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오디오 매거진 1월호 중 <한 장면의 인생>에서 희진 쌤은 영화 <머니볼>을 이야기했다. 영화에서 희진 쌤이 꼽은 부분은 선수들이 라커룸에서 대화하는 장면이다. "너는 인생에서 뭐가 제일 무섭냐?"고 동료 선수가 묻자 "공이 나한테 올 때"라고 답하는 장면이다. 자신에게 공이 오는 게 가장 두렵다고 말한 선수는 1루수이다. 1루수에게는 공이 많이 온다. 그리고 1루수는 공을 가장 잘 처리해야 하는 포지션이다. 직업 야구선수로 생계를 부양하려면 두려워도 공을 피할 수 없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고, 일상이 공포가 되는 것이라고 희진 쌤은 해석했다. 크리스 프랫이 맡은 1루수 역에 동일시되어 우셨다고 한다. 내겐 그런 일이 통역이었다.



나는 통역이 매번 두려웠다. 행사나 회의 하루 전날에는 제대로 잠을 못 잤고 당일에는 밥을 못 먹을 정도로 긴장했다. 내내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연사가 제발 그만 말했으면, 아니 계속 말했으면, 제발 회의가 빨리 끝났으면, 아니 끝나지 말았으면. 매번 발끝으로 서서 곡예를 하는 느낌이었다. 일을 마치면 안도감과 탈력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잠깐이고, 자책은 오래갔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잘못한 것들만 떠올랐다. 매일 양언어로 뉴스와 연설문, 온갖 자료를 듣고, 보고, 읽으면서도, 더 독하게 공부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나는 왜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이상한 열패감에 시달렸다. 그렇게 6년을 버텼고 재작년 하반기부터 통역을 그만두었다.


슬픔과 두려움은 서로 다르지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오, 윌리엄!>에서 루시가 묘사한 슬픔은 내가 느꼈던 두려움과 유사하다. '슬픔'의 자리에 '두려움'을 넣어서 읽으면 이렇게 된다. "두려움이란 정말로--오, 그건 정말로 고독한 일이다. 그것이 두려움이 무서운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려움은 당신이 유리로 된 아주 높은 건물의 긴 외벽을 미끄러져 내려오는데 당신을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과 같다." 나의 경우는 유리로 된 아주 높은 건물의 긴 외벽을 미끄러져 내려오는데 나를 보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좋았던 순간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국제기구의 수장이나 고위 관료 등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말을 전달할 수 있었던 건 그 자체로 귀한 경험이었다. 국제협력의 현장을 일선에서 목격할 수 있었고, 정책이 수립되고 이행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 속에 들어왔다 나간 것처럼 하고 싶었던 말을 영어로 다 전달해줘서 너무 고맙다'는 인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면에 기대어 일을 계속했던 건 아니었다.


나를 추동한 건 두려움이었다. 통역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실질적인 외부 상황으로 인한 것이라면, 통역을 그만두지 못하게 한 두려움은 추상적인 가능성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건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한정적인 시간을 어디에 써서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와 직결되어 있는 문제였다. 나는 두렵고 어려운 일, 가장 피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고, 그 압박감을 견뎌내야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만두는 건 도망치는 것이고, 지는 것이고, 나약한 것이라 생각했다. 매번 자기극복을 해야 할 필요는 없는데, 너무 힘들면 그냥 그만둬도 되는데. 두 두려움을 저울에 올리고 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쪽을 피했다. 통역을 할 때의 어려움보다 쓸모없는 인간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더 두려웠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는 번역만 하고 있다. 통역을 할 때는 내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싶어 늘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솔직히 이대로 평생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몸에 꼭 맞다. 통역 연습과 공부 걱정없이 딱 회사에서만 일하고(무리하게 외주 일만 받지 않는다면) 퇴근 후 책을 읽거나 요가를 하면서 내 시간을 쓸 수 있다. 비싸고 불편한 무채색의 정장 대신 편안한 옷을 입고, 운동화나 단화를 신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좋다. 전에는 구두를 신어야 했다. 최대한 편하고 굽이 적당한 것을 골랐는데도 그때 신었던 신발을 지금 신어보면, 발이 불편해 오래 걷질 못하겠다. 신발이 편한지 아닌지조차 몰랐는데 하물며 스스로에게 어떤 선택이 옳았을지 제대로 알았을 리 없다.


편한 게 나쁜가? 써놓고 보면 이상한 말이다. 그런데 나는 편할 때 죄책감을 느낀다. 이 죄책감은 쉽게 사라지거나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턱끝까지 숨이 차고 버거워야만 성장할 수 있을까? 나는 초를 다투는 운동선수가 아니다. 오래 쉬었으니 통역 실력은 줄었겠지만 쉬지 않고 계속했으니 번역 실력은 늘었을 것이다. 전보다 덜 바쁘니 전보다 많이 읽고, 많이 쓰게 되었다. 그럴수록 더 많이 읽고 쓰기를 갈망하게 된다. 다른 쪽으로 욕심이 생긴 것이다. 전에는 통근 중 지하철에서, 길에서, 심지어 직장에서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통역을 그만두고 나서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 빈번하게 반복되던 과도한 긴장 상태에서 벗어났고, 전보다 잘 자고, 잘 먹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성장인지는 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이게 성장이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있을지 없을지 모를 어떤 잠재적인 기회를 위해 원하지 않는 길을 억지로 걷는 게 더 시간 낭비였을 것이다. 그 일엔 이렇게 허덕이는 나까진 필요치 않다. 내가 두려워하던 게 정말로 다 허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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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6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6 15: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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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정희진의 글쓰기 4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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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쌤의 글을 읽다보면 삶이 그에게 녹록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외부 환경에 민감하고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 고단함은 더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래의 단락을 만났을 때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기질과 가치관, 계급, 성별 등의 이유로 나는 궤도 안의 주류로 살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은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타자임을 선택했다. 누가 어떻게 규정했든 간에 나는 나의 타자성을 사랑한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사실이다. 모든 다름은 공동체의 진실을 드러낸다. (220)”

삶이라 주어진 것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사랑하기까지 얼마만한 강인함이 필요했을까. 그가 나의 등대인 까닭은 그가 이뤄낸 지적 성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독자적인 사유와 해석, 태도, 그가 스스로의 삶에 부여한 의미 때문이다. 그가 변경에 서서 다름을 말하고, 다름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모색했기에, 다른 이들에게도 설 자리가 생겼고,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생겼다.

희진 쌤은 편협하게 읽고, 편협하게 보기를 독려한다. 내가 어느 한 부분에 ‘꽂혔‘다면 그건 그곳이 그때까지 쌓여온 이야기의 맥락과 나라는 사람의 경험이 교차한 지점인 탓이다. 그 부분을 파고들 때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 아니라, 나의 관점과 위치와 당파성이 녹아든 나만의 견해를 구축할 수 있다.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할 때 오가는 흔한 대화, 이를테면 ”그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얘기“ ”넌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비현실적으로 된 거야“ ”소설 쓰고 있네“ 같은 말은 틀렸다. 영화(재현)가 더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현실과 재현의 경계는 없다. 현실을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어디(인식자의 위치)에서 어디(현실의 일부)를 보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진정한 객관성’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곳, 그 주소(address, ‘말하다‘는 뜻도 있다)를 분명히 함으로써 확보된다. (22-23)”

책을 다시 읽는 것이었으나, 읽는 와중에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여러 번 되풀이해 읽었다. 영화를 보며 그가 착목한 지점을 나는 간과했으나 다음에 같은 영화를 다시 본다면 이제 내게 그 부분은 지나칠 수 없는 지점이 될 것이다.

“(…) ’나‘는 매 순간 변화하고 움직이는 존재임을 각성하고 있어야 한다. 안정된 존재가 쓴 글은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안정이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하다. (….) 우리는 상황에 따라 주체도, 대상도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주체가 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이 둘 사이를 지속적으로 왕복하는 성실성(integrity)이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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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의 고통을 위계화한다. 깨닫기 전까지는 내가 그러고 있는 줄도 몰랐다. 어떤 고통은 명예의 전당에 모셔두고 끊임없이 들여다보며 되새기고, 어떤 고통은 느낄 가치도 없는 것이라 폄하하고 눌러 죽인다.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란 말은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내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자신할 수 있을까. '저게 뭐가 아프다고, 쯧'하며 무시한 적이 분명 있었고, 무시한 다음엔 곧장 잊었다.


위계상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내 고통을 소환해 타인의 고통과 비교한 적도 분명 있었다. '나 때는'으로 시작해서 '그러니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로 끝나는 그런 류의 말들이 더 싫은 까닭은 내 안에도 그런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피곤하고 귀찮으니까 그냥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가 하는 말을 듣기보다 내 입장에서 내 얘기만 하고 싶은 마음이 내게도 있다. 그래서 그게 불쑥 드는 충동이란 걸, 생길 땐 노력이 필요 없지만 억제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단 걸 잘 알고 있다. 그 충동을 경계하지 않고 다스리지 않는 건 게으르고 무책임한 일이다. 성숙한 사람은 생각하고 직시한 뒤 반성하고 고친다. 모자란 사람이 모자란 줄 모르고 가르치려 든다(여기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않다).


그래, 이 책 읽으면서 뭔가 좀 싸했어.


저자는 루소를 "자기 미화에 중독된 사람(111)"으로 보고, "외부인의 시선에서는 아무것도 배우려 들지 않는 특정한 성향이 그의 시선을 체계적으로 왜곡(110)"시켰다고 본다. 고독이 그런 위험을 가중한다고 보고, 근거로 애덤 스미스의 '공평한 관객' 이론을 가져온다.


스미스는 고독하게 성장한 사람은 결코 자신을 알지 못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고독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을 오판하고, 자신이 행한 선행과 자신이 입은 피해를 과대평가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타인의 시선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도덕적 시선은 역시 자신의 시선이다. 스미스에게 도덕성은 상상의 힘에, 즉 자신이 외부에서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개념에 기반한다. 우리는 이 기반에서 자신의 행동을 '공평한 관객'의 관점으로 평가한다.

'공평한 관객'은 큰 그림에서 볼 때 우리는 사소한 존재며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공평한 관객의 관점은 우리의 이해관계도 타당하지만 남들의 이해관계 역시 타당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관점은 우리가 남들의 이해에도 부응하려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111)


이 부분은 이 책의 요점이 아니다. 유독 내 관심이 이 책의 3장(나에게 하는 거짓말)에 쏠려 있을 뿐이다. 나는 타고난 체력이 좋지 않아서 불필요한 일에 에너지를 빼앗기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거짓말은 불필요할 뿐더러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되도록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려고 노력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정직한 것이 인품이 좋아서만은 아니다. 정직하게 사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진실한 사람에 비해 기억할 것이 두 배다. 실제가 어땠는지도 기억해야 하고, 자신이 어떻게 말했는지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복잡하지 않은 삶을 선호한다. 이런 점에서 정직은 내게 도덕성 문제인 만큼이나 편의의 문제다. (14)" 딱 내 마음 같아서 속이 다 시원하다. (좀 다른 이야기인데, 선의의 거짓말도 피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저자는 상대에게서 칭찬할 점이 도저히 보이지 않으면 차라리 침묵하라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 시점에 라르스 스벤젠이 정말로 좋아졌다.) 즉, 남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건 내 안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문제다.


그런데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건 좀 다른 문제다. 나는 왜 스스로를 들여다보기를 이렇게 무서워할까. 외부의 자극이 가해졌을 때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으며 어떤 상태인지 왜 잘 파악하지 못할까. 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걸 이렇게 힘들어할까. 내가 정확히 무엇인 줄도 모르면서 왜 더 나은 사람으로 가장하고 싶어할까. 이런 질문들은 해결되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해결하는 것 역시 이 책의 역할은 아니다.





타인에게 솔직하기가 자신에게 솔직하기보다 더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 남들에게 진실할 수 있을까? 내가 남들에게 진실해야 그들도 나를 믿을 수 있듯, 내가 나를 진실하게 대해야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다면 남들도 나를 믿을 수 없다. (113)


그래, 내가 뼈 맞을 줄 알았다. 이 책이 내게 주는 건 경계심과 방향성이다.  


우리 인간은 너나없이 자기 이야기를 만드는 데 능하고, 인간 소통에서 서사 창출은 불가피하다.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삶에 대한 개념을 갖는 것이다. 이 개념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 형태를 취한다.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 경험들을 의미 있는 에피소드들로 정리하고, 그것들을 연결시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을 이해한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즉 사람들의 배경을 그들이 선택하는 행동, 그들의 미래 계획,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 무엇보다 그들이 남들과 맺은 관계들에 연결함으로써 사람들을, 즉 다른 이야기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곧 자신이 되는 일이다. (115-116)


우리는 정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결되지 않은 나의 질문들을 이렇게도 바꿔볼 수 있다. 나는 왜 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데 거듭 실패하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내가 고통을 취사 선택했기 때문은 아닐까. 가치 없다고 치부하고 묻어버린 것들이 꼭 필요한 조각들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 어떤 고통은 그만 돌아보고 보내줘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하지만 이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도, 이 책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거짓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현실 접근을 차단하는 일이다. 착한 거짓말, 못된 거짓말 모두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거짓말은 상대의 자유를 박탈한다. 거짓말은 아무리 선의에서 비롯된다 해도 상대가 주변이나 자신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통찰을 막는다. 반면 진실은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진실은 그가 인생에서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할지 보여 줄 수 있다. 때로 진실은 우리에게 고통스럽거나 심지어 파괴적인 결과를 부른다. 그래도 상대가 진실을 감당하기 역부족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오만이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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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에서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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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작가님 소설을 겁내는 이들에게 권하기 좋은 책이 될 것 같다. 유독 이승우 작가님 작품의 장벽이 높은 까닭은 글에 집약된 사유의 밀도와 순도가 높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특유의 구도자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그러나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주요 사건들이 워낙 흥미로워서 이야기의 힘에 훅 끌려들어가게 된다.

주인공 황선호는 모시던 정치인의 비리를 모두 뒤집어쓰고 국외로 도피하게 된다. 그가 택한 행선지는 보보민주공화국이었다. 왜 하필 그곳이었는지는 어느 자전거 여행자가 어머니에게 부치던 편지와 관련이 있다. 국외자에게 보보민주공화국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통과하는 곳이다. 더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넌 이들이 잠시 경유하는 장소다. 그런데 주변 국가의 이민 정책이 엄격해지면서 보보에 불법체류자가 늘었고,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독재정권은 혐오와 선동으로 외국인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황선호 역시 떠날 수 없으나 쫓겨날 처지가 된다.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은 자의로 떠나지 않았기에 처음 보보에 도착했을 때 호텔방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고 내내 술만 마시고 잠만 잔다. 그런데 이거, 항공비, 숙박비, 체류비 지원되는 무기한 휴가 아니야? 심지어 해외여행? 작가님의 다른 소설 <캉탕>에서는 주인공이 아무 계획도 없이 책상도 치우지 않고, 마시던 커피 잔까지 그대로 둔 채 무작정 집을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을 읽었을 때만큼이나 이 부분에서도 나는 격하게 떠나고 싶어졌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단 며칠이라도 호텔에 머물며 먹고, 자고, 쉬며, 책만 읽고 싶다. 다 버리고 훌쩍 떠나고 싶은 그런 마음을 건드리는 소설에 왜 이렇게 약해질까.

하지만 이 소설의 방점은 떠나기가 아니라 머물기에 찍혀있다(떠나기와 머물기가 계속 교차하지만, 왜 떠났는지보다는 떠난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더 관심을 두는 듯하다). 과오를 잊지 않고 더 나아지려는 노력을, 비속함과 비정함에 대비되는 연대와 결속을, 담담한 환대와 선의를, 서로가 서로의 머물 곳이 되어주려는 마음을 이야기한다.

“네가 원하는 일인지 생각해라. 너를 위한 일인지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다. 남을 위해 일하더라도 네가 원하는 일을 하라는 뜻이다.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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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오리 공부 모임을 위해 샀다. 주중에 라이브로 접속해서 들을 자신이 없어서 신청만 해두었다가 오늘 들었다. 설명을 듣기 전에 예습 겸 정해진 분량을 읽어두었다. 설명을 듣고 해당 부분을 다시 읽으니 이해의 폭이 확연히 달라져서 깜짝 놀랐다. 그간 얼마나 많은 책을 오독했을지 생각하니 아연해진다.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치와 당위의 세계(규범, 의무, 도덕)'와 '사실의 세계(자연, 관찰)'라는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이 두 세계를 혼동해 사실에서 당위를 도출하는 것은 오류이며, 우리는 이것을 사실-당위의 오류(이 책에서는 자연주의적 오류가 동의어로 쓰인다)라고 부른다.


저자 로레인 대스턴은 사람들이 자연에서 도덕을 끌어내는 것, 즉, 사실과 당위를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 인간의 비합리성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 즉, "합리성의 인간적 형태에 관한 사례 (13)"라고 보고, 인간은 왜 사실(자연)에서 가치(규범)를 찾으려하는지를 탐구한다.


19세기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처럼 자연 질서를 도덕적으로 메아리치게 하는 데 반대하는 일부 비평가들은 이러한 사례를 염두에 두고 자연주의적 오류가 논리적으로 거짓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해롭다고 비난했다. "자연이 죽이기에 우리도 죽여야 하는 게 옳고, 자연이 고문하기 때문에 우리도 고문해야 하는 게 옳고, 자연도 그러니 우리도 망치고 파괴해야 하는 게 옳은가? 만약 아니라면 우리는 자연이 하는 일을 전혀 생각하지 말고, 그저 선한 일을 해야 한다." (12)


여기에 적은 내용은 이 책의 도입부이다. 이어서 그는 자연의 의미를 세 가지 제시한다. 특정(종 특유의) 자연, 지역적 자연, 보편적 자연법칙이다. 이에 대한 내용과 이어지는 내용은 공부하면서 천천해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것은 집단 비합리성의 단순한 사례가 아니라 오히려 바로 합리성의 인간적 형태에 관한 사례다. 그렇기에 이는 철학적 인간학의 주제다. 나의 연구 방법은 자연 속 가치의 탐구를 촉진하는 직관의 근원을 발굴하는 것이다.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서, 이러한 직관은 자연과 문화 자체의 풍부함만큼이나 가장 풍부하고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표현해왔다. 하지만 자연에 기반을 둔 다양한 규범들의 저변에 있는 핵심 직관에는 모종의 공통점이 있다. 그 핵심에는 사실과 이상으로서 질서를 바라보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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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2-08 09: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기가오리는 언젠가 시간이 나면 해야지 하며 계속 보고 있었습니다. 직접 하고 계신 분을 보니 반갑습니다. ^^

책먼지 2023-02-08 11:07   좋아요 1 | URL
저도 한참 벼르고 있다가 새해가 된 기념으로 시작했습니다!! 강의와 자료가 실시간 모임 후 일주일 간은 살아있어서 시간될 때 들어가서 들으면 되니 좋은 것 같아요!! 가오리님(?)이 자꾸 알라딘을 까서 들으면서 좀 맘이 불편하긴 한데.. 들을 건 듣고 거를 건 거르며 이용하고 있숩니다!!

수이 2023-03-07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책먼지님! 가오리님이 알라딘 왜 까요? 궁금하다!!

책먼지 2023-03-07 12:26   좋아요 1 | URL
알라딘 리뷰들 지적하면서 여러분은 그러지 말고 전기가오리 하시고 고급 독자가 되세요 하는데요.. 그 잘못됐다는 게 리뷰에 자기 얘기를 쓴다거나, 지엽적인 부분만 가지고 책 전체를 이야기한다거나, 어느 철학자를 파겠다고 하거나 그런 건데.. (철학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래요..) 저는 사실 가오리님이 하지 말라고 예로 든 게 좋은 리뷰의 특성 같거든요??? 그 책을 읽은 사람의 주관과 오독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게 리뷰로 무슨 가치가 있나요..?? 그리고 우린 책 읽고 글쓰면서 노는 건데 좀 완벽하지 않음 어때? 싶기도 해서 왜 까는지 이해도 안 되고 들으면서 기분도 안 좋더라고요

수이 2023-03-07 12:40   좋아요 1 | URL
학문으로 대하고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이들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니까 이해는 가네요. 먹물들 어쩔 수 없는 ㅋㅋㅋㅋ

책먼지 2023-03-07 12:53   좋아요 2 | URL
그쵸?? 이미 고급독자 나누는 거부터 기분 나빴는데.. (그럼 난 저급독자라는거야 뭐야) 이번달에 <페미니즘과 지리학> 같이 공부한다기에 바로 용서함요ㅋㅋㅋㅋ

수이 2023-03-07 12:58   좋아요 2 | URL
가오리님 같은 존재는 정말 귀하죠. 페지 멋져요. 전 가오리님 아주 초기에 후원만 하다가 지금은 안 하고 있지만 그래도 계속 응원하고 있어요. :)

책먼지 2023-03-07 14:12   좋아요 0 | URL
맞아요 불편한 지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철학에 대한 그 열정만큼은 무조건 인정이요!! 요즘 이탈자(?)가 많아져서 좀 힘드신 것 같더라고요ㅠㅠ 이러다 혹시 그만두신다고 하면 어쩌나 좀 걱정스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