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번역을 좋아한다. 단어를 하나씩 차곡차곡 선택해가며 문장을 꾸리고 그 문장을 쌓아서 글의 윤곽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이 좋다. 나의 지금은 단어 이하에서 일어나는 싸움의 연속이지만 돌아보면 문장 이상의 결과물이 산출되어 있는 게 좋다. 느리고 차분하고 정직한 작업. 모르는 걸 얼버무리거나 대충 건너뛸 수 없다는 데서 정직함은 기인한다. 출발어와 도착어가 빈틈없이 들어맞아 지금 일을 제대로 하고 있구나 확신할 수 있을 때의 쾌감은 엄청나다. 대부분의 작업은 100% 만족스럽지 않은 선택지 중 가장 나은 것을 고르고 나머지를 버리는 '솎아내기'에 할애된다. 잘 버리는 능력은 번역에 유용하다.


전문번역사가 된다는 것은 "원문이 그랬어요"라는 변명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암묵적으로 서약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가독성이 떨어지거나 의미가 불분명한 번역은 설사 원문이 그랬다고 하더라도 나쁜 번역이 된다. 현대의 번역사들은 대부분 지역화(localization)에 익숙하다. 현지의 독자들에게 낯선 문화와 개념은 익숙한 문화와 개념으로 치환된다. 쉬운 예로 관용어나 속담이 있다. 같은 개념이라도 다른 함의를 지니는 단어에 이르면 번역의 불가능성을 논할 수밖에 없다. 되도록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단정하고 읽기 좋은 문장을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의미들을 유실하고 있는지는 가끔 떠올린다. 가끔은 떠올려야 할 것 같고 또 가끔만 떠올려야 할 것 같다.


나의 글쓰기 습관이 번역에 흔적을 남기듯 번역하는 방식도 글쓰기에 영향을 미친다. 일 예로 편하게 써도 되는 환경에서도 나는 최대한 맞춤법을 지키고 정돈된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그 사이에서 당연히 생각은 어느 정도 유실되고 말의 세기는 달라진다. 통역할 때를 떠올려보아도 말투와 목소리 톤은 의식적으로 정제할 수 있지만 무의식적인 말습관은 은연중에 배어 나왔다. 목소리를 가다듬거나, 쩝쩝대거나, 숨을 크게 쉬거나, 말을 시작하거나 마칠 때 특정 소리를 내거나, 어떤 단어를 유난히 반복하거나, 말의 속도가 들쭉날쭉하거나, 말과 말 사이 공백이 생기면 듣는 사람 입장에선 매우 거슬린다. 통역을 위해 그런 말습관에 유의하다보면 당연히 평소의 말투도 바뀐다. 나는 이전에도 욕을 안 하는 사람이었지만 더 욕을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갑자기 웬 번역 이야기인고 하니(챗GPT 관련 "10개 직업군을 제시하고 대체 가능성을 묻자 90.9%의 비율로 번역가·통역사가 꼽혔다." (관련기사 링크) 맨날 이런 것만 1등이지!!) 지금 읽고 있는 책들 때문이다. 자살을 주제로 한 책들을 쌓아 놓고 읽으니(장 아메리 <자유죽음> 읽는 중) 짝꿍이 걱정하기에 파스칼 메르시어의 <언어의 무게>, 이레네 바예호 <갈대 속의 영원>으로 잠깐 선회했다. 두 권 다 두꺼운 편이라 출퇴근 때 들고 다니기 어려워서 진도가 더디다. 파스칼 메르시어(본명: 페터 비에리, 본업: 철학자)의 <언어의 무게>의 경우 번역가가 등장해서 언어와 번역에 관해 이야기한다(언어의 실사용보다는 언어라는 관념을 더 사랑하는 듯한 인물 레이랜드는 지중해에 면해 있는 모든 국가의 언어를 배우겠다고 결심한다). 학부 때 읽었던 <리스본행 야간열차>도 그랬지만 이 양반, 살던 곳을 떠나 인생을 리셋하고 싶은 마음을 자극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싶은 열망도!!). <갈대 속의 영원>은 읽으면서 책의 '몸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책에 과몰입한 찐 책 덕후 찾으신다면 여기 있습니다. 책 이야기를 어디서 시작해볼까? 최초의 도서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전쟁부터 훑어야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또 호메로스를 좋아했다고. <일리아스>는 말이야.. 이런 식).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던 친구가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약속이 파투 났다(아직 한번도 코로나 걸린 적 없는 사람 접니다. 연중 360일은 골골대지만 의외로 역병엔 강한 편). 요즘 40분 집중, 20분 휴식을 주기로 하는 포모도로 기법에 빠진 지라 내일 시계 돌려놓고 실컷 책 읽어야지 생각하니 약속보다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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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1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21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끼 2023-04-21 10: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 번역을 정말 좋아하시는 책먼지님 왤케 멋있죠…!! “단어 이하에서 일어나는 싸움의 연속이 문장 이상의 결과물을 산출..!” 이 문장 감동이에요.

책먼지 2023-04-21 11:27   좋아요 5 | URL
하아.. 제가 또 본업할 때 그렇게 멋있습니다(머리카락 찰랑) 멋짐 뿜뿜하러 본업하러 가려고 하는데 곧 점심시간이네요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4-21 13:48   좋아요 3 | URL
저도 그 문장 보고 +_+ 멋짐 뿜뿜입니다

공쟝쟝 2023-04-21 10: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욕을 안하고 싶습니다 ㅠㅠ 바른 말 고운 말 ㅠㅠ 그러나 천출이라 ㅠㅠ 생활이 ㅠㅠㅠ ㅇ ㅏ ㅠㅠㅠ 혜정아 ㅠㅠㅠ

책먼지 2023-04-21 11:25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혜정이보단 도희💕 도희보단 쟝님..😘 맞아요 저는 똑똑한데 욕도 잘하는 여성을 좋아합니다❤️

공쟝쟝 2023-04-21 11:30   좋아요 4 | URL
저도 단어하나하나 고스란한 전 통역자 출신 번역가님을 좋아합니다. 제 거친 언어 사용에 눈이 찌푸려지시겠지만, 언어로는 나의 원대하고 급진적인 사상을 담아낼 수 없댜!!!!!! (욕설과 울부짖음괴 포효!!)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몸짓과 그걸 지켜보는 너어어어ㅓ… 뎨송… 저 오늘뷰터 쉬어서 조증임…😆

책먼지 2023-04-21 11:38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ㅋㅋ 쟝님의 사유를 언어라는 그릇이 못 따라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쟝님 고생하셨어요!! 조증 완전 납득 가능!!! 쟝님 쉬면서 읽고 써줄 거 생각하면 마음이 웅장해집니다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4-21 13:48   좋아요 2 | URL
쟝님 푹 쉬어요~~~

잠자냥 2023-04-21 14:24   좋아요 2 | URL
쟝아 이러지 마 비루해 보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4-21 14:45   좋아요 2 | URL
캣gpt여!! 내가 맞춤법 책을 샀다!!! 책탑 사진 찍을…

잠자냥 2023-04-21 14: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에서 책먼지 님이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해 글을 쓴다는 걸 알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정답을 맞히시는 분에게는........... 책먼지 님의 칭찬이.......ㅋㅋㅋㅋㅋㅋㅋㅋ










정답: ˝파투˝ 이거 정확히 쓰는 분 온라인에서는 처음 봄. 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4-21 14:26   좋아요 4 | URL
방금 전까지 정답 없었던 것 같은데! 이럴 수가… 딱 찾아 가지고 댓글 달려던 참인데 말이지요 ㅋㅋㅋ

잠자냥 2023-04-21 14:36   좋아요 3 | URL
비루 쟝이 한번 맞히나 지켜봅시다. 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4-21 14:46   좋아요 4 | URL
파토 난거 아닌가요? ㅋㅋㅋㅋ 루비라고요? 전 루비같은 보석같은 여자..

잠자냥 2023-04-21 14:48   좋아요 2 | URL
루비루비루비 장으로 승격해줄게요~

책먼지 2023-04-21 14:52   좋아요 2 | URL
퀴즈 참여율이 낮은 건 보상이 전혀 탐나지 않아서 인 것 같은 건 제 기분 탓인가요ㅋㅋㅋㅋㅋㅋ 집집이 잠자냥님 들여놓고 싶다.. 제 안의 맞춤법 필터 끄면 나름 멀쩡한 생활이 가능한데.. 어쩌다 필터 안꺼지면 곳곳에서 맞춤법 오류 폭격이 쏟아져서 진짜 너무 괴롭습니다.. 빨간펜 들고 다니면서 다 고쳐주고 싶다

책먼지 2023-04-21 14:53   좋아요 3 | URL
최소 두 번 읽고 정답 달려던 수하님 격한 칭찬과 포옹과 뽀뽀 날립니다💕❤️🥰🥳😘

공쟝쟝 2023-04-21 15:02   좋아요 3 | URL
캣//비루 두번 작전인 걸 모를 줄 아느냥!!!
책먼지님 // 빨간펜원해요 ㅋㅋㅋ 저 금새도 금세인 거 알라딘에서 배움!! (자랑이다) 파투 파투 파투도 배웟슴! 파투는 화투 파생어인 듯 🤔

잠자냥 2023-04-21 15:12   좋아요 4 | URL
맞히다/맞추다도 많이 틀립니다. 여기 알라딘 분들도 많이...ㅋㅋㅋㅋ

정답을/과녁을/퀴즈를 맞히다.

옷을 맞추다.

책먼지 2023-04-21 15:34   좋아요 3 | URL
헉 저 맞추다/맞히다 지금 배웠어요.. 맞춤법 책 왜 사요? 캣gpt 있는데!!!

잠자냥 2023-04-21 15:36   좋아요 3 | URL
오류가 있는 캣gpt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희선 2023-04-22 0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에도 번역기가 있었지만, 다른 나라 말을 번역기에 넣어보면 이상한 번역이 되기도 했겠죠 챗GPT는 잘 할까요 이 말 여기저기에서 봐도 별로 관심 안 가졌어요 라디오 방송 들을 때 뭔가 말하고 글을 쓰게 한 것도 챗GPT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챗GPT가 잘해도 사람 마음을 다 알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사람도 다른 사람 마음 알기 어려운데... 사람 마음도 잘 아는 챗GPT가 나오기도 할까요


희선

책먼지 2023-04-25 14:23   좋아요 0 | URL
얼마전 챗GPT 활용해서 소설 쓰는 프로젝트가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중 인간의 의도가 가장 많이 개입된 방식, 챗GPT를 최소한의 도구로만 쓴 소설이 가장 훌륭(물론 여기에는 소설을 쓴 작가의 역량과 평가한 독자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으나)했다고 들었어요!! 라디오에서 들으신 거 챗GPT 맞는 것 같아요 연설이나 대본 같은 정형화된 글들은 진짜 잘 쓰더라고요!! 마치 마음을 읽는 것 같은 매우 정교한 흉내내기를 할 것 같아서 무섭습니다!!

다락방 2023-04-24 13: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책먼지 님. 글에서 넘나 지성미가 뿜뿜 나와서 제 두 눈이 하트가 되었습니다. ♡.♡

책먼지 2023-04-25 14:2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다락방님의 통큰 하트가 화면을 뚫고 나올 것만 같습니다!! 더 똑똑해져야겠어요!! 다 꼬셔버리겠다!!!

스니23 2023-04-29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이 빠르게 변화할수록 ‘아날로그‘ 감성이 그립더라고요. 레트로가 유행하는 이유가 있듯이 번역가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책먼지 2023-05-03 12:07   좋아요 0 | URL
후후후 저 기사의 설문조사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분이 분명 계실 줄 알았어요!!! 문학 분야처럼 제2의 창작이 요구되는 번역은 쉬이 사라질 것 같지 않아요!! 그러나 제가 주로 하고 있는 법률, 특허, 정책 같은 기술분야는 정형화되어 있어서 제일 빨리 대체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