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정희진의 글쓰기 4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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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쌤의 글을 읽다보면 삶이 그에게 녹록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외부 환경에 민감하고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 고단함은 더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래의 단락을 만났을 때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기질과 가치관, 계급, 성별 등의 이유로 나는 궤도 안의 주류로 살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은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타자임을 선택했다. 누가 어떻게 규정했든 간에 나는 나의 타자성을 사랑한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사실이다. 모든 다름은 공동체의 진실을 드러낸다. (220)”

삶이라 주어진 것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사랑하기까지 얼마만한 강인함이 필요했을까. 그가 나의 등대인 까닭은 그가 이뤄낸 지적 성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독자적인 사유와 해석, 태도, 그가 스스로의 삶에 부여한 의미 때문이다. 그가 변경에 서서 다름을 말하고, 다름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모색했기에, 다른 이들에게도 설 자리가 생겼고,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생겼다.

희진 쌤은 편협하게 읽고, 편협하게 보기를 독려한다. 내가 어느 한 부분에 ‘꽂혔‘다면 그건 그곳이 그때까지 쌓여온 이야기의 맥락과 나라는 사람의 경험이 교차한 지점인 탓이다. 그 부분을 파고들 때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 아니라, 나의 관점과 위치와 당파성이 녹아든 나만의 견해를 구축할 수 있다.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할 때 오가는 흔한 대화, 이를테면 ”그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얘기“ ”넌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비현실적으로 된 거야“ ”소설 쓰고 있네“ 같은 말은 틀렸다. 영화(재현)가 더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현실과 재현의 경계는 없다. 현실을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어디(인식자의 위치)에서 어디(현실의 일부)를 보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진정한 객관성’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곳, 그 주소(address, ‘말하다‘는 뜻도 있다)를 분명히 함으로써 확보된다. (22-23)”

책을 다시 읽는 것이었으나, 읽는 와중에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여러 번 되풀이해 읽었다. 영화를 보며 그가 착목한 지점을 나는 간과했으나 다음에 같은 영화를 다시 본다면 이제 내게 그 부분은 지나칠 수 없는 지점이 될 것이다.

“(…) ’나‘는 매 순간 변화하고 움직이는 존재임을 각성하고 있어야 한다. 안정된 존재가 쓴 글은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안정이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하다. (….) 우리는 상황에 따라 주체도, 대상도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주체가 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이 둘 사이를 지속적으로 왕복하는 성실성(integrity)이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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