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퇴근해서 중간고사 초안을 출제에 집중할 예정이었는데, 정신이 아득해지도록 예상 밖의 일을 벌이는 아이들 때문에, 결국 9시 지나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내가 애들 어리광을 너무 받아줘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 교사이면서 학생이기도 한 나의 자아 정체성 분열...집에 와서는 그냥 앉을 수 있나. 환기를 시키고, 드라이 클리닝 맡긴 거 찾으러 가고, 마트에 들러 생수와 과일을 사고, 닭갈비 해 먹느라 양념과 기름이 잔뜩 튄 가스렌지 주위를 싹싹 닦고. 닭이라는  게 그렇게 기름이 많은 고기류였군. 몰랐다. 후회막심.
그런데, 집에 들어오면서 습관적으로 켜놓은 TV에서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는 그리스 민속음악 풍의 음악이 들리는 게 아닌가. 어?했는데, 계속 부엌을 정리하며 귀를 기울여보니, 내가 아는 그 영화를 해주는 거 같았다. 바로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지중해]. 왠일이야,  mbc?

 

 

 

 

우리말 더빙으로 된 영화를 보니, 자막을 계속 지켜보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좋은 점이 있군. 성우들의 연기와 우리말 대사도 무척 감칠맛 났다. 왔다갔다 집안을 정리하면서 영화를 봤다. 순박한 사람들. 눈부시게 파랗고 투명한 지중해의 바다. 전쟁을 치르는 현역 군인들이지만, 마치 기분 좋은 휴가를 보내는 거 같은 사람들. [4월의 유혹]과 더불어 지중해로 나를 유혹하는 2대 영화. 영화 동아리에 가입하고 한창 영화를 많이 보던 대학교 시절, 그중에서도 마지막 여름 방학 때 지금은 없어졌을 인천 시내의 작은 극장까지 저 영화를 보러 가서는, 마지막에 눈물을 쏟았던 걸 기억한다. 왜 그 때는 그렇게 감정이입을 했을까. [도피하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 그래, 저 문장 때문이었지. 지금은 그 때처럼 도피하고 싶지는 않고 만족해하며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몇시간 전에 사춘기 남자애들을 붙잡고 [도피할 생각이니.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면 얼마나 좋니.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는 거 너도 알고 있지. 이 학교에 온 건 너희들의 선택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지라고 말했던 거 네가 아니냐. 앞으로 사회에 나가면 더 힘든 일 많을텐데]하고 어르고 달래던 내 모습. 동시에, 내가 학생 때 생각했던 것들, 꿈꾸던 것들, 불만으로 여겼던 부조리들과 모순들.  나는 그냥 체념하고 타협하는 법만 익혀온 것일까. 그러나, 구구절절 현재의 불만을 털어놓으며 다 내던지고 당장 어디로 도망갈 생각은 더 이상 없다. 노년이 되어 지중해의 섬으로 돌아온 소대장처럼, 나도 노년이 되어 그렇게 돌아갈 곳만 있다면 더 바랄 거 없는 인생이 될 거 같다.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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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4-16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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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저는 캡쳐 연습중^^


놀자 2005-04-16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봐야겠네요..^^

파란여우 2005-05-0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는 영화라면, 노년이 되기전에 한 번 봐야겠슴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