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오디오 매거진 1월호 중 <한 장면의 인생>에서 희진 쌤은 영화 <머니볼>을 이야기했다. 영화에서 희진 쌤이 꼽은 부분은 선수들이 라커룸에서 대화하는 장면이다. "너는 인생에서 뭐가 제일 무섭냐?"고 동료 선수가 묻자 "공이 나한테 올 때"라고 답하는 장면이다. 자신에게 공이 오는 게 가장 두렵다고 말한 선수는 1루수이다. 1루수에게는 공이 많이 온다. 그리고 1루수는 공을 가장 잘 처리해야 하는 포지션이다. 직업 야구선수로 생계를 부양하려면 두려워도 공을 피할 수 없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고, 일상이 공포가 되는 것이라고 희진 쌤은 해석했다. 크리스 프랫이 맡은 1루수 역에 동일시되어 우셨다고 한다. 내겐 그런 일이 통역이었다.
나는 통역이 매번 두려웠다. 행사나 회의 하루 전날에는 제대로 잠을 못 잤고 당일에는 밥을 못 먹을 정도로 긴장했다. 내내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연사가 제발 그만 말했으면, 아니 계속 말했으면, 제발 회의가 빨리 끝났으면, 아니 끝나지 말았으면. 매번 발끝으로 서서 곡예를 하는 느낌이었다. 일을 마치면 안도감과 탈력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잠깐이고, 자책은 오래갔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잘못한 것들만 떠올랐다. 매일 양언어로 뉴스와 연설문, 온갖 자료를 듣고, 보고, 읽으면서도, 더 독하게 공부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나는 왜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이상한 열패감에 시달렸다. 그렇게 6년을 버텼고 재작년 하반기부터 통역을 그만두었다.
슬픔과 두려움은 서로 다르지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오, 윌리엄!>에서 루시가 묘사한 슬픔은 내가 느꼈던 두려움과 유사하다. '슬픔'의 자리에 '두려움'을 넣어서 읽으면 이렇게 된다. "두려움이란 정말로--오, 그건 정말로 고독한 일이다. 그것이 두려움이 무서운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려움은 당신이 유리로 된 아주 높은 건물의 긴 외벽을 미끄러져 내려오는데 당신을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과 같다." 나의 경우는 유리로 된 아주 높은 건물의 긴 외벽을 미끄러져 내려오는데 나를 보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좋았던 순간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국제기구의 수장이나 고위 관료 등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말을 전달할 수 있었던 건 그 자체로 귀한 경험이었다. 국제협력의 현장을 일선에서 목격할 수 있었고, 정책이 수립되고 이행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 속에 들어왔다 나간 것처럼 하고 싶었던 말을 영어로 다 전달해줘서 너무 고맙다'는 인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면에 기대어 일을 계속했던 건 아니었다.
나를 추동한 건 두려움이었다. 통역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실질적인 외부 상황으로 인한 것이라면, 통역을 그만두지 못하게 한 두려움은 추상적인 가능성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건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한정적인 시간을 어디에 써서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와 직결되어 있는 문제였다. 나는 두렵고 어려운 일, 가장 피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고, 그 압박감을 견뎌내야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만두는 건 도망치는 것이고, 지는 것이고, 나약한 것이라 생각했다. 매번 자기극복을 해야 할 필요는 없는데, 너무 힘들면 그냥 그만둬도 되는데. 두 두려움을 저울에 올리고 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쪽을 피했다. 통역을 할 때의 어려움보다 쓸모없는 인간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더 두려웠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는 번역만 하고 있다. 통역을 할 때는 내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싶어 늘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솔직히 이대로 평생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몸에 꼭 맞다. 통역 연습과 공부 걱정없이 딱 회사에서만 일하고, (무리하게 외주 일만 받지 않는다면) 퇴근 후 책을 읽거나 요가를 하면서 내 시간을 쓸 수 있다. 비싸고 불편한 무채색의 정장 대신 편안한 옷을 입고, 운동화나 단화를 신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좋다. 전에는 구두를 신어야 했다. 최대한 편하고 굽이 적당한 것을 골랐는데도 그때 신었던 신발을 지금 신어보면, 발이 불편해 오래 걷질 못하겠다. 신발이 편한지 아닌지조차 몰랐는데 하물며 스스로에게 어떤 선택이 옳았을지 제대로 알았을 리 없다.
편한 게 나쁜가? 써놓고 보면 이상한 말이다. 그런데 나는 편할 때 죄책감을 느낀다. 이 죄책감은 쉽게 사라지거나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턱끝까지 숨이 차고 버거워야만 성장할 수 있을까? 나는 초를 다투는 운동선수가 아니다. 오래 쉬었으니 통역 실력은 줄었겠지만 쉬지 않고 계속했으니 번역 실력은 늘었을 것이다. 전보다 덜 바쁘니 전보다 많이 읽고, 많이 쓰게 되었다. 그럴수록 더 많이 읽고 쓰기를 갈망하게 된다. 다른 쪽으로 욕심이 생긴 것이다. 전에는 통근 중 지하철에서, 길에서, 심지어 직장에서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통역을 그만두고 나서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 빈번하게 반복되던 과도한 긴장 상태에서 벗어났고, 전보다 잘 자고, 잘 먹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성장인지는 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이게 성장이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있을지 없을지 모를 어떤 잠재적인 기회를 위해 원하지 않는 길을 억지로 걷는 게 더 시간 낭비였을 것이다. 그 일엔 이렇게 허덕이는 나까진 필요치 않다. 내가 두려워하던 게 정말로 다 허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