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 이성복 산문집
이성복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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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의 산문들을 읽고 있자니 "좋은 시인과 좋은 작가는 대부분 좋은 비평가이기도 하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의 글들은 그의 시와 마찬가지로 삶의 틈새에서 부대끼고 있는 상처들을 끌어내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시인 스스로 자신에게 엄격하게 들이대는 칼날을 피하고 있지 않다. 그 때문일까. 이 산문집은 읽는 이에게 서정적인 울림과 공감보다는 머리를 차갑게 만드는 성찰의 순간과 시간을 여러 번 가져다준다. 시인의 정의로서 삶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그 상처를 아파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내밀 수 있다면 이성복은 너무도 시인이다. 이는 그 자신이 밝히는 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찍부터 나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날카로운 못들이 뽑혀나간 뒤에도 깊숙이 패어 있는 그 못자국들을 삶 속에서 발견하고 확인하고 감식하는 일이었다. 발견하고 확인하고 감식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손가락을 쑤셔넣어 너덜거리는 생채기들을 잡아뜯고, 못이 빠져나간 구멍을 억지로 넓혀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무엇 하나 속 시원히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못자국을 때워붙일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상처가 거기 있고, 상처가 거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모두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127쪽.

이성복이 아주 적은 수의 시집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준 시적 진실 역시 '삶은 잘 알 수 없는 상처로 가득하지만, 그 상처들을 보듬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음을 상기하면, 위의 글은 시인이 가진 상처에 대한 관념이 퍽이나 오래 전부터 지속된 것임을 또한 알게 한다.

이러한 상처의 발견은 비탄과 절망으로 이어지지만, 시인은 그 속에서 누더기 삶을 긍정하는 밝은 눈빛을 찾아낸다.

(...) '파리들은 저 자신이 더럽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더러움은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 마음속에 있을 뿐이다. 입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토록 깨끗해야 하는 음식이 일단 입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면 더없이 더러운 것이 되지만, 음식 자체는 한 번도 더럽거나 깨끗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63쪽'

(...) '길가 과수밭에서 줄기가 휘어지도록 시뻘건 사과알들을 매달고 할딱거리는 키 작은 사과나무들을 보았다. 그 나무들은 여러 해 거듭된 출산에 몸매가 비틀리고 껍질이 갈라져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세 아이를 낳고 난 다음 아내의 배도 그랬었다. ―67쪽'

근래 삶과 문화에서 유행하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시선에는 이같은 긍정의 시선이 없다. 아름다움이 세련된 것, 비싼 것, 귀한 것 등을 지칭하는 일이 많아졌다.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 자체가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고 '왜곡'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그러한 시각만큼 더러운 것도 없다.

이 밖에도 이 산문집은 시집으로는 만날 수 없었던 시인 개인의 모습과 문학에 대한 생각 등을 담고 있다. 특히 오랫동안 시의 '휴면기'에 들어가 있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변명 아닌 고백들은 읽는 이를 착잡하게 한다(그것을 한 문장으로 드러낸 것이 제목이다).

끝으로, 시인이 삶을 사랑하는 운명에 대해 곡진하게 털어놓는 구절을 옮기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어느 것 하나 명확해지는 것 없이 그저 혼돈과 불안 속에 떨고 있더라도 그것이야말로 삶이고 사랑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한다.

(...) '그는 문제의 중점은 역시 인식이 아니라 사랑에 놓여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사랑, 그 때가 꼬질꼬질 낀 말이 한순간 차 안의 입김에 흐려진 창유리처럼 그의 시야를 가로막는다. 그 말 자체가 그러한 것처럼 사랑은 말끔하고 반들거리는 것이 아니라, 꼬지르레 때묻은 것을 대상으로 한다. 모든 인식이 확정적이고 결과론적인 것이라면, 사랑은 모든 것을 미결로, 집행유예로 남겨두는 것이다. 사랑의 눈과 귀는 기다림과 불안이다.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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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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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은 서문에 바르트가 밝힌 것처럼, 오늘날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음을 인식하고 긍정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쓴 것이다. 그것은 곧 현대의 삶에 있어 사랑의 쓸쓸함(이 책의 영향으로 씌어졌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랑의 역사>에서 크리스테바는 오늘날 사랑은 TV 드라마, 영화 등에서 너무도 하찮게 다뤄지고 있다고 지적한다)을 씁쓸히 바라본 자의 사랑에 대한 탐구이다.

이 책은 철저히 바르트적이다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담론을 분석해내며 그간 신비와 찬사, 또는 폄하와 무시 속에서 제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사랑’의 자리를 단단하게 잡아주는 한편, 바르트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사랑의 역사를 행간마다 끼워 넣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랑의 단상>은 마음을 넓게 펼치게 하는, 쉽게 잊을 수 없는 책으로 태어났다.

이 책은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괴테의 <베르테르의 슬픔>과 겹쳐 놓으며 사랑의 기쁨, 괴로움, 슬픔, 갈등, 이별 등을 단장이라는 형식을 통해 다룬다. 그 과정에서 바르트는 사랑의 열정을 숨가쁘게 묘사하는가 하면 갈등의 다양한 모습을 지극히 섬세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대신 어느 한 순간에도 사랑의 ‘자리’를 벗어나는 일은 없다. 그를 통해 바르트는 사랑은 마음의 역사일 뿐이다라고 고백한다.

방황 errance. 비록 모든 사랑이 유일한 것으로 체험되며, 또 사랑하는 사람이 먼 훗날 다른 곳에서 사랑을 반복하리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할지라도, 그는 때로 마음속에서 사랑의 욕망이 확산되어감을 보며 놀란다. 그러면 그는 자신이 이 사랑에서 저 사랑으로 죽을 때까지 방황하도록 선고받았음을 알게 된다. ―“유령의 배”, 134쪽.

위에 든 구절처럼 삶이란 사랑을 끊임없이 만나고 갈등하고 헤어지고 방황한다. 하지만 이것은 생의 모든 순간을 통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계기, 어떤 사람이 그러한 순간을 가능케 한다. 유령의 배라고 부른 바르트의 익살을 한눈 감고 보자면, 이러한 방황의 뿌리는 욕망에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욕망은 사랑의 뿌리이며 삶의 뿌리이다. 살아가게 하는 것도 고통받게 하는 것도 욕망이다. 다만, 욕망은 사랑을 통해, 슬픔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욕망의 뿌리를 아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커다란 지표를 설정해준다. 그것이 바르트에게는 문학과의 연애, 사랑과의 문학이었나 보다.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지 않으며,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결코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게 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그 어떤 것도 보상하거나 승화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당신이 없는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곧 글쓰기의 시작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 133쪽.

내 언어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나, 내 육체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내가 내 언어로 감추는 것을 육체는 말해버린다. ―“검은 안경”, 67쪽.

이 책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러한 바르트의 고백들에 있다. 글쓰기가 가진, 의미를 향한 끊임없는 구애와 좌절 말이다. 그것을 <베르테르의 슬픔>에 슬며시 끼워 넣는 것은 아마도 글쓰기가 가진 한계를 비유하고자 한 것일 게다.

1991년 이 책이 번역돼 나왔을 때 몇 번을 읽은 후 읽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3년 전쯤 읽었고, 이번에 다시 읽었다. 이번에 읽을 때는 읽기가 쉽지 않았다. 베르테르의 사랑이 버겁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렇게 하고자 해도 되지 않는 상황이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렸지만, 읽는 동안 행복한 기억들을 불러내고 미소를 여러 번 지을 수 있었다. 나는 내 욕망의 뿌리를 안다. 그 뿌리 때문에 살아간다. 그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마음 cœur. 이 단어는 모든 종류의 움직임이나 욕망에 관계된다. 그러나 무시되든 거부되든간에 한결같은 것은 마음이 선물의 대상으로 성립된다는 점이다. ―“마음”, 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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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과 과학기술
김명진 엮고지음 / 잉걸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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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과학은 산업과 같은 자리에 놓일 때가 많다. 자연의 법칙을 밝히는 과학과 자연을 가공하는 산업이 결합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산업혁명 초기에 증기기관의 도래가 이룩한 것은 단순히 교통의 발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를 지배해온 시간과 거리라는 개념을 흔들어버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때 근대인들은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움직이는 일이 불과 몇 시간으로 줄어드는 희안한 체험에 혀를 내둘렀을 터이다. 그것도 말이 아닌 쇳덩이로(!)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증기가 가진 힘의 원리를 연구한 과학과 그것을 쇠통에 담아 피스톤으로 연결시킨 산업의 결합이었다.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기술에 대해 상세한 해설과 다양한 용례를 통해 과학기술이 가진 일상적인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어느 쪽이냐면, 과학기술의 순수한 영역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릇된 취급을 받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는 논쟁적인 책이다. 특히 제목에서 시사하고 있듯이 대중(성)과 과학기술이 어떻게 만나고 헤어지는지 살피는 한편 미래의 과학기술이 어떻게 자리매김돼야 하는지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책의 앞부분에 실린 글들은 과학기술에 대한 정의와 대중의 이해에 대한 논의들로서 과학기술이 전문가 집단인 과학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이어지는 2부는 과학기술 논쟁에 대한 것으로서 정치적·도덕적으로 과학기술을 검증하고자 했던 여러 논쟁의 역사가 소개되고 있다.

3부는 영화와 대중문화 속에 그려지는 과학기술과 과학자의 이미지에 대한 분석이 담겼는데,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 왜곡되어온 과학의 그림자를 만날 수 있다. 4부와 5부에서는 과학기술의 논쟁적인 부분들, 즉 현대의학이 인간 복지를 '진정으로' 향상시켰는지 등등이 다뤄진 후 앞으로의 과학기술, 그리고 과학기술의 민주화에 대한 전망이 조심스레 꺼내어지고 있다.

과학기술을 통해 삶은 좀더 자유로워지고 윤택해진다. 대중이 과학기술에 대해 무지한 것도 알고 보면 그 '자유'와 '풍요'에만 관심이 있을 뿐, 정치적인 함의 같은 올바른 이해에는 게으른 편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산업에 대한 이해 부족 역시 대중이 과학을 등한시하는 이유가 된다. 안전과 환경, 권력과 효용 등을 따지는 것 못지않게 기본적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사회적 공감대 마련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쉽사리 핵의 유해성을 논하지만 자신이 사는 나라의 발전량 70퍼센트가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지는 모른다. 그런 식이다.

이 책의 뒷부분에 실린 과학기술의 민주화에 대한 다양한 제언은 그러므로 다소 시기 상조가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물론 과학기술의 다양한 의미를 이야기할 만한 공간 마련이 시급하다고 보면 이러한 '시기 상조'는 많아져야 하겠지만 말이다.

증기기차가 처음 운행하던 무렵, 들판에 있던 많은 농부들이 쉭쉭거리며 움직이는 쇳덩이를 바라보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그들에게 그것은 그저 '쇳덩이'였을 것이다. 나 역시 과학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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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철의 20세기 건축산책 탐사와 산책 20
김석철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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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를 '아티스트'로 분류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건축의 규모(빌딩, 아파트, 플랜트...) 때문이기도 하고, 건축이 여타 예술처럼 순수하게 독창적인(개인적인) 세계를 그려낼 수만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축이 설계 외적인 부분에서 한정된 예산과 시간을 통해 소기의 성과를 거둬야 하는 경제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환경 파괴의 주범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건물은 형태나 구조의 아름다움보다는 그 쓰임새에 먼저 충실한 편이다. 지금은 그 빛이 바랬지만, 한때 한국 최고 높이를 자랑했던 31빌딩만 해도 검은색 외관에 사각형의 단조로움밖에 없어 그 높이 외에 뭐 내세울 만한 게 없었겠다 싶다. 어디 31빌딩뿐이겠는가.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건물은 다소 차이가 있을 뿐, 녹지도 변변히 없는 대지 위에 사각형으로 덩그러니 서 있는 경우가 많다.

<김석철의 20세기 건축산책>은 그러한 건축의 운명, 건축가의 숙명을 거스르고자 했던 12인의 삶을 그들의 작품(!)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현대건축의 시원(始原)에 이름을 새긴 오토 바그너, '성 가족 교회'라는 불세출의 걸작을 남긴 안토니오 가우디, '깊은 이성의 힘'을 담았던 르 코르뷔지에 등의 생애와 작품을 읽어가노라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탄성이 나오게 된다. 이들은 건축의 쓰임새뿐만 아니라 미적인 완성까지 추구했던 진정한 예술가다, 하는 깨달음 때문이다.

숭례문이나 불국사 등 역사가 깊은 건축물들을 국보다 보물이다 하며 문화유산으로 추켜세우듯이 언젠가는 20세기의 건축물도 '고전'으로 추앙받을 날이 올 것이다. 그때 한국의 건축물 중 어떤 것이 그런 대접을 받게 될까. 건축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아마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헤아릴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아름다운 건축물, 인간을 중시하는 공간, 자연과 합일된 인공물 속에 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며, 우리가 얼마나 단조롭고 거칠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 책에는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건축물들이 꽤 들어 있다. 그것은 마치 건축물이 아닌 것만 같다. 예를 들어, 르 코르뷔지에의 '롱샹 교회'는 설명하기 힘든 유연성으로 대기와 대지 사이를 가르고/잇고 있다. 시적인 충만함이 들어올린 지붕 끝이 둥글게 하늘을 향할 때 이 내부에 가득한 것이 은은한 평화의 시간이라는 상상을 하게 한다.

그리고... 그 외에도 책에 실린 많은 건축물들이 사람과 공간, 내부와 외부, 하늘과 땅 등등을 생각게 한다. 그러한 생각을 가능케 하는 것은 대부분 작품들 자체의 힘이지만, 건축가 김석철의 글 또한 유려하게 펼쳐지며 읽는 이를 자꾸 책 속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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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의 의미 동문선 현대신서 16
존 버거 지음, 박범수 옮김 / 동문선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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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글은 미술, 문학, 인문학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대한 섬세한 직관과 깊이 있는 해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선 주목을 요한다. 그의 사상의 기반은 기실 삶에 대한 존중이나 거부를 미룬 자리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거기엔 글쓰기가 가진 권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과 작품 그 자체에 몰두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다는 것의 의미>는 사진과 그림을 매개로 '보는 것'을 말하고 있는 책이다. 미술이나 사진의 차원에서 논의를 하지 않고 '보는 것'의 차원에서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장르적 특성에 얽매이거나 하지 않고 다양한 관점과 의미들이 풍부히 다뤄지고 있다.

이 책의 1부인 '왜 동물들을 구경하는가?'는 한 편의 글(1부 제목과 같은)만으로 이뤄져 있는데, 책의 서두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의 핵심인 '보는 것'이 띠고 있는 다양한 의미의 시원(始原)을 암시하고 있다. 동물원에서 동물을 구경하게 된 역사적 배경, 의미 등을 짚으면서 그는 '보는 것'이 '격리' '거리두기' 등의 의미를 내포한다는 점을 밝혀내고 있다(덧붙여 그는 강제적으로 주류 밖으로 밀려나간 '빈민가' '판자촌' '정신병원' 들의 장소도 동물원과 닮았다고 말한다. 마치 푸코의 시각을 연상시키는 부분인데, 푸코가 인간의 이성이 가진 횡포에 대한 고고학적 탐색과 야유를 보여주었다면, 존 버거는 철저히 '보는 것'의 대상으로서 동물을 한정하고 있다).

2부에서는 '체험된 순간'을 기록하는 것으로 카메라의 의미를 파악하는 한편, 시골 농부들의 정장 차림에 숨어 있는 사회적·기호적 의미를 드러내는가 하면, 전쟁 사진을 거부하는 일반인의 태도를 문제삼는 등 흥미로운 글쓰기를 이어간다. 책의 본령인 3부에서는 쿠르베, 터너, 마그리트, 로댕 등의 작품세계를 살피면서 각 화가의 개성적인 면모를 다양한 주제로 변주하며 설득력 있게 해석해내고 있다.

책의 마지막 장에 은유적으로 담겨 있는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해야 할 듯하다.

들판의 존재는 그 사건들이 결과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건들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방식에 대한 전제 조건인 것이다. 모든 사건들은, 그것들이 다른 사건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관계 덕분에 정의될 수 있는 사건들로 존재한다. -284∼85쪽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존 버거가 '보는 이'와 대상과의 교감을 말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곧 다른 생각을 만나게 되었다. 의미는 '거기' '그대로' 있을 뿐이다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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