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annerist > MX를 쓰는 이유.

lens_SMC 50mm 1.4
film_ILLFORD XP2

필카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던 때가 작년 말이었을게다. 내게 필요한 필카가 무엇일까? 답은 간단했다. 완전 기계식 수동기종. 이왕 필카를 쓰기로 작정한 거, 가장 극단적인 기종을 쓰자. 전기의 힘을 한짜가리도 빌리지 않는. 의외로 그런 기종은 많지 않았다. 그 유명한 라이카의 M6, 사진 찍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권하는 기종인 니콘의 FM2, 그리고 지금 내가 쓰고 있는 펜탁스의 MX 정도였다. 백만원을 가뿐히 뛰어넘는 M6는 꿈도 꾸지 않았다. 하도 많이 봐 왔던 FM2. 모터 드라이브를 장착하면 못도 박을 수 있는 정도의 단단함이 끌리긴 했지만 한국에서만 형성된 거품 가격, 그리고 가끔 뵈는 지나친 샤프함과 대비감이 부담스럽기도 했고(사실 이건 내가 무채색 표현에 강한 올림푸스 디카를 먼저 썼기 때문일게다). 그래서 결정한 게 MX.

SLR카메라 치고 작은 편이라 잡을 때 새끼 손가락이 허전하기까지 한 이녀석은 노출계를 제외하면 매커니즘 상으로 아예 건전지를 쓰지 않는다. 톱니바퀴와 스프링, 그리고 내 손가락의 힘으로 이녀석은 돌아간다. 노출계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초점이고 노출이고, 사진 찍을 때 제반 사항을 결정하는 건 다 내 몫이다. 당연히, 알아서 초점과 노출을 맞춰 주는 전자동 카메라에 비해 들이는 신경의 굵기와 집중력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순간 포착이 느릴 수 밖에 없긴 하지만 대신 느린 호흡으로 잡아내는 사진에 있어서 초점과 노출은 물론이고 명암과 대비, 구도와 표현  하나부터 열까지 생각하고 셔터를 누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찍는 과정이 더욱 즐겁기도 하고, 건지는 사진의 확률도 높은 편이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내가 결정하고 셔텨를 눌러야 한다는 것.

그렇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머릿속에서 화면을 재고 찍어도 담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그 반대로 전혀 의도하지 않은 장면이 생각치도 않은 공간에 담겨 기막힌 사진이 나올 때도 있다.

하이드 파크였던가 켄싱튼 가든이었던가. 런던의 어느 공원에서 저 의자에 누워 낮잠을 청하는 저 할아버지를 만난게. 난 황급히 등에 맨 카메라를 손에 잡고 노출계를 켠 다음 조리개를 대강 조였다. 빨리 잡아내야 할 땐 조리개 조이는 게 초점을 맞추는 것 보다 우선이다. 조리개 수치가 높으면 초점이 덜 맞더라도 포커스가 대강 맞는다. 내가 목표로 한 건, 저 할아버지가 깨기 전, 그의 편안한 모습을 온전히 담는 것이다. 노출 적정을 알리는 초록불을 보고 조리개 조절을 마친 후 대강 초점을 맞춰 셔터를 눌렀다. 그 사이 몇 초가 흘렀는지 모르겠다. 다만 숨 한번 쉬지 않았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다.

이 사진은 내가 런던에서 찍은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 중 하나이다. 원래 목표로 했던 할아버지의 편안한 모습을 온전히 담아낸 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데, 덤으로 의자 저편에 길이 나 있어 썰렁하지 않게 적당한 비율로 공간을 나눠준다. 그리고 저 편에 돌아선 남자의 뒷모습까지. 자연스럽게 의자 두 개와 그 남자가 작은 삼각형을 이루고 그 곁을 하나의 선이 스치고 지나간다. 의도하지 않게 볼만한 구도의 사진이 건져졌다. 생각치도 않을 때 목표 이상의 장면이 담겨진 이런 우연은 흔치 않고, 그만큼 나는 즐겁다. 그만큼 내 MX가 사랑스러워지고.

물론 저 사진은 MX가 아니라도, 다른 카메라가 내 손에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잡아낼 수 있었을거다. 디카라면 훨씬 더 수월하게 잡아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고. 여유있게 구도까지 잰 다음에 말이지. 그렇지만 MX가 없었다면 저 사진을 건질 수도 없었을거라 생각한다.

노출과 초점을 모두 내가 결정해야 하는 카메라로는 재미있는 장면을 순간적으로 잡아내기가 참 힘들다. 숙달되지 않은 사람이 저런 요소를 조정해서 사진 찍는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그런 이유로, 브레송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지금의 디카 세대는 수동카메라를 썼던 사람들만큼은 알기 힘들거다). 이걸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저 조작속도를 극도로 빠르게 익히던지, 아니면 동적인 사진을 포기하고 정적인 사진만 잡던지. 두 가지를 모두 향상시키던지. 두말할 것도 없이 마지막이 가장 훌륭한 선택이겠지만, 어느 길을 택하든 중요한 건,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걸을 때는, 런 '순간'을 잡아내기 위해 몇 배나 주위 사물을 볼 때 신경에 날을 세우는 데 있다. 주의깊게 이런저런 모습을 관찰하다 재빨리 잡아내야 조금이라도 카메라 조작에 걸리는 시간을 메울 수 있으니까. 그 기계적 제한을 멋지게 극복할 수 있으니까. 다시 말해, 내가 MX가 아닌 올림푸스의 디카를 들고 있었다면 MX를 들고 다닐 때 만큼 주위 사물을 유심히 보지 않았을게고, 저 멀리 누워서 낮잠을 청하던 할아버지를 발견하지도 못했을게다.

디카가 대중화되면서 '기록'의 즐거움을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리게 된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기계가 편리해지다보면 몸이 둔해지는 법. 그 디카가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완전 기계식 필카와 사람 사이에는 있다. 난 그 간격을 즐겁게 헤집고 다닐 것이다. 흑백 필름을 채워 넣은 MX를 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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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4-08-19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사진 멋진 카메라 멋진 매너리스트님:)

mannerist 2004-08-19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르세요! 지르세요! 지금 제가 쓰는 pentax MX, 50mm 1.4렌즈와 합쳐 17만원에 샀답니다.^^

▶◀소굼 2004-08-19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커뮤니티 장터가서 아이쇼핑만 하고 있지요;

mannerist 2004-08-19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제가 지르기 딱 일주일 전에 하던 일이군요. =)

▶◀소굼 2004-08-19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돈도 없어요~'ㅡ' 절대 못지르는 상황;

mannerist 2004-08-20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