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말할 수 있는 영역(언어화할 수 있는 영역)과 말할 수 없는 영역(언어화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말할 수 없는 영역이 말할 수 있는 영역보다 방대하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고 한 데에는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논하지 말라는 소극적 의미도 있으나, 논리적/경험적으로 언어화할 수 있는 것을 더욱 명확히 체현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라는 적극적 의미도 있다. 윤리나 종교, 삶의 의미를 비롯한 가치 있는 것들은 말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다. 말할 수 없다고 해서 그러한 문제들을 그냥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들여다보고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일종의 '비유'로서 특정한 게임의 규칙과 맥락(예를 들어, 종교) 속에서 유효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여기까지가 전기가오리를 통해 공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고, 아래부터는 본격적인 확대 해석과 오독이다.
나는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경계가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지식의 발견, 시대의 변천, 개인의 가치관과 역량에 따라서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수 있는 영역은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타인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나 자신에게 만큼은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의미한 명제가 된다.
내 생각에 지금 여성들이 가장 활발하게 하고 있는 일은 바로 그 경계를 움직이는 일인 것 같다. 우리는 기존에 잘못 말해진 것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전에는 말할 수 없는 영역으로 분류되었던 문제들에 대해서도 위치와 맥락을 부여하여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어쩌면 불가능하고 그만큼 공격에 취약한 이런 노력을 경주하는 까닭은 언어로 남지 못한 것은 휘발되기 쉽기 때문이다. 매 세대가 허덕이며 ground zero에서 시작할 필요는 없다. 역사의 부침과 전방위적 공격으로 비록 이전 세대는 실패했으나 우리 세대는 기필코 여성들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유산을 전수하는 데 성공할 것이다. 내 삶이 가질 의미 중 하나는 읽고, 배우고, 공부한 것을 기록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나를 바꿔 세계에 나를 일치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