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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작가가 낸 책의 제목을 쭉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책을 내던 무렵 작가가 심혈을 기울였던 주제나 소재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다소간 무의식적으로 생겨난 것이어서 뜻하지 않게 작가의 창작의 동력이랄까 배경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김영하의 첫 소설집은 <호출>이었다. <호출>에는 그의 데뷔 단편인 <거울에 대한 명상>, 그리고 빼어난 단편들인 <도마뱀>, <도드리>, <나는 아름답다> 등이 실려 있지만, 제목은 ‘호출’이었다. 신인 작가인 만큼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호출’이란 제목이 적절했을 것이다. 첫 소설집에 앞서 나왔던 짧은 장편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소설의 내용도 살인청부업자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인물을 다루고 있는 데다 제목까지 퇴폐적인 인상을 주며 그가 대중성을 겸비한 작가라는 사실을 알려줬었다.
세 번째 작품이자 두 번째 소설집은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이다. 역시 좋은 단편들인 <사진관 살인 사건>, <비상구>, <당신의 나무> 등이 실려 있지만, 제목은 ‘엘리베이터에 낀...>이었다. 여전히 소설 속 인물들은 도발적이되 보다 깊이 있는 소설적 해법이 담겨 있던 소설집다운 제목이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작품은 장편소설들로서 <아랑은 왜>와 <검은 꽃>이다. 이 제목들은 이제 한 작가로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김영하가 도전했던 ‘먼 역사’와 ‘가까운 역사’를 가리키는 제목들로서 각각 두 권의 장편이 가진 주제를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 여섯 번째 작품이자 세 번째 소설집인 <오빠가 돌아왔다>가 있다.
<오빠가 돌아왔다>에 실린 단편들은,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남자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남자의 세계란 구체적으로, 남자가 일하는 직장,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 남자가 부대끼는 가족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남자가 생각하는 진실, 남자가 꿈꾸는 이상 같은 갖고 싶은 것들도 있지만, 남자가 피우는 바람, 남자가 벌어들이는 검은 돈 같은 버려야 더 좋은 것들도 있다. 어쨌든 이 소설집은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표제작인 단편 <오빠가 돌아왔다>는 변두리의 별볼일 없는 집안의 ‘오빠’가 어느새 성장해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별거를 해소하는 역할을 하는 이야기인데, 여동생을 화자로 설정, ‘남자의 성장’을 깔끔하게 스케치했으며, 다소 긴 단편인 <보물선>은 대학 동창이었던 형식과 재만의 이야기로서 사회 부적응자인 형식과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는 재만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남자의 사회’를 드러내고 있다.
이밖에도 ‘너의 의미’는 충무로에서 연출부입네 행세하며 입봉을 준비하는 바람둥이와 막 데뷔한 여자 소설가의 이야기를 통해 ‘남자의 사랑’을 다루고 있고, ‘이사’는 이제 막 자신의 집을 장만해 떠나는 30대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의 ‘남자의 재산’과 그에 따르는 노력을 그려 보인다.
이처럼 이번 <오빠가 돌아왔다>를 읽으면서 두드러진 느낌은 ‘지금-여기’, 한 남자가 살아가는 방식들을 통해 이 시대의 남성의 모습과 남성의 모럴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 ‘오빠’들의 모습은 대부분 불안정하고 심지어는 불경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남자의 세계’이다. 흔히 남자의 세계 하면 의리와 명예, 용기와 뚝심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김영하가 그려놓은 남자의 세계는 과거처럼 ‘의리’와 ‘명예’ 속에 있기보다는 ‘배반’과 ‘탐욕’ 속에 있다는 점이 다르게 느껴진다.
어느 쪽이냐면, 김영하가 그리고 있는 ‘지금-여기’의 삶은 우리가 따라야 할 어떤 모럴도 없는, 냉랭한 약육강식의 사회일 뿐이다. 그것을 보는 작가의 눈은 때로 유희의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상당 부분 냉철한 냉소주의에 기울어져 있다. 이 같은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물론 현실을 직시한 데 따른 작가적 책임이겠지만, 나는 김영하가 예전에 쓴 단편들에서 읽었던 현실과 그 너머를 함께 감당하는 고통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엘리베이터에 낀’ 고통, 조금 부풀려 말하자면 저 프로메테우스의 고통 같은 것이기도 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