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ayonara > 은하철도999 명세리프 모음

송락현(Gazzet) - 97.5.14. ( 출처: Hitel "은철999소모임" - SG855 )

지금부터 음미해 보실.. 999 - 명 세리프 모음집은, 여러분들께서 모두 잘 알고 계시는 999의 매회 에피소드가 마감될 때마다 성우 김용식씨께서 읊으셨던 999의 엔딩 나레이션들 중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명 나레이션들을 모은 것입니다.

여건 상 TV판 113회분을 전부 수록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는 999의 나레이션은 거의 다 집산을 해 보았으니.. 한번 읽어 보시면서 999의 여운을 다시 회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 제가 일어 실력이 모자란 까닭에.. 이 대사들은 원판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지난 1985년에 발행된 능력 개발 미니 컬러 대백과 '은하철도 999 - 上,下'를 주축으로 옮겼으며.. 여기에 일부는 지난 1982년 MBC 방영판(번역이 정말 뛰어 났음) 녹화 테입을 보며 일일이 베껴 적어 옮긴 것도 있고..

마지막으로 999의 미스테리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답이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따돌림(?) 당하고 있는 극장판 '사요나라~ 은하철도999'의 마지막 부분의 감동도 옮겨다 놓았습니다.

그럼.. 지구에서 헤비멜다를 경유해 안드로메다 까지의 대 여정을 다시 한번 떠나 볼까요...

The Galaxy Express 999 - Will take you on a Journey. A never ending journey
◐⊙ A journey to the stars... ... ...

철이를 태운 은하 특급 999호는 그 무한 궤도에 올라 달리기 시작 했다. 어떤 별, 어느 곳에 갔다가 어떤 모습이 되어 여기에 돌아올지 철이는 알지 못한다.
은하 철도가 뻗어 있는 저쪽에는 영원히 반짝이는 별의 바다가 펼쳐져 있을 뿐.... [영원한 생명을 찾아 우주로...]

화성에 부는 모래 바람 소리는 그 붉은 모래 밑에서 잠자는 사람들이 흐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화성의 모래 바람은 오늘도 내일도 꿈을 이루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 그 넋을 달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화성의 모래 바람]

그로부터 15일 후에 999호는 타이탄을 떠났다. 그 옛날,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용기를 가지고 개척한 타이탄. 그러나 지금 여기에는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이 너무 많다. 인심이 너무 메마른 죽어가는 별이 되고 말았다. [타이탄에 잠든 투사]

홀로 우주를 방황하는 것은 죽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 이 무한히 넓은 우주에 반짝이고 있는 저 별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언덕에 넘어진 고독한 용사들 의 눈물이 얼어 붙은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정말이라면....... 눈물은 정말 많기도 해. [대도적 안타레스]

혜성의 집인 혜성역 까지의 길은 같은 태양계의 뜰안과 같다. 이제 그 밖으로 나간 999호의 궤도 주위에 펼쳐지는 우주는 무법 천지의 황야. 기계의 몸을 구하려고 고향인 태양계를 떠나는 철이 앞에 또 언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것은 철이도 모른다. [혜성 도서관]

블랙홀 이라고 부르는 암흑의 점 속에는 때때로 외로운 사람이 사는 별도 있다고 한다. 추억과 슬픔이 후회와 함께 조그만 덩어리가 되어 죽은 듯이 암흑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그런 별이라고 한다. [중력 밑의 무덤]

원래 이 우주에는 물체에 모양이 없는 것이 옳은지도 모른다. 사람이든 별이든 모양 그 자체는 모두 덧없는 것이다. 잠시 동안 가짜 탈을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거울을 보고 탄식할 필요가 전혀 없지 않은가! 우주의 진리는 그래야만 된다고 누르바의 유명한 우주 철학자 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모양이 없는 혹성 누르바]

넓은 우주에는 빛이 우리의 눈에 보일 즈음에는 이미 멸망해서 없어지는 별이 많이 있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 허무함을 아는 것은 은하철도로 여행하는 사람들 뿐인지도 모른다. 여행으로 살고 여행으로 죽은 유명한 방랑의 여행 작가 바톨라 바초는 일기에 그렇게 적어 두었다. [2중 혹성의 라라]

희망이란 사람의 마음에서 뻗쳐 오르는 가장 아름다운 빛이다. 설령 그것이 옳지 않은 것을 바라는 빛일 지라도 그 빛은 아주 아름다운 것이다. [물방울 별의 베토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우주의 여러 혹성에는 플라이야의 만화영화가 상영되었다. 그 제목 앞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플라이야와 그의 고양이의 이름으로 위대한 나의 친구 철이씨에게 이 한편의 영화를 바칩니다. 당신의 우정과 용기를 나는 평생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철이가 알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반딧불의 별]

약육강식. 약한자의 피를 빨아 강한자가 번영하는 것이 이 우주의 본래 모습이라 생각하니 철이는 슬퍼졌다. 먹이를 바라지는 않으나 먹이가 되는 것은 더욱 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갑 혹성]

나의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자신마저도... 그러나 운명을 거슬러 살아가려는 것이 인간이다. 철이도 그 예외는 아니다. 철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삶일지 멸망일지 아무도 모른다. [비의 도시]

만약 성인들만의 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지옥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라고 80년을 좌선을 하다가 결국 성인이 되기를 포기한 프로테우스의 수도승의 일기에 적혀있다 [참회의 나라]

프로의 혼이 영원히 방황하고 있는 별. 사람들은 그 별을 추억의 별이라고 부른다. 그 별은 멀리서도 보이며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다. [프로의 혼]

우주가 늙어 생명을 잃게 되는 날! 그날이 오면 모든 것이 멸망한다. 기계 몸을 한 인간도 멸망될 것인가? 나무로 만든 기계 인간 풍이는 벌써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우주에는 이런 일들을 모르는 채 그날 그날을 즐겁게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낙엽의 무덤]

아름다운 것이나 재능이 뛰어난 것도 언젠가는 늙어서 시들고 없어지는 것. 이것은 우주에 태어난 생물의 운명. 해적 에메랄더스는 지금 쯤 어디를 여행하고 있을지... 메텔은 남은 운명과 싸우고 있을 에메랄더스를 생각하고 있다. [해적선 퀸 에메랄더스]

별이 하나 사라졌다. 우주를 지배하는 힘의 균형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힘에 의한 것인지...... 그 답을 얻기라도 하려는 듯이 999호는 철이를 싣고 날아간다. [원시 혹성의 여왕]

인간이 만든 물건은 끝없이 우주로 뻗어나간다. 반짝이는 별빛속에서 우주를 격려하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다가 부서져 사라진다. 철이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 땀흘리며 일하는 사람이 좋았다. [강철천사]

어디를 여행하고 있어도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멀리서 별이 우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그것은 앙상하게 뼈만 남은 호로호로의 분노의 소리라고 하는데 사나이에게만 들리는 바람구멍의 노래라고도 한다. [백골의 노래]

사람들은 낳아서 자란 곳을 그들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쓰라리고 슬픈 추억뿐인 곳일지라도 그곳을 고향이라 부른다. 철이는 춥고 눈이 쏟아져 내리는 곳에 가면 그 고향을 회상 한다. [새하얀 눈의 도시]

사람의 마음 속은 이 우주보다 넓어서 다른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철이는 메텔을 믿고 여행한다. 이 은하 초특급 999호가 최후에는 어디에 도착할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희망을 안고 달리고 있을 뿐이다. [아지랭이 별의 문호]

행복한 사나이란 어떤 사나이일까? 로진잔일까? 아니야, 그는 아닐거야. 우주에서 행복이란 무엇일까......? 철이는 생각에 잠긴다. [로진잔 대륙]

고대의 어느 우주 여행자가 "희미하게 빛나는 별 속에는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모여서 빛을 내고 있다"고 하면서, 그 빛의 슬픔에 대해서 쓴 글이 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별들을 둘러보니 슬픈 빛의 별이 더 많아 보인다. [유령 세계의 필라멘트]

화가 날 때에 화를 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이라고 탕가니카호 기슭에서 리빙스턴은 일기에 적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자유롭게 동물들이 뛰놀던 오랜 옛날의 일이다. '화내는 별'은 어쩐지 그 먼 옛날의 아프리카라고 철이에게는 느껴졌다. [화내는 별]

갉아 먹히는 별은 얼마후에 송두리째 없어졌다. 그 후 에드몬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철이도 알지 못한다. [갉아 먹히는 별]

이 세상에는 누군가가 만든 한 개의 조그만 나사가 없으면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있다. 별과 별은 그러한 사람들이 흘린 땀의 결정으로 서로 모르는 사이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철이는 생각했다. [우라트레스의 나사 비]

우주에는 언제나 변함없는 법칙이 하나 있다. '너무 반짝이는 별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배신 당하여 고독한 여행을 하다 쓰러진 방랑의 공간에서 어느 화가가 마지막으로 스케치북에 남긴 이야기다. [금빛의 도시]

'죽은 자의 별'은 우주에서 가장 슬픈 곳.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다 몸을 두고 멀리 떠나간 슬픈 별... 언젠가는 자신의 몸이 그리워 사람들이 돌아온다는 별이니... [죽은 자의 별의 섀도우]

사이크롭스 박사는 죽었다. 그리고, 식민 혹성도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적었던 일기장 만은 우주를 여행하는 한 소년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위대한 사이크롭스]

개와 고양이와 죽어서 헤어진 적이 있는 나그네는 때때로 '미야의 생명의 집'에 우연히 다다르게 된다. 그러나 그 별이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별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미야의 생명의 집]

비겁한 자들도 양심은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나오네지네 대통령은 비겁한자 중에도 진짜 비겁한 자라고 우주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비겁한 자의 별]

우주에 사는 모든 인류에게 들어맞는 규칙이라도 전혀 들어맞지 않는 별이 간혹 있는 것이 있다. '안개의 도시'도 그중의 하나이다. 거기서 태어난 인간은 평생 다른 별로 갈 수 없다. 여행자는 그곳을 '아지랭이의 감옥'이라 부른다. [안개의 도시]

추억은 마음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우주라고 카스바의 늙은 화가가 말했다 그 우주는 사람이 죽을 때 그 사람과 함께 어디론가 가버린다. 아무도 손댈 수 없고 또 볼 수도 없는 그 사람의 고향으로...... [피메일의 추억]

우주에는 지난 해도 올해도 없다. 있는 것은 오직 쉴 새 없는 시간의 흐름뿐. 혹성 '폭풍의 언덕'에서 자란 사람은 이 우주의 바다를 여행하는 것이 그다지 괴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철이가 살던 지구의 한 모퉁이 쓸쓸하고 황량한 사막일지라도 이 '폭풍의 언덕'에 비하면 온실같은 느낌이 든다. [폭풍의 언덕]

가까이 가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별의 바다에는 한없이 많은 백골들이 미처 다 부르지 못한 그들의 노래를 부르면서 이리저리 떠다닌다고 한다.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다. [마녀 바르큐레]

엘아라메인에 바람이 분다. 살아있는 전쟁 괴물 사이를 스쳐 가는 바람소리는 여기서 멸망한 생물들이 과거를 뉘우치는 슬픈 노래처럼 듣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평화의 별을 찾아왔던 사람마저도 거부한 엘아라메인! 거기에는 어리석은 생물들이 남긴 유물이 슬픈 노래는 부르고 있을 뿐이다. [엘아라메인의 노래소리]

우주를 여행하다가 보면 '지금부터의 별'과 같이 새로 건설하는 별이 많다. 우주에는 '지금부터다'라고 미래를 믿는 젊은이가 많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철이의 가슴에 피가 끓었다. 개척의 불을 붙인 별들은 유난히 눈부신 빛을 발한다. [지금부터의 별]

역사가 시작 되면서 부터 인간은 싸움을 시작했다. 이야기로 듣는 싸움은 피가 끓고 살이 뛰는 재미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영화나 책을 통해 전쟁을 보고 즐긴다. 그러나 진짜 전쟁은 피와 눈물이 흐르고 허무한 무덤만이 늘어갈 뿐이다. [영원한 전투 실험장]

사람에 따라 자신이 사라진 뒤에 '마음'을 남기고 가는 일이 있다. 아주 착한 '마음'도 있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쁜 '마음'도 있다. 우주 공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마음'들이 한없이 많이 남아 있다. [망령의 터널]

철이는 사람이 죽음으로써 헤어지는 슬픔을 잘 알고 있다. 기계 인간의 영원한 생명 만이 인간을 죽음의 슬픔에서 구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메텔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착한 마음은 살아 있는 몸속에 더 많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고 있는 철이였다. 그리고 어쩌면 메텔도 그러한 것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투명한 바다의 아르테미스]

똑같이 태어나 똑같이 살 수도 있다. 똑같이 죽을 수도 있다. 시간이 조금 빗나갔을 뿐이다. 사람은 그 마음 속에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보고 마음의 격려를 받는다고 한다. [거울의 별]

우주에서 가장 정밀한 몸체를 가진 인섹터들이 잠시동안 여름의 노래를 부르면서 짧은 생애를 끝마친다. 하지만 그의 일생은 영원 불멸하는 근사한 드라마이다. [끝없는 여름의 별]

인간이라 불리우는 두 발로 서는 동물만이 특별히 뛰어난 것은 아니다. 모습이나 용모는 모르지만 다른 생명체가 우주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열차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철이의 마음속에 뭉클 거린다. 그래서 보기도 싫은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메텔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냉혈 제국]

인간이 살았던 세계를 떠나도 발소리만은 영원히 남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모두 쓸쓸한 발소리라고 한다. 귀를 기울이면 이러한 발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우주에는 여기저기에 있다. 이 세계가 시작할 때부터 계속 헤메는 발소리도 있다고 메텔은 이야기해 준다. [유령 마을의 발소리]

내일의 별에는 내일의 사람이 산다고 사람들을 말한다. 항상 어두운 밤에는 내일을 믿는 내일의 별이 수없이 빛나고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내일의 별의 환상]

우주에는 착한 생물이 많이 있다. 헤론은 그 중에서도 가장 착한 생물이라고 전해 진다. 만약 인간이 헤론과 같은 착한 마음을 가진다면, 추악한 싸움이나 비참한 전쟁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철이는 생각했다. [밤이 없는 거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옳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아름답다고 믿던 레란을 생각하면서 철이의 마음을 어지러웠다. 도대체 기계 문명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 철이는 한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눈 앞에 메텔의 아름다움만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언제까지나 영원하리라고 생각한다. [어두운 별의 자매]

그러나 거기에 신경쓰지 않으리라고 철이는 생각했다. 이 은하 여행이 언제까지 계속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메텔과 함께라면 어떠한 괴로움도 참을 수 있다. 그동안에 틀림없이 기계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철이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믿었다. [침묵의 성지]

떠난 뒤에도 마음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 불가능한, 살아 있는 몸을 가진 인간의 유일한 바램일까? 그러나 철이는, "어리석은 마음"만은 버리고 떠나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향시를 노래하는 마녀의 하아프]

메텔은 굉장히 슬픈 것 같았다. 메텔은 생기가 없다. 그 별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철이는 생각했다. 그리고 철이는 땅 속에서 자기를 구해준 마틸이 '무슨 말인가 하려다 다하지 못하고 죽어간 것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안개 낀 장례 혹성]

우주의 중 다이루우즈가 언제까지 그 혹성의 바위 위에 앉아 있었는지 기록에는 없다. 진리를 깨달았는지도 아는 사람은 없다. 999호는 두 번 다시 이곳에 정차 하지 않았다. [기계로 된 다이루우즈 스님]

점점 멀어져 가는 999호. 시작인지 끝인지도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르는 장소가 이 대우주이다. 거기서 자기의 신념을 관철시킬 수 있는 사람은 시간을 견디어 내는 능력이 있는 사람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메텔은 도대체 철이를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일까? [C62의 반란]

"자기 몸을 꼬집어야 남의 아픔을 알 수 있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격언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이다. '호기심의 별'은 자기 몸을 꼬집어 자연의 별로 돌아갔다.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 잘된 것인지 철이도 그 누구도 모른다. 그것은 추억 속에 서만 모습을 남기고 은하 철도의 차창에서 사라져갔다. [호기심이라는 이름의 별]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정의를 위해 싸운 수 없이 많은 희생자가 잠들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설명하는 메텔의 얼굴은 유난히 큰 슬픔에 잠겨 있다. 메텔은 그 희생자들에 대해 전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철이는 생각했다. [꽃의 도시]

그 유성 킬리만자로에서 성스러운 여왕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영원히 우주의 바다를 떠돈다. 그 뒤, 은하 철도로 여행하는 사람은 어두운 공간에서 성스러운 여왕이 슬프게 우는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그러나 성스러운 여왕에게 버림받은 유성 킬리만자로가 그 후 어떻게되었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대 암흑 성운 아프리카]

황무지를 개간하는 사람은 그 일에 만족을 얻을 것이라고 철이는 생각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사람의 노력을 헛되게 보고 비웃으며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철이는 생각했다. [황무지의 개척자]

떨어진 객차가 두 사람을 태우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단지, 눈을 감으면 강철같은 의지를 가진 그 사나이가 한 손에는 철이가 준 총을 들고 또 가슴에는 아름다운 부인과 자식을 안고 싸우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철이는 그것이 대단히 즐거웠다. [17억 6천 5백만 명의 거지]

철이는 잠시 생각했다............. 우주의 일을 이야기할 때 메텔의 얼굴은 굉장히 고통스러워 보인다. 메텔은 반드시 철이가 알지 못하는 우주의 커다란 비밀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물의 나라의 샤이안]

메텔이 왜 시간성의 해적과 결투를 하게 되는지 철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여기는 혹성 헤비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법자들이 판을 치며 지배하는 우주의 대 분기점. 일찍 메텔로 부터 주의를 받았지만, 그 위험 속에 뛰어든 메텔을 원망하면서 철이는 달려 간다. 아직도 목적지가 먼 철이에겐 메텔의 따사로운 정이 그립다. 메텔과 해적과의 결투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걸음아 걸음아 빨리 달려다오. [시간성의 해적.1]

시간은 흐르고 또 흘러만 간다. 과거는 언제 까지나 과거일 뿐 두 번 다시 손에 닿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철이는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고통스런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시간성의 해적.2]

철이: 흐르는 시간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나보지...?
메텔: 철아. 정말 쓰라린 경험을 했어. 철이: 응. 그래도 괜찮아. 과거는 변화시킬 수가 없다해도 내게는 미래가 있어. 큰 꿈을 가질 수 있는 미래.
철이: 그건 그렇다치고, 내가 참 이상하게 생각한게 있는데.. 왜, 왜 가짜 하록과 싸웠어...?
메텔: 철아. 그건 철이 하고는 관계 없는 일이야. 철이: 그렇지만... ... ... 인간은 누구나 과거에 아쉽게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아주 잊으려고 노력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다시 되찾기 위해 싸우기도 한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철이는, 메텔의 모험 속에서 지난날의 악몽을 돌이켜 생각하게 되어 엄마의 정을 그리며 한없이 눈물을 흘린 채 은하철도 999호에 몸을 싣고 우주 공간을 달린다. [시간성의 해적.3]

꿈인지 생시인지 지금도 믿을 수 없는 경험. 그 때, 생명을 불은 어떠한 불 보다도 아름답게 타올랐다.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 모두의 가슴 속에 생명의 불이 다 타고 있다고 생각하는 철이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생명을 먹는 성녀]

메텔은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철이가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철이는 곰곰히 생각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이 여러 가지 많지만 그중에도 흙과 더불어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무언가 희망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저 별을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짧은 생명의 이야기]

사람에게 무엇을 부탁받으면, 그리고 그것을 책임지면, 그 약속은 이루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이 아무리 곤란한 것이라도... 결국, 그것을 성공시키는 것도 실패시키는 것도 끝까지 하려고 하는 의지력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철이는 생각했다. - 그후 저 제 3혹성의 사람들을 제 3생명체라고 부르게 되었다. - 그러나, 철이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제 3 생명체]

이 넓은 우주에서 남자와 여자의 애정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만큼 진실한 것도 없다. 정글 속 깊숙이 큰 코끼리와 함께 사라져 간 한 여자가 그것을 말 해주고 있는 것이다. [큰 코끼리의 별]

꿈이라는 것은, 순식간에 깨어나 사람들을 슬프게 한다. 죽을 정도로 괴롭게 한다. - 때로는 특히,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일이라면 한 층 더하다. 그러나 이 꿈을 실현시키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철이는 갑자기 지금의 여행이 계속 되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자기도 알 수 없다. [사랑의 환상 혹성]

......부모를 모르는, 자식을 모르는...... 그런 슬픈 이름의 땅이 이 넓고 무한한 우주에는 아직도 많이 있다. 여행이라는 것은 인생의 슬픔을 만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부모를 모르는 별의 비행접시]

신이 만들어 준 땅을 자기 한 사람의 것으로 만들려고 할 때부터, 인간의 타락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인간은 무한한 우주조차 자기의 소유물로 하려 하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는 알지 못하고 그것을 거부하는 자야 말로 진정한 용사라고 우주의 창조주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바다에서 온 엘자]

'운명이 갈리는 별'의 두명의 청년이 그 뒤 어떻게 되었는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철이는 그때부터 계속 지구의 최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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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4-12-08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요일 아침이면 은하철도999 보느라 세남매가 넋나가 있었다고 엄마가 증언했다.
 


푸딩

요즘 편의점 군것질거리에 빠져서 큰일이다. 야간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거의 꼭이다시피 편의점에 들르게 되는데, 지난 주에는 요걸 발견했다. 푸딩! 푸딩 무지무지 좋아하지만, 서울 백화점 지하에서 사오는 유명 제과점 푸딩은 값도 만만치 않아서 1년에 몇번 먹을까 말까였다. 그런데 편의점에서 푸딩이!!! 바로 사와서 시식. 그런데, 칼로리를 낮췄다곤 하지만, 단맛이 지나치게 강했다. 특히 초컬릿 푸딩은 푸딩맛이 거의 나지 않았다. 그나마 커스터드 푸딩은 먹을 만하다. 꿩대신 닭이라지만 아직 멀었다. 덜 흐믈거리고 좀더 달걀맛과 우유맛이 나고, 단맛을 낮춘 고소한 푸딩을 만들도록 기술개발을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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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 2012-08-02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딩이 예쁘네요^^ 사진 퍼가요~!
 

이 영화 원제목이 연인 맞냐?
총평부터 얘기하자면, 참으로 어이없는 영화였다.
장예모가 매트릭스를 너무 많이 봤나하는 생각이 들게하던 초반부에서부터, 얘네들 이러다 칼맞아 죽는 게 아니라 얼어죽겠다하는 생각이 들게하던 마지막까지. 중반을 지나면서 객석은 웃음바다(이거 코미디 영화?), 막판에는 근처 여기저기에서 '그만 좀 죽어라''다시 살아나면 화낼거야'하고 중얼거리는 관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는 금성무를 재발견한 걸로 본전 뽑은 듯 싶고(일본 드라마 [골든볼]을 꼭 보라고 추천해줬다. (금성무, 영화나 드라마 좀 가려서 찍어!), 난 당나라 기방 모습과 의상, 중국 풍광을 본 걸로 스스로를 달랬다. 음, 그리고 웃게 해 준데도 만족해야 하나?

예고편에서 본 추석대목을 노린 한국영화들이 더 기대된다. 3편의 예고편을 봤는데, 다 한국영화였다. 한국영화의 소재들이 무척 다양해졌군. 3편 중 2편을 보러갈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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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4-09-20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금성무가 맡은 배역 중 [골든볼]에서의 역이 젤 좋더라구요. 상대역인 쿠로키 히토미 아줌마랑, 조연들이랑, 드라마 자체도 좋았지만.
 

어제 이와 관련해서 교육부로부터 [7차교육과정에서 국사교육이 선택과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항간의 이야기는 그릇된 거다]하는 내용의 단체메일을 받기도 했었다. 임지현 교수 글을 읽다보나, 생각나는 게 있다. 학부 2학년땐가 서양사 시간에 교수님이 하신 얘기. (아마도 강의실 밖이 시위대때문에 시끄러웠다 보다) 너희는 통일!통일!하고 시위를 해대는데, 뭘 위해서 통일을 하자는 거냐? 한민족이 하나로 뭉쳐서 힘을 길러 주변 나라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거냐? 통일의 목적을 명확히하고 통일을 주장하는 거냐? 대강 그런 내용의 이야기였는데, 대학교 4년간 들은 어떤 강의보다도 그때의 짤막한 얘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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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지현 교수  


고구려사 귀속논쟁은 시대착오

최근 들어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추진하면서 고구려사 귀속을 둘러싼 양국간
논쟁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대착오적이고 비역사적인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구
려사를 놓고 한국사냐 중국사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이건 2000년 전
의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중국이라는 실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국이라는 실체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요. 있었던 것은 그저 고구려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2000년 전
에 존재했던 고구려에 (근대 동아시아의 경우) 20세기에서야 등장한 근대국민국가라
는 개념을 그대로 투영시켜 버리는 것이 지금의 논쟁구도인데, 이건 시대착오입니다.
인식론적으로 성립이 안 되는 얘기이지요. 가장 비역사적인 사고방식에 입각한 논리
를 역사학자들이 전개하고 있다는 코믹한 상황이랄까요.


▲ 이거. 다 시대착오라는데.  


근대국민국가의 개념틀로 고구려사에 접근하면 안 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고구려사가 한국사라 주장하는 이들은 고구려인이 한민족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합니
다. 그런데 문제는 그 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생겨난 게 고작 100여 년 전이라는 겁니
다. 한반도의 경우 민족이라는 말이 처음 쓰였던 건 20세기 초였거든요. 북한의 사학
자들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마음대로 의역을 해서 '민족'이라는 말을 뽑아내곤 하지
만 (웃음), 사실 민족이라는 개념어는 근대의 산물입니다. 근대에야 생긴 개념을 고대
사에 대입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 내가 어디 사람이냐구?
                              © yahoo

1930년경에 폴란드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의 기록을 보면, 지금의 벨로루시와 접경지역
에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폴란드 사람입니까, 벨로루시 사람입니까?’ 라고 물은
대목이 나옵니다. 질문자가 들은 답변이 걸작입니다. 그냥 ‘우리는 여기 사는 사람들
이다’였다는 것이지요. 그럼 우리가 2000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갔다고 가정
하고, ‘당신 한국사람이요, 중국사람이요?’ 물어본다고 합시다. 고구려 사람은 뭐라
고 할까요? 당연히, 이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가자면, 당시에 고구려의 지배력이 미치는 사는 사람들은 다 자기들이 고구
려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닐 겁니다. 고구려라는 이름조차 모르고 살았던 사
람이 숱할 거예요. ‘고구려’라는 실체도 인식 못했을 겁니다.

예컨대 19세기 말에 프랑스 농민들에 대한 사회사적인 조사가 있었는데 제목
이 'Peasant being into French man'입니다. 해석하면 '프랑스 사람이 된 농민들' 정
도가 되는데, 이 조사에 따르면, 19세기 말의 노르망디 지역의 농민들은 대부분 평생
동안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4km 넘는 곳을 여행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들은 프랑스라는 실체를 모르는 것이죠. 그런데 의무교육을 시키고,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같은 걸 읽히고, 사투리 못쓰게 하고 프랑스 표준어를 쓰게 하는 과
정에서, 이 사람들이 ‘나는 프랑스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겁니다. ‘프
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취득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수입된 거죠. 연구
는 19세기 말의 프랑스 농민들이 어떻게 ‘프랑스인’으로 변모하는가를 그리고 있는
데, 그 당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난 때에요. 국민국가가 만들어지
고,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만들어진지 100년이 지난 사회의 농민들의 의식세계가 그랬
다면, 2천년 전의 고구려에 살았던 사람들은 한국이나 중국이나 심지어는 고구려 사람
이라는 의식도 안 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냥 나는 ‘여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
겠죠. 그런데 그들을 중국사의 일부, 한국사의 주역으로 끌어들이는 건 근대의 국민국
가와 그것을 지탱하는 권력의 입장에서 그들의 삶을 전유해버리는 겁니다. 그들의 삶
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고구려가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니라 말하는 그의 논리는 매우 단순한 한마디로 요약
가능하다. '민족'이라는 것 자체가 근대에서야 등장한 개념이기 때문에 고대사에 적
용 가능하지 않다는 것. 주지하다시피, 이런 관점은 민족을 초역사적 실재로 바라보
는 주류 사학과는 아예 뿌리부터 다른 것이다.



민족이 근대 이후에야 형성됐다는 주장은 제도교육에서 가르치는 내용과는 많이 다른
것 같은데요.

그럴 겁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국사’에서는 이런 말 안 하니까요. 그렇지만 이
게 상식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우리는 하나'라는 구성원 간의 동
질감을 그 전제로 하는데, 신분제-반상제가 존재했던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과연 그
게 형성될 수 있었을까요? 가령 (스누나우) 기자는 양반이고 나는 상놈이면, 내가 기
자한테 저 사람은 우리 동포고 민족이라는 느낌을 가졌을까요?


▲ 이게 바로 쇄미록, 알고 보니 보물 제 1096호. © 문화재청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사료들이 남아 있습니다. 예컨대 임진왜란 때 한 의병장
이 남긴 기록 중에 쇄미록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 보면 이런 한탄이 나옵니다. 왜군
이 쳐들어왔는데 저 아랫것들이 의병 모이라면 하나도 안 모이고, 일본군 환영해서 걱
정이라는 것이지요. 그 때 일본군 점령정책이 동네마다 쌀 나눠주고 먹을 것 나눠주
는 것이었거든요.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민족의식이 투철한’ 민중들이었다
면 일본군에 저항하고 게릴라전을 벌여야 했을 텐데, 그 의병장에 따르면 오히려 환영
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 나라도 그랬을 거 같습니다. (자신들을) 사람 취급
도 안 하고 하고 착취나 하는 양반들이 물러가고, 갑자기 쌀 나눠주겠다는 놈이 들어
온 건데 굳이 거부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민족이 쳐들어올 때마다 관민이 일치
단결해서 싸웠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서울
에 궁성 불태운 건 노비들이라는 사실만 봐도 그렇지요. 이런 것들이 지킬 것이 있는
집단과 지킬 것이 없는 집단의 차이입니다.

다른 예도 수두룩합니다. 예컨대 구한말 의병들의 경우, 동학농민군 진압하던 관군 포
수들이 의병장 밑에 용병으로 들어간 것들이 이미 실증적으로 밝혀졌습니다. 무슨 민
족의식이 있어서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인’ 사직을 구하려던 게 아니고요. 상식적으
로, 동학농민군 진압하던 포수들이 의병이 된 현상이 ‘민족의식’으로 설명이 됩니
까? 그리고 문헌들을 보면,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됐을 때 지방 양반들이 도대체 창피
해서 밖을 못 나가겠다고 두문불출한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유라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종묘사직을 잃어서, 왜놈들에게 나라를 뺏겨서가 아닙니다. 밖에 나가
니까 상놈들이 호형호제해서 창피하다는 거예요. 물론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폐지됐
다고 하지만 그건 법적으로만 그렇다는 것이고 관행은 그대로였거든요. 그런데 한일합
방이라는 건 이 사람들에게 세상이 뒤집어졌다는 걸로 다가오는 거죠. 이게 양반이 슬
펐던 진짜 이유라는 겁니다. 그런데 국사교과서에서는 마치 시일야방성대곡이니, 민영
환의 자살이니 하는 것만이 한국의 전반적인 반응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것
들에 대한 문제제기가 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한일합방이 잘 됐다는 게 아니
라, 신분제 - 반상제가 있는 사회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성립한다는 건 이렇듯 불가
능하다는 얘깁니다. 이런 것만 봐도 민족(nation)이란 건 결국은 법 앞에서 모든 시민
은 평등하다는 선언이 있고, 신분제가 폐지되고 근대 국민국가와 근대 시민권이 확립
된 다음에야 비로소 나타난다는 거죠. 상식적인 얘깁니다 이건.

말 그대로 '재미있는' 기록들이었다. 그는 같은 사실(fact)에 대해 다른 해석을 제시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로운 사실들을 내놓고 있었다. 기존의 이론과는 정면으
로 배치되는 결론을 이끌어내며, 다른 해석의 여지도 별로 없어 보이는 생소한 것들
을.





국사의 태생 자체가 '만들어진 역사'

그렇게 본다면 국사 자체를 민족과 결부시켜 서술하는 지금의 국사 교과서는 거의 알
파부터 오메가까지 틀렸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건 거의 왜곡 수준이 되
는 거죠. 그런데 그 '왜곡'된 역사서술이야말로 주류이고, 현실에서는 여전히도 공신
력 있는 '사실'로 통용되고 있는데요.

그렇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사학계의 관성이라든가, 폐
쇄적인 분위기라든가 등등. 그런데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국사’라는 것 자체의 성
격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국사라는 게 과거에 대한 이미지를 신화화시켜서 만들
어 낸다는 속성이 있거든요. 사실 국사 자체가 국가 -이를테면 대한민국이나 일본-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수단인 것이죠. 국사, 다시 말해 national
history에서 어딜 가나 발견되는 특징은 지금의 국민국가를 정점으로 하고, 과거의 역
사를 지금의 국가가 만들어지는 발전과정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다 보면 지금
의 국가를 만드는 과정에 불필요하거나, 모순되거나, 좀 헷갈리게 만드는 사실들은
다 제거하게 되는 거죠. 그 쇄미록 얘기만 해도 대학원생들에게 숙제를 내 주니까 찾
아온 자료인데, 대학원 애들 눈에도 다 보이는 자료들이 국사에선 다 은폐되어 있는
거죠.


▲폴란드 민족봉기. 1974년 라츠와프 전투.
이건 다른 나라의 '국사'도 마찬가집니다. 폴란드의 예만 들어볼까요. 19세기 폴란드
민족봉기에서도 쇄미록의 경우와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1830년에 한국 의병처럼
폴란드 양반인 슐라흐타(szlachta)들이 봉기를 일으켰어요. 그런데 당시에 농민들이
어떻게 했냐 하면, 장원에 불지르고, 그 ‘양반’ 지도자를 붙잡아서 오스트리아 점령
군에게 넘겨버렸거든요. 우리 식으로 따지면 일본 관헌이 진압하기 전에 농민이 먼저
진압해 버린 거죠. 폴란드 농민들은 독립을 무서워했거든요. 왜냐하면 러시아의 짜르
가 농노해방을 해 줬는데, 그 ‘양반’들이 지배하던 세상이 다시 오면 다시 농노제
로 돌아갈 것 같잖아요. 당시 폴란드 농민운동 지도자였던 사람의 회고록을 보면, 농
민들은 독립을 두려워했다고 나와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우리가 맨날 들었던 얘기들
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퀴리부인이 어쩌고 쇼팽이 어쩌고 등등. 쇼팽이 봉기가 진
압돼서 비엔나에서 무슨 음악을 만들었다느니 하잖아요. 그런 게 다 신화화된 이야기
라는 겁니다. 실제와는 다른.


▲베네딕트 앤더슨의 『Imagined Communities』민족이란 근대에 발명된 '상상의 공동
체'라는 주장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도 번역이 된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서는 근대역사서술의
특징을 ‘전도돼 있음’이라고 규정합니다. 우리가 항상 인과론적으로 1차대전이 2차
대전을 낳고 2차대전이 냉전을 낳고...라고 얘기하는데, 실은 거꾸로 돼 있다는 거
죠. 실제의 논리 크로놀로지(연대기)는 2차대전이 1차대전을 낳고, 1차대전이 제국주
의 전쟁을 낳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현재를 정당화하는 관점에서 출발하니까. 오늘
날 모든 역사적인 과정을 지금의 국가를 만들어왔던 과정으로 봐야 하거든요. 그러다
보면 지금의 국가가 19세기사를 낳고, 19세기사가 18세기사를 낳고... 현실적인 역사
과정이 그렇습니다. 국민국가가 목적이 된 목적론적 서술이지요. 사람들은 그걸 실증
적 과학적 역사학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실증사학의 아버지라는 랑케 자체가 실
은 프로이센 국가를 정당화했던 어용사가였다는 사실이 오늘날 연구를 통해서 밝혀졌
지 않습니까. 이건 우리나라 역사가들을 빼놓고는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단순히 ‘어용 사가’들이 교과서를 만들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니라, 발생론적으
로 봤을 때 국사라는 것 자체가 체제의 정당화를 위해 만들어진 도구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상당히 급진적인 시각이라 할 수 있다. 문제의 본질이 ‘태생적 한계’에
있다면, 해결책은 국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되니까.





민족주의적 접근이야말로 가장 비현실적

민족국가의 틀을 고대사에 대입하려는 관점 자체가 학문적으로 틀린 것이라 하셨는
데,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론하기도 합니다. 역사를 다룸에 있어 학문적 정확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가져오는 정치적 효과라는 것이죠. 요컨대, 당장 중국이라는
강대국에서 ‘역사침략’을 시도하며 땅 내놓으라고 할지도 모르는 판국이라면 우선
방어논리부터 구축하고 봐야지, 학문적으로 무엇이 더 옳은 견해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적의 공격적 민족주의 앞에서 스스로를 무장해제하는 효과를
가져올 뿐이라는 주장인데, 이를 어떻게 보십니까?

그거 정말 많이 듣는 얘깁니다. 중국도 내셔널리즘, 일본도 내셔널리즘 하니까 우리
도 내셔널리즘으로 붙어보자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이것만큼 웃기는 얘기도 없습니
다. 아니 리얼리즘적 시각에서만 생각할 때, 우리가 과연 이길 수 있을까요? 인민해방
군이나 자위대랑 싸워서 이길 수 있나요? 과연 그게 과연 '민족을 위하는 길'일까요?

중국의 동북공정의 논리, 즉 ‘고구려사는 중국사’라는 논리와 ‘고구려사는 한국
사’라는 논리는 현상적으로는 서로 팽팽하게 적대하고 있지만 사유의 틀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국사라는. 근대국가를 과거에 투영하는 인식의 틀을 공유하고 있는 거죠.
그 틀을 다 같이 공유하고 있는 판이라면, 결국 논쟁이란 건 “너네는 한국사로 주장
해라 우리는 중국사로 주장할게”가 되는 겁니다. 거기서 끝이죠. 그 다음에 무슨 해
법이 있습니까. 그저 힘의 논리만 남는 거죠. 그럴 경우 깨지는 쪽은 과연 어디가 될
까요?


▲ 얘들이랑 싸워서 이길 수 있냐는데..    © naver blog/ ssrt


나는 이게(국사라는 인식틀을 해체하는 게) 훨씬 더 실용적인 해법이라고 봅니다. 만
약 우리가 그런 국사의 틀을 깨뜨린다면, 그건 동북공정이 기반하고 있는 인식론적 틀
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비판이 되는 거죠. 실제로 이게 훨씬 더 설득력을 갖는 얘깁니
다. 제가 동유럽사 공부하면서 알게 된 리투아니아 학자만 해도 편지를 써서 제게 이
야기하는데,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이야.. 너넨 해도해도 너무한다. 우린 그래
도 그런 것(영토)으로 싸울 때는 근대 이후를 가지고 싸우는데, 어떻게 2천년 전의 이
야기를 가지고 그럴 수 있냐. 동아시아 심해도 너무 심하네."

사실 조금이라도 역사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건 누구의 눈에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한국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건 너무 코미디에요. 중국이 고구려
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는데, 이거 세계학계가 인정해버리면 곤란하니까 우리가 빨리
세계 학계에 나가서 이거 한국사라고 인정받아야 된다고 하잖아요. 이것만 봐도 얼마
나 촌놈들이냐는 거죠. 세계학계를 몰라도 저렇게 모를 수가 없어요.

사실 세계 학계에서 중국이 그런 주장 하면 바보 되는 겁니다. 그럼 세계 학계에서 우
리가 주장해야 할 건 “이거 한국사다”가 아니라, 동북공정의 주장이 얼마나 시대착
오적인 것인지, 중국 역사학이 얼마나 국가권력에 종속되어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어야
죠.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주장에 맞서 ‘아니다. 그건 한국사다’라고 말하는 게 같
이 바보 되는 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사실 그들은 세계 학계로 나가본 적이
없거든요. 아는 게 한국어하고 북한어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저렇게 국제 학계를 모르
는 사람들이 또 세계 학계는 왜 팔아먹는지 모르겠습니다. 화가 나거든요. 세계 학계
를 몰라도 유분수지요.

이 부분을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 톤은 높아지고 있었다. '세계 학계를 나가본 적도
없는 촌놈'들에 대한 타박을 듣고 있자면 '잘난 체'에 대한 거부감이 들 법도 한데,
그보다는 오히려 그가 호소하는 진한 농도의 답답함에 더 관심이 가고 있었다. 인터
뷰 내내 ‘상식’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에서도 역설적으로 드러나듯이, 폴란
드와 영국을 돌며 서양사를 공부한 이 역사학자에게 한국의 사학계란 도무지 그의
‘상식’이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갑갑한 동네인 듯했다.  



민족주의 사학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시네요.

웃기거든요. 최소한의 현실감각조차 갖고 있지 않아요. 민족주의라는 게 항상 스스로
의 역량에 대한 과대망상증이 있습니다. 예컨대 2차대전 때 나치하고 소련이 동시에
폴란드를 분할점령했잖아요 그 때 전쟁하다가 나치가 독소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폴란드의 리얼리스트들은 “할 수 없다. 소련은 연합군 측에 가
담했고 나치가 더 위험한 적이니까 일단 소련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협력해서 나치와
싸워야 된다”고 했지요. 그런데 이럴 때 나왔던 다른 입장으로는 “아니다. 우리 폴
란드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2개의 전선을 펼쳐서 소련과 나치에 동시에 대항해야
한다.”라는 게 있었습니다. (웃음) 후자에 대해선 우린 그저 웃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럼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한번 붙어보자”고 얘기할 때 동아시아 밖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역시나 그저 웃는 거죠. 이렇게 자기를 희화화시키는 민족주의
가 어디 있습니까. 자기의 '민족적 존엄성'을 지키지 못하고.


▲ 증세가 심해지면 이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  


소위 '동북아 중심국가론'이 웃긴 거랑 똑같은 거에요. 아니 한국이 동북아 중심국가
하겠다고 하면 일본이나 중국은 과연 들러리나 서 주고 있을까요. 리얼리즘의 관점에
서 봐도 상식적이지가 않은 거죠. 결국 이런 발상은 결국 중국이나 일본을 향해서 던
지는 메시지가 아니라, 철저하게 국내용이라는 겁니다. “역시 우리는 위대한 민족.
금메달도 10개나 따는 민족” 뭐 이런 자족적인 정서를 퍼뜨리고자 하는 거죠. 끊임없
이 사람들을 민족주의로 규율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랄까요.





한국 민족주의, 일본 극우파의 입지만 넓혀준다

그런데 그게 뭐가 나쁘냐는 반론도 있습니다. ‘우리’끼리 자부심을 가지고 살 수 있
다면, 그것 자체로 그저 좋은 것이라 볼 수 있지 않냐는 거죠.

세계는 혼자 사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그렇게 한국의
민족주의가 강해질 때, 상대국의 극우파 - 민족주의 또한 같이 강해진다는 겁니다. 나
는 이걸 ‘적대적 공범관계’라고 규정하는데, 이런 예를 들 수가 있습니다. 제가 아
는 일본 친구들 중에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각급학교에서 쓰게 한 정부훈령을 반대하
는 이들이 있어요. 이 친구들이 일본의 우경화나 재무장을 반대하는 웹사이트를 열고
일어 한국어 영어 3개 언어로 운영을 해 오고 있는데, 언제 한 번 SOS 메일이 온 적
이 있었습니다. 죽겠다는 거죠. 자기네들 웹사이트에는 전부 한국의 내셔널리스트들
만 들어와서 “일본놈들 나쁜놈들, 독도는 우리땅”, “기미가요 하는 놈들은 나쁜 놈
들, 태극기는 좋은 거”  하는 식으로 마구 도배해놓고 나간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
로 해 놓고 가면, 그 다음에는 일본의 내셔널리스트들이 들어와서 똑같은 짓을 한다
는 거죠. “그거 봐라. 네놈들이 히노마루나 기미가요 반대하는 건 결국 조선의 민족
주의를 돕는 것이고, 너네는 일본을 팔아먹는 매국노같은 놈들이다”라는 식으로요.


▲ 일본 극우파의 적인가, 아니면 '적대적 공범'인가?


이런 경우, 한국의 내셔널리스트들이 일본의 내셔널리스트들을 깨버린 걸까요? 전혀
아닙니다. 거기서 웹사이트 운영하는 친구들 입지만 좁아지게 만든 거죠. 반대의 경우
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새역사교과서나 중국의 동북공정 같은 것들이 나 같은 사
람 입지를 좁게 만들고 한국의 민족주의를 강화시켜주지 않습니까. 이 민족주의들은
서로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강화시켜주는 공범관
계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대적 공범관계라는 거죠. 이 고리를 깨부숴야 합니
다.

'적대적 공범관계'.  적지 않은 감정적 반발과 함께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표현
이라 알고 있다. 여기에 쏟아졌던 그 수많은 비난들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
을까.



그런데 이에 관해선 일본의 민족주의와 한국의 민족주의를 동일하게 볼 수 없다는 비
판이 많이 제기됩니다. 이른바 ‘저항적 민족주의’를 과대평가해서 팽창적 민족주의
와 동급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냐는 거죠.

그걸 두고 역사적 비대칭성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국의 경험을 가졌
던 나라의 민족주의와 식민지의 경험을 가졌던 나라의 민족주의는 역사적 경험이 대칭
적이지는 않죠. 지금 얘기한대로 ‘급’이 다른 겁니다. 근데 문제는 그 비대칭성을
우리가 충분히 인정을 하지만, 저항적 민족주의라는 이름과 비대칭성이 권력담론으로
서 혹은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담론의 모습을 은폐하는 기능을 쭉 해왔다는 겁니
다. 한일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일본의 이른바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일본민족주의
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판하면서도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오히려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한국의 우파들과 일본의 좌파들이 일본의 교과서 문제에
대해서 연합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지는데, 근데 그렇게 됐을 때 어떤 결과가 초
래되냐 하면, 일본의 좌파들이 한국의 민족주의를 강화시켜주고 정당화시켜줌으로써
그 부메랑 효과로 일본의 민족주의가 다시 강화된다는 겁니다. 적대적 공범관계에 오
히려 기여하게 되는 셈이죠.

그런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이라는 건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냉정하
게 따져 봤을 때, 사실 한국의 민족주의라는 게 중국이나 일본에게 실질적 위협씩이
나 된다고는 보기는 힘들잖아요.


▲ 김원웅 국회의원. 1995년 국회 본회의 연설을 통해 '간도는 우리땅'이라 주장한
바 있다. © ohmynews  
적어도 핑계거리는 충분히 된다는 거죠. 자기네 것을 강화시키는. 중국이 동북공정 정
당화시키는 걸 보세요. 국회의원이라는 김원웅, 몇 년 전 국회연설에서 만주수복 이야
기했잖아요. 이런 친구가 진보적인 국회의원이라 불리고 어떤 라디오방송에서는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되던데, 어이없는 일입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논리가 실제
로 그렇잖아요. 한국을 가 봤더니 고토수복이 국회에서까지 얘기되고 있고, 육사 교장
실에 갔더니 만주도 한국 땅으로 칠한 지도가 있어서 중국 장성이 그거보고 놀래고.
다 그런 걸로 정당화시키잖아요. 이런 식으로 권력 간의 담합구조가 형성이 되는 거
죠. 내가 볼 땐 그래요.

임지현 교수의 논리는 이렇다.





고구려사, '변경사'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고구려사에 국사의 틀로 접근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면,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
람직하다고 보세요?

제가 제안하는 것은 변경사(Border history)입니다. 연구 대상이 어느 하나의 국민이
나 민족국가의 단위에 포섭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만나고 교류
하는 장으로 보는 관점이죠. 그 안에서 문화적 긴장이 생기고 거기서 역동성도 생겨나
는. 그러나 사실 200년 동안 근대역사학이란 게 국사의 틀로 짜여져 온 것이기 때문
에 하루아침에 완벽한 대안이 나올 수는 없다고 봅니다. 지금은 그 단초가 될 수 있
을 법한 것들만 제시할 수 있을 뿐이지요. 이를테면 Border History 라던가 Feminist
History 같은 것들. 그 중에서도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방법론으로이라면 변경사적 관
점이 적절하다 보고요. 참고로 이성시 선생은 발해에 대해서도 변경사라고 보는 거
고. 김한규 선생은 요동사라는 컨셉으로 고구려를 보자고 하는 거죠. 한국사도 아니
고 중국사도 아닌.

변경사(Border History)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우선 국가간 경계라는 것부터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으로, 보통 자연
적인 경계(산맥이나 강 따위)에 기반한 현대 국가의 국경선만 보고서, 국민국가의 경
계란 대단히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라 생각을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경계라는 게 근대의 국경선이 지도 위에 선으로 확정되기 전까지는, 다시 말
해 근대국민국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선처럼 확실히 그어진 게 아니었죠. 대충 보
고 ‘저기까지가 우리땅이다’ 하는 식이었죠. 그러니까 그 때의 경계라는 건 사실 하
나의 지도 위에 컴퍼스와 자 대고 그은 게 아니라, 복수의 점들로 산포돼 있었던 겁니
다. 그러니까 변경이란 지역은 여기에 속하기도 하고, 저기에 속하기도 했다고 볼 수
있는 셈이죠. 가령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이라 하면 한반도의 문화와 만주 기마민족
의 문화와 대륙의 문화가 서로 만나서 교류하고 융합되기도 하면서 한반도와도 다르
고 대륙과도 다른 독자적인 문화가 나오기도 하는 거죠. 거기서 어떤 역동적인 것들
이 창조되기도 하는 공간이고요. 바로 거기에 대한 연구를 변경사(Border History)라
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학제학문으로 자리잡은 게 20년이 채 안 됩니다. 1984년도에 journal
of border studies라는 게 처음 나왔을 겁니다. border identity와 같은 서적이 모두
1998년 등 전부 최근에 나온 것들이죠. 이건 원래 유럽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학문적
경향인데, 왜냐하면 유럽에서 영토분쟁이 심했거든요. 원래 (유럽이) 지리적 경계가
유동적이지 않습니까. 바다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국경이 계속 끊임없이 변화하잖아
요. 19세기 유럽에서 영토 싸움이 치열했죠. 여기는 원래 내땅이다. 여기는 원래 우
리 역사다 하는 식으로. 그런데 그런 식의 싸움이 인식론적으로 전혀 역사적이지 못하
고, 그래 봐야 해결도 나지 않을 뿐더러, 정치적으로 봐면 결국은 국가권력이 대중을
민족주의적인 선전선동에 동원하는 데 아주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거
든요. 그래서 변경사 같은 방법론들이 등장하게 됐지요.

예를 들어봅시다. 가령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경우, 노르망디 공은 영국 왕의 가신
이기도 했지 않습니까. 이런 게 변경이지요. 그리고 스페인과 프랑스의 경계에 위치
한 바스크 지역 같은 경우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바스크는 나는 스페인도 아니고 프
랑스도 아니라는 입장이잖아요. 하지만 바스크는 완전히 동떨어진 역사입니까? 그리
고 일본의 대마도. 대마도의 영주는 도쿠가와 막부의 가신이자 조선 왕의 신하가 공
식 명칭이었잖아요. 그렇다면 대마도 같은 경우에도 일본사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사로 주장하자는 건
아니고. 같은 관점에서 제주도도 다룰 수 있을 겁니다. 가령 오키나와 음악을 연구하
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오키나와의 음악이 제주도와 놀랄 정도로 같다는 겁니다.
이럴 경우 오키나와와 제주의 연관성을 연구해 볼 수도 있겠죠.


▲대마도. 변경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는데. © naver 포토앨범 /
cskimop
우스갯소리로 이런 이야기들이 있는데, 제주 분리운동 혹은 제주 분리당이 필요할 수
도 있다는 거예요. 제주도의 경우 외지인이 소유한 땅의 비율이 90%가 넘거든요. 그래
서 분리당 같은 거 하나 만들고, 오키나와-제주 연합을 구성해서 본토 사람들 땅을
다 뺏고 그 동안 당해왔던 것에서 벗어나면 안 되냐는 거죠. 제주도는 당연히 우리
땅? 그건 대체 누구의 입장이냐는 겁니다.


이렇게 접근하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중국사냐 한국사냐는 식의 싸움이 없어져 버리
는 거죠. 그 근거를 밑바닥에서 송두리째 뒤집어 엎는 거니까. 일본의 국사에 대해서
도 홋카이도 오키나와 대마도 규슈 하나하나 변경으로 털어버렸을 때 일본의 국사도
순조롭게 해체할 수 있는 것이고요.

변경사.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변경사가 국사를 해체한 다음의 대안이다?

꼭 변경사만은 아닙니다. 보더 히스토리는 가장 큰 차원에서의 얘기지만 가령 교육 같
은 경우에는 로컬 히스토리, 내가 충청도 연기중학교에 다닌다 하면 충청도 연기군의
역사를 쓰는 거죠. 지금까지 로컬 히스토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다 중앙정부의 연
관 속에서만 다뤄져 왔거든요. 충청도에 관찰사가 언제 왔고 하는 식이죠. 그런 게 아
니라 연기군에 살았던 주민들의 입장에서 로컬 히스토리를 재구성하는 게 그 교사와
학생들이 해나갈 수 있는 훨씬 더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동학농민군 때 관군
이 와서 어떻게 해서 어떻게 했다더라. 구술사 같은 방법론으로, 한국전쟁 때 국방군
이 와서 어떻게 했대더라, 인민군이 와서 어떻게 했대더라. 그런데 이런 게 가능하려
면 입시가 바뀌어야지. (웃음) 지금같이 하나의 해석만 주어 놓고 달달 외우게 하는
식의 입시제도 하에서는 힘든 얘깁니다.

오히려 이런 얘기에 가장 반발하는 게 전교조 역사교사 모임 같은 경우에요. 지금 역
사교사들이 다 이런 틀에서 공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우리 휴머니스트
출판사 사장 같은 경우에 죽겠다고 하거든요. 출판사에서 전교조 역사교사들이 만든
대안교과서도 냈는데, 그 교사들이 이 책(<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냈다고 항의를 하
는 겁니다. 어떻게 대안교과서를 낸 출판사에서 ‘이런 책’을 낼 수가 있냐고. 출판
사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하고.

좀 너무한다. 생각은 다르다고 해도 이런 배타성까지 보여 줄 필요까진 없는데. 그간
많이 지적돼 오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개방성이나 관용
과 같은 덕목과 '진보'라는 딱지 간에는 필연적 상관관계가 별로 없다는 것.



사실 그런 데서도 드러나듯이, 내셔널리즘에 입각한 국사가 강력하게 시민사회의 헤게
모니를 틀어쥐고 있는 것이 현실이죠. 그래서 국사 해체라는 게 과연 한국에서 가능
성 있는 프로젝트일 수 있겠냐는 회의론도 있는데요.

유럽의 경우를 보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지금 유럽에서는 더 이상 국사(National
history)를 주장하는 집단이 주류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건 정치상황과 좀 맞물려
있는 것도 있지요. EU(유럽 연합)라는 새로운 단일 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니
까요. 어떻게 보면 국사의 틀을 유럽으로 확장했다고도 볼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한계들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겠지요.

그렇지만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국사라는 게 200년간 권력에 봉사해 왔는데, 그 틀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겠어요. 이제 도전이 시작된 거죠. 그러나 그러한 역사학이 어떤 기
능을 해 왔는가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는 분명히 있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거기
에 대해서 끊임없이 비판적 시각을 갖고 대안을 모색할 일이 남은 것이죠. 적어도 그
런 바탕, 교두보는 확보가 된 것이니까요. 그러나 동아시아 차원에서는 현재 그런 교
두보조차도 확보되지 않은 게 문제지만, 앞으로 해결해 가야 할 문제입니다.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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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사학자

이름 : 임지현
평가 : '혜성같이' 등장한 문화비평가
약력 : 1959년 서울 출생
1982년 서강대 사학과 졸업
1984년 서강대 대학원 사학과 석사
1989년 서강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
1991년~현재 한양대 인문과학대 사학과 교수

작품 :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서양의 지적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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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애들 재우고 간만에 혼자 있네요. 이렇게 보니까, 평소에는 날개만 달면 박쥐다~하고 판다의 놀림을 받는 엄마도 나름대로 귀여운 얼굴하고 있네요~


엄마

아직 젖을 때지 못한 아기들이 한마리씩 매달리면 엄마는 이제 귀찮나봐요. 슬그머니 떼어내려고 밀치기도 합니다. 이렇게 엄마에게 깔려서도 행복하게 젖을 빠는 아가~


엄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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