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일은 이렇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에서 "자살하는 인간" 부분을 읽다 내가 정신적으로 크게 휘저어지지 않고 이 주제를 감당할 수 있다는 걸 발견했고, 심지어 이 주제가 매우 흥미로워서 더 파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해당 부분에서 만난 매력적인 인용문에 끌려 카뮈 <시지프 신화>부터 읽어보려 했으나 뜻밖에 이 책에 수면을 돕는 효능이 있단 것만 몸으로 증명했고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다른 책 먼저 경유하고 돌아오기로 했다. 사이먼 크리츨리 <자살에 대하여>가 당첨됐고 무척 재미있게 읽고 있다. 그럼 이 책은 어디서 생겼을까? 저절로 생겼을 리 없다. 상반기 책 지름은 더는 없을 것이란 얼토당토않은 선언을 깨고 책을 질렀다. <자살에 대하여>는 알라딘 직배송 중고로 구매했는데 새 책 냄새가 나고 처음 펴는 책의 뻑뻑함이 느껴졌으며 책 사이에 속초 동아서점의 책갈피가 예쁘게 끼워져 있어 기대치 않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자, 어쨌든 그 결과 자기 주장이 뚜렷한 한 떨기 책탑이 완성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헤어질 결심> 책갈피도.. 또 나만 못 참았지!! (또륵)



당분간 이 '자살'이라는 주제에 심취해 있을 것 같다.


물론 이런 문장엔 여전히 조심해야 한다. "(86)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에는 비뚤어진 합리성이 있고, 그 안에서 모든 이유는 돌이킬 수 없고 겉보기에 피할 수 없는 결정으로 이어진다." "자살충동을 느끼는 우울증은 냉혹하면서도 흥분된 공포, 끊임없는 절망의 상태이다. 삶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들이 빠져나가버린다. 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모든 것에 애를 쓴다. 희망도, 의미도, 무도 없다." 나의 경험을 관여시키는 이런 생생한 증언에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불온함을 적시에 감지하면서 살금살금 나아가 보려고 한다.



<자살에 대하여>는 먼저 자살이 왜 금기시되는지 그 이유부터 살펴본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자살은 부분적으로 수용되었다. 저자는 추방형보다 죽음을 택한 소크라테스를 예로 들면서 그에겐 아테네를 떠나는 것이 삶을 떠나는 것보다 더 가혹한 형벌이었음을 언급한다. 한편 17세기에 부상한 과학과 유물론적 자연 개념 하에서 죽음은 그저 하나의 물질이 다른 물질로 변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팽배했을 때조차 일부 신학자들은 성경에 자살을 금지할 뚜렷한 근거가 없음을 논증했다.


즉, 어떤 시대와 사회와 세계관에서는 자살이 금기나 범죄나 비도덕적인 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 국가에서는 자살을 범죄로 보고 처벌하기도 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어떻게 처벌할 수 있지? 나도 궁금했다. 방법이 다 있었다. 죽은 사람의 재산을 몰수하는 비교적 온건한 처분이 있는가 하면 시체의 머리가 바닥으로 향하게 해서 길에서 끌고 다니는 참혹한 형벌도 있었다. 죽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방법을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조선시대에도 부관참시가 있지 않았나.


현대 국가 중에서는 자살을 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나라가 거의 없고, 한국에서 역시 자살은 범죄가 아니다. 자살이 범죄가 아닌데 자살방조죄는 어떻게 성립하는 거야? 짝꿍에게 물어보니 정범이 있고 그를 지원할 때 방조죄가 성립하는 다른 범죄와 달리 "자살방조"는 그 자체를 정범으로 본다고 한다. 야, 뭐야, 완전 이어령 비어령이잖아, 하니 좀 머쓱해 한다. 실제로 자살이 범죄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자살에 대한 공범을 처벌하는 입법에 대한 비판의견이 있기도 한 모양이다.



저자는 자살이 금기시되어온 배경을 기독교 교리에서 찾는다(크리츨리가 서구 남성 철학자임을 기억하자). 한국의 경우는 유교적 전통이나 공동체주의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교리가 원인이라는 전제 하에 크리츨리는 자살을 금지하는 이유를 하나하나 철저히 깨부순다. 이 부분을 읽는 게 꿀잼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삶이 신이 준 선물이라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에 대해 선물엔 조건이 없어야 함을 언급한다. 삶이 진정으로 선물이라면 그것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존엄성을 근거로 드는 논리에 대해서는 생명이 그렇게 존엄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예외가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 그러면 사형제도나 정당방위도 성립해선 안 된다. 그 생명은 왜 인간의 생명만 가리키는가. 동물의 생명, 식물의 생명,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도 다 적용해야 맞는 거 아니냐. 존엄성은 근거가 되지 않는다.


반대로 개인에겐 자기결정권이 있으므로 자살할 권리가 있다는 입장에 대해서도 저자는 논박한다. 나 자신에 대한 결정의 권리가 100% 나에게만 있는가. 공동체에 미칠 여파는? 실제로 죽음을 경험하고 그것을 삶과 비교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삶보다 죽음이 더 낫다는 판단은 과연 가능한가?


여기까지가 2장의 내용이고 3장부터는 자살의 유형과 이유와 관련된 내용이 펼쳐진다. 예를 들어, 금문교에서 떨어져서 자살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태평양에 면한 쪽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도시가 보이는 쪽으로 몸을 던진다고 한다. 이런 자살에는 공적인 성격이 있다.


위의 신의 선물(신의 무한한 사랑)과 관련해 저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탐구한 부분이 걸작이라 그걸 인용하려고 한다.


(67) 결국 사랑이란 무엇인가? 나는 오스카 와일드가 <심연으로부터>에서 정의한 게 옳았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주고 자신은 어떤 권한도 없는 것을 받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이 보답받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은 아닌 채, 그렇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사랑은 가정법에서 일어난다. 그렇게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좋을 것이다. 사랑의 논리는 은총의 논리와 유사하다. 진정으로 내 통제 능력 밖에 있는 것을 주고, 그것에 완전히 전념하지만 사랑이 보답받으리라는 보장은 있을 수 없다. 사랑의 관계에서는 언제든 연인이 "널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고 그럴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연인이 사랑을 거부할 수 없다면, 사랑은 강압적인 통제, 계약상의 의무와 명령이 되어버린다. 이 중 어느 것도 사랑이 아니다. 신이 무한히 사랑한다면 그, 그녀 또는 그것이 그 사랑을 거부할 수 있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허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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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3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13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3-04-13 12: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상반기 책구매 금지라고 한 자신의 언어의 무개를 갈대처럼 내던지고 반항하는 인간 실존주의자 책먼지는 자살에 대하여 읽다 말고 한떨기 책갈피 파르르 꽂은 책 사진으로 독서의 최전선에 복무하시오!! ㅋㅋㅋ

책먼지 2023-04-13 12:4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치겠다ㅋㅋㅋㅋㅋㅋ 쟝님 진짜 천재아녜요?! 이게 과거였음 지금 장원급제밖에 못한다구요!!!

잠자냥 2023-04-13 12:50   좋아요 4 | URL
쟤 요즘 껍찔까진 비타민 좀 먹었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4-13 13:12   좋아요 3 | URL
그 비타민 좀 상큼해🤭

잠자냥 2023-04-13 12:5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먼저 님 그런 얼토당토 않은 선언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ㅋㅋㅋㅋㅋㅋ
<언어의 무게> 두께가 생각보다 좀 있네요!
자살과 관련한 책 중에 장 아메리 <자유죽음> 추천합니다~ 먼지 님이라면 아주 흥미롭게 읽으실 거 같아요-

잠자냥 2023-04-13 12:55   좋아요 4 | URL
책먼저라고 오타가 났는데 그냥 두겠습니다.
책먼지는 선언보다 책먼저..........

우끼 2023-04-13 13:03   좋아요 3 | URL
맞춤 큐레이팅까지… 자냥님은 정말……. 👍👍

책먼지 2023-04-13 13:08   좋아요 5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이분들 단체로 푸코 잡쉈나 오늘 왜 이렇게 천재천재이신건가요!!! 오타조차 큰그림이 아니었나 의심 중입니다!!
저기서 바예호들은 자냥님 지분!!! 믿고 읽는 자냥님표 추천이니 <자유죽음>은 하반기에.. (또 무책임한 선언을..)
<언어의 무게>는 책 무게로 이미 할말 다 끝냈음요.. 안 읽어도 무게 알겠음…

공쟝쟝 2023-04-13 13:13   좋아요 3 | URL
책안구매선언번복 갈대속의영원먼지

책먼지 2023-04-13 13:1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쟝님 제발 그만 ㅋㅋㅋㅋㅋㅋ 소리내서 못 웃으니까 눈물이 나요.. 궁서체로 현판만들어 걸어놓고 싶다..

공쟝쟝 2023-04-13 13:23   좋아요 2 | URL
장!원!급!제! 🥳👯‍♀️🥳

잠자냥 2023-04-13 14:09   좋아요 3 | URL
노노-
쟝!원!급!제!

다락방 2023-04-13 16:27   좋아요 4 | URL
앗 저 장 아메리 자유죽음 추천하려고 했는데 잠자냥 님이 나보다 한 발 빨랐다... 분하다..(부들부들)

책먼지 2023-04-13 16:53   좋아요 3 | URL
하아.. 두분이 다 이렇게 앞다투어 추천하시면 저 너무 참기 힘든데..😱

우끼 2023-04-13 1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먼지님 글에 설득되어서 저도 비슷한 책을 읽고 싶어졌어요 ㅠㅠ….. 휴 저는 일단 책먼지님 리뷰를 기다리겠습니다!!!

책먼지 2023-04-13 13:1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뜻밖에 영업성공!!! 이 주제에 흥미가 떨어지는 그날까지 아마 보는 사람이 질리도록 주구장창 달릴듯요!!

건수하 2023-04-13 13: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 1/4분기 라는 저의 예언(?)은 맞았다... ㅋ

책먼지 2023-04-13 16:56   좋아요 2 | URL
수하님 안그래도 지난번 책탑에 달린 수하님 댓글이 떠올라서 어찌나 찔리던지요.. 보부아르 읽으면 이렇게 예지력(?)도 생기는 건가요!!!!

다락방 2023-04-13 16: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언급하신 소크라테스의 ‘그에겐 아테네를 떠나는 것이 삶을 떠나는 것보다 더 가혹한 형벌‘ 이라는 부분이 저는 자살을 설명하는 가장 큰 축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도 잠깐 댓글 달았지만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 을 읽어보면, 자살은 바로 그럴 때 일어나거든요. 순전히 자신의 기준으로 나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 혹은 그 감정이 삶보다 더 크게 나를 휘몰아 치는거죠. 그 기준은 타인이 보기에는 지극히 작고 미미할 수 있어도 당사자에겐 그렇지 않다는 거죠. 저는 막연하게 자살을 하지 말자, 살아보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는데요, 그런데 그것이 선인가? 라는 생각을 점차로 하게 되었어요.

소설 중에선 <미 비포 유> 가 있는데요, 혹시 읽어보셨을 수도 있지만, 남자주인공 ‘윌‘은 사지마비 환자인데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안락사를 택하거든요.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가 나를 사랑하는데 그게 충분한 이유가 안된단 말이야? 어떤 사람에겐 그것이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에겐 그것이 답이 아닐 수도 있는거죠. 사지마비가 되기 전에 윌은 자신의 활기찬 삶, 몸으로 사는 삶을 정말 사랑했거든요. 그것이 바로 자기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윌이 이런 식으로 살아가느니 죽기를 택하겠다는 것을 과연 타인이 반대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물으면 윌의 선택을 존중해야 겠다,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맨 마지막 인용문 정말 좋으네요, 책먼지 님. <자살에 대하여>도 사야겠어요. <왜 사람들은 자살하는가?>는 이미 갖추고 있습니다. 안읽었지만..

하아- 전 올해 책 좀 그만 사야하는데.. 책먼지 님 때문에 다 틀렸어요...........(체념한다)

책먼지 2023-04-13 17:08   좋아요 1 | URL
헛.. 다락방님 짚어주신 이 맥락 떠올리면서 책의 남은 부분 읽어봐야겠어요.. 앞으로 나올 부분에서 인셀들 사례(다중살인을 저지른 뒤 자살하는 사례)도 나오는 것 같은데 자살이 원인도 유형도 양상도 정말 다양하고 여기에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개별성)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있습니다!!!

<미 비포 유> 읽으면서 윌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사랑에도 불구하고 윌은 끝내 죽음을 택하겠구나.. 그치 사랑이 모든 걸 다 구원하진 못하지.. 충분히 예감하고 마음을 잡았는데도 저는 마지막 윌의 선택에 충격과 배신감을 느꼈어요.. 이론적으로는, 존중해야지 괴로움과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남겨질 사람들 때문에 살아달라는 건 이기심이야, 생각하면서도 막상 감정에 이입되니까.. 하아 그래도 살아주지 싶더라고요 ㅠㅠ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님 일단 진정하시고 <왜 사람들은 자살하는가>가 마침 있으시니 그 책부터 읽으심이 어떠실지요??? (저는 말렸습니다!!!)

다락방 2023-04-13 17:32   좋아요 1 | URL
책먼지 님, 제가 그전에도 책먼지 님과 미 비포 유 얘기 했었던가요? 왜 데자뷰 같죠??????????

책먼지 2023-04-13 17:45   좋아요 0 | URL
오잉?? 분명 처음인 것 같은데.. 뭐죠..?? 이게 무슨 일이죠..??? 다락방님은 제가 이 책 읽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어떻게 아신 것이죠…??🤔 그나저나 오늘 알라딘에서 자꾸 <두 손이 닿을 때까지> 광고해서 한참 로맨스 읽고 싶어하시던 다락방님 떠올랐어요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4-13 17:52   좋아요 1 | URL
<두 손이 닿을때까지>는 뭐죠? 아이참.. 검색해보고 왔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중고알림 등록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댓글로도 책 뽐뿌 넣으시는 책먼지 님...

책먼지 2023-04-13 21:33   좋아요 0 | URL
제 영업본능이 이 구역 큰손을 알아봐버리고 말았습니다ㅋㅋㅋㅋㅋ💕

희선 2023-04-14 03: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니 읽은 적 없지만 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자살의 전설》(데이비드 밴)... 지금은 이 책 팔지 않는군요 자살이라는 걸 보고 그런 책을 찾아 보시다니... 찾아보면 많기는 하겠습니다


희선

책먼지 2023-04-14 10:39   좋아요 2 | URL
후후후 제가 하필 이 주제에 꽂히는 바람에!!! <자살의 전설> 검색해보니 헤밍웨이와 코맥 매카시 한줌이래서 (정확히는 힘줄이랬지만…) 완전 궁금해졌어요!! 요거 중고로는 좀 있는 것 같으니 구해봐야겠습니다💕

2023-04-14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14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