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에서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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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작가님 소설을 겁내는 이들에게 권하기 좋은 책이 될 것 같다. 유독 이승우 작가님 작품의 장벽이 높은 까닭은 글에 집약된 사유의 밀도와 순도가 높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특유의 구도자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그러나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주요 사건들이 워낙 흥미로워서 이야기의 힘에 훅 끌려들어가게 된다.

주인공 황선호는 모시던 정치인의 비리를 모두 뒤집어쓰고 국외로 도피하게 된다. 그가 택한 행선지는 보보민주공화국이었다. 왜 하필 그곳이었는지는 어느 자전거 여행자가 어머니에게 부치던 편지와 관련이 있다. 국외자에게 보보민주공화국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통과하는 곳이다. 더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넌 이들이 잠시 경유하는 장소다. 그런데 주변 국가의 이민 정책이 엄격해지면서 보보에 불법체류자가 늘었고,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독재정권은 혐오와 선동으로 외국인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황선호 역시 떠날 수 없으나 쫓겨날 처지가 된다.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은 자의로 떠나지 않았기에 처음 보보에 도착했을 때 호텔방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고 내내 술만 마시고 잠만 잔다. 그런데 이거, 항공비, 숙박비, 체류비 지원되는 무기한 휴가 아니야? 심지어 해외여행? 작가님의 다른 소설 <캉탕>에서는 주인공이 아무 계획도 없이 책상도 치우지 않고, 마시던 커피 잔까지 그대로 둔 채 무작정 집을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을 읽었을 때만큼이나 이 부분에서도 나는 격하게 떠나고 싶어졌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단 며칠이라도 호텔에 머물며 먹고, 자고, 쉬며, 책만 읽고 싶다. 다 버리고 훌쩍 떠나고 싶은 그런 마음을 건드리는 소설에 왜 이렇게 약해질까.

하지만 이 소설의 방점은 떠나기가 아니라 머물기에 찍혀있다(떠나기와 머물기가 계속 교차하지만, 왜 떠났는지보다는 떠난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더 관심을 두는 듯하다). 과오를 잊지 않고 더 나아지려는 노력을, 비속함과 비정함에 대비되는 연대와 결속을, 담담한 환대와 선의를, 서로가 서로의 머물 곳이 되어주려는 마음을 이야기한다.

“네가 원하는 일인지 생각해라. 너를 위한 일인지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다. 남을 위해 일하더라도 네가 원하는 일을 하라는 뜻이다.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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