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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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다닐 때 방학이 되면 담임 선생님은 ‘방학생활’이라는 교재를 나눠주셨다. 읽을거리도 있고 학습 내용도 있는 책인데 딱히 읽을거리가 없는 시골에 살았던 나는 꽤나 재미나게 읽었더랬다. 그 책에 실렸던 학습 만화가 생각난다. 내 또래의 학생이 방학 내내 숙제는 하지 않고 놀다가 개학 하루 전에 연필을 들고 숙제를 시작하는 시늉을 한 다음 친구에게 자랑스럽게 ‘숙제의 반은 했어’라고 자랑한다. 

의아한 친구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을 때 그는 “00이 반이라는 속담이 있잖아”라고 말한다. 속담의 용례를 설명하기 위한 만화였는데 멍청하게도 나는 정답을 알지 못했다. ‘시작’이라는 정답을 스스로 알게 된 것은 한 참 뒤였다. 어떤 일이든지 시작하기가 그만큼 어렵고 시작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큰일’을 했다는 뜻일 게다.

취미로 시작한 글쓰기가 ‘계약’을 한 글쓰기가 되어버린, 재미나고 하고 싶어서 한 일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의무로 바꿔버린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은 글쓰기에도 잘 적용된다. 고료를 받고 잡지에 연재하는 A4 용지 2매 정도의 원고는 카드 대금 청구서 만큼이나 무섭다. 나는 주말부부인데 금요일 오후면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한 꼭지의 글을 쓰는데 필요한 참고 서적을 가방이 터질세라 넣어서 본가로 왔고, 일요일 저녁이면 그 가방은 고스란히 다시 학교로 향했다. 

주말에 편안하게 써야 한다는 생각과,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쉬고 글은 평일 저녁에 써겠다는 생각은 근 2달 동안이나 실행되지 못했다. 원대한 포부를 품고 여름방학은 시작되었는데 전기요금이 무서워서 에어컨을 켜지 못하니 더워서 글을 써지 못했고,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는 도서관 열람실을 가봤으나 책상이 너무 좁아서 글을 써지 못했고, 집 앞의 독서실을 갈려고 생각해봤는데 독서실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것은 민폐이니 그것도 안 되겠더라.

예전에 책을 쓰겠다고 본가에서 나와서 따로 오피스텔에서 지냈다고 하는 처자의 이야기를 듣고 ‘뭘 또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했는데 퇴직을 하면 조그만 원룸이라도 구해서 나만의 작업실을 구하는 것이 나의 꿈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출간계약을 작년 여름에 한 건, 그리고 올 초에 한 건 총 두 건을 했는데 진척된 것이 미미하다. 페이스북에서 출판사 대표가 로그인되어 있으면 서둘러 도망치기 일쑤다. 마음은 급한데 여름방학은 속절없이 끝나간다. 

절호의 기회는 있었다. 아내가 처제와 함께 3박 4일의 일정으로 일본 여행을 갔고 딸아이는 벌써 개학을 했다. 새벽에 딸아이를 깨워서 아침밥을 먹인 다음 학교에 데려다 주고 밤에 다시 데려오는 것이 유일한 임무고 나머지 시간은 창밖을 내다보면 정원수가 보이는 우리 집 1층 아파트는 오로지 나의 차지다. 거실 책상 위에 노트북과 참고해야 할 책이 얹어졌고 작년보다 인하된 전기요금 덕분에 웬만큼 에어컨을 켜도 부담이 되지 않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환경도 갖추어졌다. 

눈이 피곤할 때면 고개만 돌려도 대추나무에 열린 대추를 바라보기도 하고 베란다 창문을 열어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던져주기도 한다. 환경이 너무 쾌적하다 보니 또 나태해지더라. 낮에는 먹고 자고를 반복하다가 밤이 되면 어슬렁어슬렁 기어나가 운동을 하고 딸아이의 하교 시간에 맞춰 픽업하고 집에 돌아오면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낮에 담당 편집자와 대화를 나눴는데 그분이 ‘선생님, 지금 하고 계신 00 출판사의 원고가 마치면 우리 원고 써주실 거죠?’라고 하신다. 미안한 감정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정신은 번쩍 들었는데 방학은 딱 1주일 남았고, 에어컨을 켜면 추위를 타는 아내는 오늘 밤에 돌아오며 거실에 구축된 나의 글쓰기 환경은 철거될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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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8-09 1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희 집에 컴퓨터가 거실에 있습니다. 가족이 보는 앞에서 글을 써야하는데, 그 상황을 생각하면 부끄러워집니다. 글을 쓰고 있는 제 모습을 가족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게 불편합니다. ^^;;

박균호 2017-08-09 12:16   좋아요 1 | URL
그거 엄청 불편하죠. 전 그렇게는 글을 못쓰고 서재에 틀어 박혀 씁니다. 아무도 없을 때만 저렇게 거실에 전을 치고 글을 쓰죠. 대프리카에 사시는 것 맞죠? 건강 조심 하셔요.

cyrus 2017-08-09 12:18   좋아요 2 | URL
김천도 날씨가 무척 더운 지역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균호님도 건강하세요.

박균호 2017-08-09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천은 대구에 비하면 시원한 편이에요. 그나저나 요즘은 대구보다는 경주나 포항이 라이징 스타죠.!! 여튼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17-08-09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9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9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10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10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8-09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운동중입니다 이따 집에 가서 자세한 답글 드리겠습니다!!

[그장소] 2017-08-09 2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든 숙제가 되면 , 반이나마나 시작조차 어려우니 ㅋㅋㅋ 절벽 앞에 가 계셔야 할 듯 합니다~^^

박균호 2017-08-09 21:2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ㅠㅠㅠ

transient-guest 2017-08-11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이 되면 취미로 하실 떄보다는 부담이 생길 것 같아요. 그래도 부럽기 그지없습니다.ㅎㅎㅎ

박균호 2017-08-16 13:29   좋아요 0 | URL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것 같아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