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기관 우수 저작물 지원 공모 사업 심의를 맡았었다. 벌써 3번째 심의라서 별 감흥은 없었다. 대면 심사 당일까지 나와 함께 수필 분과를 심의해야 할 분이 누군지 모르는 시스템이다. 사전에 우리에게 배당된 도서에 대한 점수를 부여하고 의견을 모두 제출하기 때문에 최종 심의 때는 이견조율 정도로 끝난다. 어쨌든 대면 심의하러 서울까지 올라갔는데 심의 장소가 알고 보니 옛 서울대 본관 건물이었다고. 과연 건물 내부가 예스럽고 귀족적이었다. 


삼십 분 전에 도착했는데 나와 함께 심의하는 위원 분은 더 일찍 도착하셔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멀리 제주도에서 오셨다고. 그런데 그분 좌석 앞 명패를 보니 뭔가 낯이 익다고 생각하였다. 심의를 마칠 때쯤에 이르러 그분이 혹시 내 대학은사님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대학 은사님을 한눈에 못 알아보는지 의아할 터이지만 내가 다닌 대학 영문과는 교수님이 20명에 육박했다. 물론 모두 정교수만 그랬다. 


그래서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강의실에서 만나지 못하는 교수님이 여럿 있었는데 그분도 나에겐 그런 경우였다. 함자와 명성만 들었을 뿐 강의실에서 만난 적이 없으니 나는 대학 졸업 후 30년 만에 은사 님의 얼굴을 처음 뵌 것이다. 서울을 떠나 집으로 내려오면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심의 담당 관계자에게 연락해보니 내 추측이 맞았다. 미리 알아차리고 인사를 드렸으면 참 좋았겠다 싶었다. 


나는 시간의 흐름만큼 현란한 마법사도 없다고 생각한다. 30년 전 말로만 듣던 대단한 은사님을 30년이 지난 후 공모 사업 심의 파트너로 만나 이견을 조율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그러나 그분은 문학평론으로 평생 대학 강의를 하신 분이니 나와는 결이 다르다. 새삼 내가 남긴 의견과 그분이 남긴 의견을 떠올려 비교해보니 낯이 뜨거워졌다. 어쩌면 그 자리에서 내 정체를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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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상주 산골 마을에서 졸지에 대구로 전학을 간 나를 기다리고 있던 신문물이 여럿 있었다. 만두. 우유. 승차권 등이 그것들이었는데 무엇보다 나를 경도하게 만든 것은 초인종이었다


내가 살던 산골 마을 고향 집은 대문 자체가 없을뿐더러 대문이 있는 집이라고 할지라도 벨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벨 티(벨 누르고 도망치기)에 탐닉했는데 주 활동무대는 양옥집이 즐비했던 대명동과 산격동이었다. 세월이 흘러 벨 티를 즐겨서 지역 주민을 성가시게 했던 나는 중늙은이가 되었고 대구로 강연하러 간다. 인생이 참 얄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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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소설 이라는 주제로는 처음 하는 강연인데 담당 사서 선생님께서 이토록 예쁜 포스터를 만들어주셨다.  새삼 알차고 재미난 강연이 되도록 혼신의 힘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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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성구에 있는 도서관에서 강연 의뢰를 했다. 대구는 청소년과 대학 시절을 보낸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니 반가운 마음에 선뜻 수락했다. ‘이토록 재미난 고전 소설 읽기라는 주제로 고전 속에 숨겨진 이야기와 작가들의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로 하고 파워포인트까지 작성했다. 그런데 사서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내 신간인 <서울대 지원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 20>을 주제로 강연해달라고 부탁한다. 아무래도 학부모들이 좋아할 것 같다고 한다.

 

대구 수성구는 대구의 강남으로 불리는 곳으로 학력과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은 곳이니 이해가 될 법도 하다. 그러나 나는 교직 생활과 독서 인생을 통틀어 특정 대학을 목표로 지도한다거나 독서를 통해서 더 좋은 대학에 간다는 목표를 세운 바가 없다. <서울대 지원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 20>도 출판사에서 기획해서 나에게 출간의뢰를 했으며 서울대에 가기 위한 책이라기보다는 요즘 청소년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더 발전적인 독서를 하기 위한 발판쯤으로 쓴 책이다.

 

사실 서울대 지원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20권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사람들이 많이 읽은 요즘 책에 지나치게 무관심하였으며 요즘 청소년들이 많이 읽는 책이 신선한 충격을 주고 새로운 생각과 영감을 주는 책이 많다는 것을 통감하였다. 즉 모두 읽어볼 만한 좋은 책이라는 것이다.

 

자녀가 책을 많이 읽기를 바라는 학부모에게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책이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주인공 필립은 일찍이

양친을 여의었고 더구나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백부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백부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목사였다. 그는 필립에게 성경을 암기하라고 명령했고 필립은 힘겨워서 혼자 방에 틀어박혀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자상한 숙모는 필립이 운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방문 앞에서 필립이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노크했다.

 

숙모는 필립이 그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흥미로운 그림이 담겨 있는 그림책을 필립에게 보여주었다. 필립은 그림에 빠져 그림 뒤에 쓰인 글씨가 무슨 뜻인지 궁금했고 자발적인 독서를 시작한다. 그때부터 독서에 빠진 필립은 다양한 고전을 섭렵했고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의사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까지 만나 행복한 삶을 누린다.

 

자식이 책을 많이 읽기를 원하는 부모는 강압적으로 책을 읽으라고 잔소리하기보다는 아이의 손을 잡고 서점을 다니거나 좋은 책을 자녀에게 읽어줌으로써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나저나 내 딸아이가 서울대 낙방생이라는 것을 밝혀야 할지 말지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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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5-24 14: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소박한 고민이네요,ㅎㅎㅎ

박균호 2023-05-24 16:04   좋아요 1 | URL
나름 진지한 고민입니다..ㅎㅎ

stella.K 2023-05-24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야할 책이 늘어나네요. 인간의 굴레 읽은 것 같긴한데
기억이 안 나네요.ㅠ
근데 따님이 공부를 잘하긴 했나 봐요. 서울대 원서를 넣어봤다는 게 어딥니까?
저는 꿈도 안 꿨습니다.ㅋㅋㅋ

박균호 2023-05-24 16:04   좋아요 1 | URL
ㅋㅋㅋ 어쨌든 떨어졌는데요 몰..
인간의 굴레...이거 정말 강추해요. 저도 오랜만에 새로 읽었는데 새로운 재미가 있더라구요.
 
파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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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자키 도손이 쓴 <파계 破戒>는 백정 출신임을 숨기고 교사 생활을 하는 우시마쓰의 번민과 내적 갈등을 다룬다. 이 책은 1906년에 출간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는 애타(천민)라는 계급이 실존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계급제도는 타파하였으나 천민엔 대한 뿌리 깊은 멸시로 새로 평민이 된 사람 이란 의미로 신평민이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실제로는 그들에게 극심한 차별을 가하였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도 백정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는 교사로 멀쩡히 근무하다가 백정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 탄로 나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부족해 하숙집에서도 쫓겨난 인물이 등장한다. 그래서 주인공 우시마쓰는 아버지가 당부한 대로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며 죽을죄를 저지른 것처럼 전전긍긍하면서 지낸다. 일본 사회에서 백정을 비롯한 천민이 겪은 고초는 소설 내용보다 훨씬 가혹했다. 예산 부족으로 천민 출신 자제를 일반 학교에 다니게 하였지만 ‘차별을 감수하겠다’는 각서를 작성하게 하였으며 교실 한쪽 바닥을 한 단계 (1.2미터) 내려 판자벽을 치고 천민 출신 아이돌의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거기에서는 칠판도 교사도 보이지 않았다. 온갖 차별과 멸시로 무사히 초등학교를 졸업한 천민 출신 자제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에타(천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부락(部落)으로 불렀다는 사실이다. 부락! 왠지 익숙한 단어다. 실은 어린 시절 시골에서는 마을을 부락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부락이라는 단어를 애용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교사 들이었다. 선배 일본인 교사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했으리라. 불길한 예감에 잠시 검색을 해보니 역시 우리나라 사람이 몇십년 전까지 자주 사용하던 부락이란 말이 일본의 천민 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의미하는 부락에서 차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 들은 조선사람이 사는 동네를 천민 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며 이런 속뜻도 모른 채 우리나라 사람 들은 자신 들이 모여 사는 곳을 ‘천민이 사는 마을’로 불렀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1936년 서정주가 주축이 되어 발간한 동인지 이름이 ‘시인 부락’이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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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1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2 0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8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8 0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23-05-08 08:28   좋아요 1 | URL
어이쿠...과분한 칭찬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기분좋게 한 주를 시작하게 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