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의 고통을 위계화한다. 깨닫기 전까지는 내가 그러고 있는 줄도 몰랐다. 어떤 고통은 명예의 전당에 모셔두고 끊임없이 들여다보며 되새기고, 어떤 고통은 느낄 가치도 없는 것이라 폄하하고 눌러 죽인다.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란 말은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내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자신할 수 있을까. '저게 뭐가 아프다고, 쯧'하며 무시한 적이 분명 있었고, 무시한 다음엔 곧장 잊었다.
위계상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내 고통을 소환해 타인의 고통과 비교한 적도 분명 있었다. '나 때는'으로 시작해서 '그러니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로 끝나는 그런 류의 말들이 더 싫은 까닭은 내 안에도 그런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피곤하고 귀찮으니까 그냥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가 하는 말을 듣기보다 내 입장에서 내 얘기만 하고 싶은 마음이 내게도 있다. 그래서 그게 불쑥 드는 충동이란 걸, 생길 땐 노력이 필요 없지만 억제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단 걸 잘 알고 있다. 그 충동을 경계하지 않고 다스리지 않는 건 게으르고 무책임한 일이다. 성숙한 사람은 생각하고 직시한 뒤 반성하고 고친다. 모자란 사람이 모자란 줄 모르고 가르치려 든다(여기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않다).
그래, 이 책 읽으면서 뭔가 좀 싸했어.
저자는 루소를 "자기 미화에 중독된 사람(111)"으로 보고, "외부인의 시선에서는 아무것도 배우려 들지 않는 특정한 성향이 그의 시선을 체계적으로 왜곡(110)"시켰다고 본다. 고독이 그런 위험을 가중한다고 보고, 근거로 애덤 스미스의 '공평한 관객' 이론을 가져온다.
스미스는 고독하게 성장한 사람은 결코 자신을 알지 못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고독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을 오판하고, 자신이 행한 선행과 자신이 입은 피해를 과대평가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타인의 시선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도덕적 시선은 역시 자신의 시선이다. 스미스에게 도덕성은 상상의 힘에, 즉 자신이 외부에서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개념에 기반한다. 우리는 이 기반에서 자신의 행동을 '공평한 관객'의 관점으로 평가한다.
'공평한 관객'은 큰 그림에서 볼 때 우리는 사소한 존재며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공평한 관객의 관점은 우리의 이해관계도 타당하지만 남들의 이해관계 역시 타당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관점은 우리가 남들의 이해에도 부응하려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111)
이 부분은 이 책의 요점이 아니다. 유독 내 관심이 이 책의 3장(나에게 하는 거짓말)에 쏠려 있을 뿐이다. 나는 타고난 체력이 좋지 않아서 불필요한 일에 에너지를 빼앗기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거짓말은 불필요할 뿐더러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되도록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려고 노력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정직한 것이 인품이 좋아서만은 아니다. 정직하게 사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진실한 사람에 비해 기억할 것이 두 배다. 실제가 어땠는지도 기억해야 하고, 자신이 어떻게 말했는지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복잡하지 않은 삶을 선호한다. 이런 점에서 정직은 내게 도덕성 문제인 만큼이나 편의의 문제다. (14)" 딱 내 마음 같아서 속이 다 시원하다. (좀 다른 이야기인데, 선의의 거짓말도 피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저자는 상대에게서 칭찬할 점이 도저히 보이지 않으면 차라리 침묵하라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 시점에 라르스 스벤젠이 정말로 좋아졌다.) 즉, 남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건 내 안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문제다.
그런데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건 좀 다른 문제다. 나는 왜 스스로를 들여다보기를 이렇게 무서워할까. 외부의 자극이 가해졌을 때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으며 어떤 상태인지 왜 잘 파악하지 못할까. 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걸 이렇게 힘들어할까. 내가 정확히 무엇인 줄도 모르면서 왜 더 나은 사람으로 가장하고 싶어할까. 이런 질문들은 해결되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해결하는 것 역시 이 책의 역할은 아니다.
타인에게 솔직하기가 자신에게 솔직하기보다 더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 남들에게 진실할 수 있을까? 내가 남들에게 진실해야 그들도 나를 믿을 수 있듯, 내가 나를 진실하게 대해야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다면 남들도 나를 믿을 수 없다. (113)
그래, 내가 뼈 맞을 줄 알았다. 이 책이 내게 주는 건 경계심과 방향성이다.
우리 인간은 너나없이 자기 이야기를 만드는 데 능하고, 인간 소통에서 서사 창출은 불가피하다.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삶에 대한 개념을 갖는 것이다. 이 개념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 형태를 취한다.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 경험들을 의미 있는 에피소드들로 정리하고, 그것들을 연결시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을 이해한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즉 사람들의 배경을 그들이 선택하는 행동, 그들의 미래 계획,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 무엇보다 그들이 남들과 맺은 관계들에 연결함으로써 사람들을, 즉 다른 이야기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곧 자신이 되는 일이다. (115-116)
우리는 정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결되지 않은 나의 질문들을 이렇게도 바꿔볼 수 있다. 나는 왜 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데 거듭 실패하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내가 고통을 취사 선택했기 때문은 아닐까. 가치 없다고 치부하고 묻어버린 것들이 꼭 필요한 조각들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 어떤 고통은 그만 돌아보고 보내줘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하지만 이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도, 이 책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거짓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현실 접근을 차단하는 일이다. 착한 거짓말, 못된 거짓말 모두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거짓말은 상대의 자유를 박탈한다. 거짓말은 아무리 선의에서 비롯된다 해도 상대가 주변이나 자신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통찰을 막는다. 반면 진실은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진실은 그가 인생에서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할지 보여 줄 수 있다. 때로 진실은 우리에게 고통스럽거나 심지어 파괴적인 결과를 부른다. 그래도 상대가 진실을 감당하기 역부족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오만이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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