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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의 단상>은 서문에 바르트가 밝힌 것처럼, 오늘날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음을 인식하고 긍정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쓴 것이다. 그것은 곧 현대의 삶에 있어 사랑의 쓸쓸함(이 책의 영향으로 씌어졌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랑의 역사>에서 크리스테바는 오늘날 사랑은 TV 드라마, 영화 등에서 너무도 하찮게 다뤄지고 있다고 지적한다)을 씁쓸히 바라본 자의 사랑에 대한 탐구이다.
이 책은 철저히 바르트적이다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담론을 분석해내며 그간 신비와 찬사, 또는 폄하와 무시 속에서 제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사랑’의 자리를 단단하게 잡아주는 한편, 바르트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사랑의 역사를 행간마다 끼워 넣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랑의 단상>은 마음을 넓게 펼치게 하는, 쉽게 잊을 수 없는 책으로 태어났다.
이 책은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괴테의 <베르테르의 슬픔>과 겹쳐 놓으며 사랑의 기쁨, 괴로움, 슬픔, 갈등, 이별 등을 단장이라는 형식을 통해 다룬다. 그 과정에서 바르트는 사랑의 열정을 숨가쁘게 묘사하는가 하면 갈등의 다양한 모습을 지극히 섬세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대신 어느 한 순간에도 사랑의 ‘자리’를 벗어나는 일은 없다. 그를 통해 바르트는 사랑은 마음의 역사일 뿐이다라고 고백한다.
방황 errance. 비록 모든 사랑이 유일한 것으로 체험되며, 또 사랑하는 사람이 먼 훗날 다른 곳에서 사랑을 반복하리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할지라도, 그는 때로 마음속에서 사랑의 욕망이 확산되어감을 보며 놀란다. 그러면 그는 자신이 이 사랑에서 저 사랑으로 죽을 때까지 방황하도록 선고받았음을 알게 된다. ―“유령의 배”, 134쪽.
위에 든 구절처럼 삶이란 사랑을 끊임없이 만나고 갈등하고 헤어지고 방황한다. 하지만 이것은 생의 모든 순간을 통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계기, 어떤 사람이 그러한 순간을 가능케 한다. 유령의 배라고 부른 바르트의 익살을 한눈 감고 보자면, 이러한 방황의 뿌리는 욕망에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욕망은 사랑의 뿌리이며 삶의 뿌리이다. 살아가게 하는 것도 고통받게 하는 것도 욕망이다. 다만, 욕망은 사랑을 통해, 슬픔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욕망의 뿌리를 아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커다란 지표를 설정해준다. 그것이 바르트에게는 문학과의 연애, 사랑과의 문학이었나 보다.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지 않으며,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결코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게 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그 어떤 것도 보상하거나 승화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당신이 없는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곧 글쓰기의 시작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 133쪽.
내 언어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나, 내 육체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내가 내 언어로 감추는 것을 육체는 말해버린다. ―“검은 안경”, 67쪽.
이 책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러한 바르트의 고백들에 있다. 글쓰기가 가진, 의미를 향한 끊임없는 구애와 좌절 말이다. 그것을 <베르테르의 슬픔>에 슬며시 끼워 넣는 것은 아마도 글쓰기가 가진 한계를 비유하고자 한 것일 게다.
1991년 이 책이 번역돼 나왔을 때 몇 번을 읽은 후 읽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3년 전쯤 읽었고, 이번에 다시 읽었다. 이번에 읽을 때는 읽기가 쉽지 않았다. 베르테르의 사랑이 버겁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렇게 하고자 해도 되지 않는 상황이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렸지만, 읽는 동안 행복한 기억들을 불러내고 미소를 여러 번 지을 수 있었다. 나는 내 욕망의 뿌리를 안다. 그 뿌리 때문에 살아간다. 그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마음 cœur. 이 단어는 모든 종류의 움직임이나 욕망에 관계된다. 그러나 무시되든 거부되든간에 한결같은 것은 마음이 선물의 대상으로 성립된다는 점이다. ―“마음”, 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