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피지배 민족을 동화시키기 위해서는 지배언어를 단지 교과 과목으로 설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모든 과목의 수업을 지배언어를 사용해서 진행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유효한 정책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렇다면 총독부는 이미 한일병합과 동시에 조선어를 공공생활에서 몰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조선인의 민족성 그 자체를 개조하려는 목적을 염두에 두고 언어 정책을 실시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시나 고이치는 급진적인 언어 정책이 가져오는 부작용을 충분히 고려한 상태에서 언어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보았다. 독일의 언어 동화정책이 실패한 원인을 급진적인 동화정책의 추진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조선총독부의 언어 정책에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총독부가 일본인 교사들에게 '언어가 통하지 않아 목적달성에 지장이 없도록 조선어를 습득하라' 고 권한 것이나 총독부 관리들에게 조선어 장려책을 쓴 것 등은 이러한 언어 정책의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다.-300쪽
따라서 그는 민족어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식민지 지배체제를 조금이라도 미동시키지 않을 강력한 권력 언어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이는 총독부의 언어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는데, 조선총독부는 일차적으로 사회 공식언어를 조선어에서 일본어로 완전히 대체시키는 것을 언어 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삼는다. 국가 기관이나 학교에서 조선어를 금지시킨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어 교육을 강화시킨다. 권력의 언어가 일본어라면 식민지인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어를 배우려 할 것이고, 그렇다면 식민지인들이 일본어를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일본어는 조선에서 강력한 권력 언어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301쪽
조선어사전편찬회의 결성은 제대로 된 조선어사전을 갖고자 하는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지만, 근대적 의사소통 체계를 확립하려는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갑오개혁을 전후한 시기부터 제기된 민족의 숙원 사업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식민지 지식인들은 이 사업의 완성이 낙오된 조선 민족의 문화를 다시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일본어 상용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면서 교육 현장은 점점 일본어 일색이 되어가고, 학교 교육을 받은 조선인들이 빠른 속도로 일본어 문화에 적응해가는 현실에서, 또 한번의 실패는 조선어의 몰락을 가속화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어편찬사전회가 전 민족적인 격려 속에 출범할 수 있었던 것은 민족 구성원의 문화적 위기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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