지만 차분하게 쓰여진 문장이 어우러져 특별히 바그너 음악에 관심이 없는 독자에게도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글이 다소 딱딱하고 논문처럼 정형화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장점이 훨씬 많다. 일단 독일의 예술과 정치의 불균형--왜 독일처럼 수준 높은 문화를 자랑하는 나라에서 홀로코스트의 악몽이 일어났을까?--의 본질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으며, 게르만 신화의 독특함과 바그너라는 개인이 가진 사상적 모순을 잘 읽어내고 있다. 바그너에서 히틀러로 이어지는 대목도 인상적이며, 특히 히틀러의 연설 패턴에서 바그너의 음악적 구성을 추론해내는 대목은 훌륭한 지적이다. 그 외에 낭만파 예술가의 자기 아이러니나, 히틀러 이후 독일에서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이 주도권을 잡게 된 상황, 전후 독일의 독특한 참여지향의 학풍 등도 설득력 있게 설명되고 있다.

다소 욕심을 내자면, 바그너와 독일 사상사에 관련된 부분이 다소 아쉽다. 헤겔과 쇼펜하우어가 바그너에 미친 영향이 좀더 자세히 나왔으면 좋았을 것이다. 힘에의 의지를 긍정하는 니체 못지 않게 쇼펜하우어의 체념의 형이상학이 바그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에서는 니체와 바그너의 대립되는 모습만 부각된 듯한데 사실 니체 또한 나치에 의해 전용된 적이 있다. 정치와 예술, 철학의 관계는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고, 특히 독일처럼 특수한 상황에서는 더욱 이런 경향이 강하다. 물론 이런 지적으로 이 책이 갖는 가치가 퇴색되진 않는다.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를 흥미롭게 읽은 사람이라면 박지향 교수가 쓴 <슬픈 아일랜드>도 읽어보기 바란다. 여러모로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 '아일랜드다움'이라는 정체성을 화두로 삼아 아일랜드가 겪은 역사적 굴곡과 응어리, 잉글랜드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대표적인 문인들(오스카 와일드, 버나드 쇼, 윌리엄 예이츠)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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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반지의 제왕 읽기
그레고리 베스헴 외 지음, 최연순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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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컨셉은 흥미로웠으나 그 결과는 실망이다. 텍스트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여 책을 다시 들춰보게 하는 힘도 없고, 깊이 있는 철학적 질문들로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도 부족하다. 그나마 1부의 '반지'(그리고 니체의 초인의 관점에서 풀어쓴 장)가 가장 읽을 만할 뿐, 갈수록 논의가 피상적이고 진부한 수준에 머문다. 내가 기대한 것은 진지한 철학적 담론이었는데 읽고 난 뒤의 느낌은 도덕에 관한 에세이를 읽은 것 같다.

물론 '반지의 제왕'이 극히 현대적인 텍스트인 '매트릭스'와 달리 비평을 생산해내는 힘이 다소 딸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의 '반지의 제왕' 열풍이 철학적 메시지보다 블록버스터의 외양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도 인정하자.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의 해석대로 그렇게 모더니즘에 반대적이고, 도덕적으로 순결한 텍스트에 머물러있는 것 같진 않다. 비판적이기보다 찬양 일변도로 흐르는 관점이 못내 거슬린다. 그리고 군데군데 드러나는 미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도 영 불편하며, 번역기로 돌린 듯 시종일관 직역을 고집하는 번역투도 불친절하다.

이 모두는, 소설이 발표된 지 이미 50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아쉽다. 도전적인 문제제기, 당돌한 해석, 경합하는 논쟁, 깊이 있는 논의, 그리고 욕심을 내자면 텍스트가 가진 이데올로기의 측면과 수용사의 측면을 두루 포괄하는 안목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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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단편집 스티븐 킹 걸작선 5
스티븐 킹 지음, 김현우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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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단편집이 내게 안겨준 감흥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횡재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내게 남아있던 베스트셀러 작가에 대한 편견을 고백하는 동시에, 일상에 스며든 공포를 통해 삶의 심연을 드러내는 작가의 놀라운 솜씨에 경의를 표하기에 적합한 말이다. 단편 하나 하나가 짜릿짜릿한 생명력을 뿜어내면서 전체적으로 일관된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이 책은 도무지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한 단편집이다. 단순하면서도 힘있는 문장, 속도감 넘치는 전개, 그 가운데 호흡의 방점을 찍을 줄 아는 감각, 이 모두가 기발한 상상력과 긴밀히 연결됨으로써 압도적인 효과를 불러온다.

분위기 중심의 서술로 음산한 공포를 자아내는 '예루살렘 롯'은 스티븐 킹이 러브크래프트의 적자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악마적인 공포를 다룬 '맹글러'와 '도로를 위해 한잔', 신경쇠약에 걸린 남자의 악몽을 그린 '가끔 그들이 돌아온다'와 '정원사'는 B급 영화의 활달한 상상력 그 자체다. 한편 '회색 물질'은 효모가 되어버린 남자의 이야기이고 '전장'은 환각에 시달리는 남자의 이야기인데, 둘 모두 벌레가 되어버린 카프카의 인물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 단편집에서 가장 빼어난 글은, 역설적이게도 공포와는 가장 거리가 먼 '사다리의 마지막 단'이다. 마치 레이먼드 카버의 손끝을 거치기라도 한 듯 유년기의 슬픈 경험이 시적이고 아름답게 그려진 작품이다.

그 외에도 데이빗 린치, SF, 초능력, 엑스파일, 이토 준지의 공포만화 등 20세기 후반 대중 문화의 교집합들을 만날 수 있다. 번역은 무난한 정도고, 제본은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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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쏘다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실천문학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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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가가 지식인과 동의어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이때 문학가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고, 작가적 양심, 도덕, 사회 비판, 보편적 인류애 등이 여기에 자연스레 따라다녔다. <코끼리를 쏘다>에서 만나게 되는 조지 오웰의 모습은 바로 이런 전통적인 의미의 작가상이다. 문학이라는 영역에 안주하지 않고 당대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대의를 위해 봉사하는 지식인의 삶이 바로 이 에세이집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그의 모습이다.

이 책에는 삶과 정치, 일상과 문학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글을 볼 수 있다. 어떤 글이든 사회 제도와 인간성의 모순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 그의 글이 세월을 뛰어넘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억압의 시대에 대해 침묵할 수 없었던 작가의 양심적 행동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반성이 없었다면 문학을 단순히 정치의 도구로 생각하는 프로파간다의 함정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박하고 간결한 문장이 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삶의 순간순간 번뜩이는 깨달음을 문학적으로 포착해내는 힘, 그것이 아마 <코끼리를 쏘다>를 읽는 가장 큰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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