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시절 나는 통신대대에 근무했다. 다양한 병과가 공존했는데 그중에 암호병은 특별한 존재였다. 암호병은 그야말로 부대 간의 주요한 메시지를 적들이 도청해서 해석하지 못하도록 암호로 조립하고 수신한 암호문을 우리말로 해독하는 역할을 한다


보안이 생명인 만큼 암호병들은 일체 암호에 관한 그 어떠한 내용도 발설하지 않는다. 그렇게 교육받는다. 또 암호병들이 근무하는 암호실은 헌병이 총을 들고 24시간 지킨다. 암호병과 직속 상관을 제외하고 그 어떠한 군인도 출입할 수 없다. 80명 남짓이 생활하는 중대이고 2년을 함께 붙어살았지만 암호병이 아닌 다른 병과 병사들은 암호를 어떻게 만들고 해독하는지는 물론이고 암호실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조국 전 장관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지나쳤고 다분히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조국 전 장관의 자녀 입시 비리 수사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우리나라 대부분 학부모, 학생, 학교, 교사는 모두 경찰 수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조국 전 장관이나 다른 유력 인사 자제들의 입시 스펙 쌓기의 면면을 알고 나서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명색이 교사로 수십 년을 근무했지만 그런 방법으로 입시 스펙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이 작은 나라에서 참 신기하고 기가 찰 일이다.

 

암호병이 아닌 다른 병과의 병사처럼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비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나의 평범함은 자식에게까지 고스란히 대물림된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간 딸아이는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었다. 심지어 신용카드로 결제가 가능한 자판기를 보고 신기해했으니 더 무슨 말을 할까. 물론 나도 딸아이에게 들어서 처음 알았다.

 

웃기기도 하고 슬픈 일이긴 한데 이런 일도 있었다. 딸아이가 동급생 같은 과 친구와 친해진 이유가 이랬다. 그 친구는 서울 지역 외국어고등학교 출신인데 내 딸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경쟁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꿈많은 고등학교 생활이지만 늘 경쟁에 지치다 보니 우정을 나눌 기회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그 습관이 여전했는데 어느 날 내 딸아이가 전화를 걸어와서는 시험 끝났으니까 놀러 가자라고 그러더란다. 나중에야 내 딸아이에게 토로했는데 참 당황스러웠다고’.

 

자신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험이 끝나더라도 결과를 분석하고 동급생들을 견제하느라 놀 생각을 전혀 못 했고 또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웬 시골에서 올라온 동급생이 시험 끝났으니까 놀러 가자라고 말해서 낯설고, 당황했다고. 22살이 되도록그런 말을 건넨 친구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내 딸아이는 대학교 3학년이 된 그 친구가 자신의 집에 초대한 생애 첫 친구가 되었고 환대를 받았다.

 

시험 끝났으니까 놀러 가자가 왜 이상한 것인지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던 시골 출신 학생의 아버지인 나로서는 기뻐해야 하는지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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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8-14 02: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서울 애들 학교생활이 충격적이네요. 조국사건은 그 개인과 가족사로는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우리 사회가 얼마나 특권층 중심으로 돌아가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20대 30대의 분노가 제가 생각한 것보다 더 컸던거 같고요. 이 사건이 우리나라의 온갖 특권에 대한 고찰과 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마녀사냥으로 몰린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어요.

박균호 2021-08-14 05:24   좋아요 2 | URL
네 하신 말씀 모두 동감합니다.

stella.K 2021-08-14 1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군요.
저도 좀 놀랐습니다. 와국은 안 그렇다던데...
어느 병원에 새로운 인턴이 들어오면 금방 한팀이 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견제부터 한다다군요. 그게 그들이 다녔는 학교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걸 알면 정말 우리나라 학교 교육은 좀 변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의도적으로라도 아이들은 시골 학교로 보내던가.
그나저나 따님 친구는 정말 잊지 못할 첫 경험을 따님을 통해 했네요.
그런 좋은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박균호 2021-08-15 18:1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좀 낯선 세상이죠..ㅠㅠ

비로그인 2021-10-23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문제의 본질은 특권층 얘기가 아닌것 같은데요, 저도 하층민이지만 여기서는 윤서결 검찰을 비판해야 하는게 맞는거 같습니다. 특권층은 논점을 벗어나요.

2021-10-23 0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다 2021-11-22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다 들렸는데 인문학 스펙쌓기 같은 경우 그 대학 교수가 언론의 일방적 해석(진xx의 일방적인 말)과 정경심 교수 조리돌림이라고 그 대학 교수가 해명도 했는데(언론에선 입 다물고 있지만 찾아보면 직접 인터뷰한 동영상이 나옵니다), 책을 내신 분조차 이런 가짜뉴스에 휘둘리는 현실이 무섭긴 무섭네요.

기생충 연구한다는 교수는 청문회에서 국회의원들의 디테일한 정경심 교수 관련 질문에 한다는 말이, 제가 디테일에 약해서 잘 모릅니다. 라고 말하더군요. 모르는 것엔 침묵해야 할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네요.

바다 2021-11-22 17:35   좋아요 0 | URL
하나 더 첨부하면요, 제가 전혀 상관없는 님의 글에 왜 이런 댓글을 단 이유는 제가 님의 책을 구입해서 나름 좋게 읽었기 때문입니다.

윗님의 댓글처럼 이 나라의 표적수사를 규탄해야지, 한 가족이 처참하게 찢겨지는 잔임함을 보며 다 똑 같은 인간들여..하는 모습은 인간이 경계해야 할 것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박균호 2021-11-22 17:42   좋아요 0 | URL
부족한 제 책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조국 수사에 대해서 분개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요. 표적 수사를 옹호하는 것도 아닙니다. 국민을 개로 취급하는 지도자는 절대로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요. 다만 수능수시제도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영향을 받는 가능성을 우려한 것입니다. 오해 없어셨으면 좋겠고요. 지적하신 부분도 깊이 공감합니다.

독만권서행만리로 2022-01-25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호병?! 반갑습니다.

저는 사단 통신대대 암호병였습니다. 전역한지 약 20년 정도 되는데... 선생님은 더 되셨겠죠? 본디 연대소속였지만 다루는 분야가 분야인지라 병사들한테 맡겨놓기 불안하다고 사단에 모두 모여서 생활했죠. 그러다가 규칙이 바껴 말년에 다시 연대로 쫓겨?났습니다만ㅠㅠ(연대가 아무래도 열악한지라... 그래도 좋은 중대장 만나 말년 그리 힘들지 않게 보냈던 거 같습니다)

암호실 안에서 자정 넘어가면 불끄고 의자 2,3개 연결해서 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네요. 말씀처럼 암호관련 권한이 없으면 암호실로 누구든 들어올 수가 없으니^^;; 봉지라면도 수시로 끓여먹고, 고참이 cd로 구워온 영화도 노트북을 통해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중대장이 우리 암호병들을 미워했습니다. 뭔가 구린내는 나는 거 같은데 확인할 길이 없으니ㅋㅋ 기본적으로 중대장과 암호관 사이가 좋지 않았죠.(기싸움이랄까...) 그 결과 암호병들은 정기휴가를 제외하곤 어떤 휴가도 받을 수 없었다는...OTL

다만, 밀폐된 공간이다 보니 고참들의 폭력이 없지 않았죠. 그래도 운좋게 입대할 때쯤에는 군전반적으로 구타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는 시점이라 제가 입대하기 고작 1~2년전과 비교를 해도 많이 나아진 모양이더라구요.

이런 저런 이유로 군생활 적응을 상당히^^;; 못한 편인데도, 지나고보니 그것도 모두 추억이 되어 있네요. 선생님의 글과 별상관이 없는 내용인데 괜스레 반가워서 그만 주절주절 했습니다. ^^::

박균호 2022-01-25 19:12   좋아요 0 | URL
아..저와 세대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참 반갑네요. 암호병이 아닌 병과들은 암호병들이 짱박혀서(?) 잠만 잔다고 잠호실 이라고 불렀네요 ...ㅎㅎ 암호병이 은근히 스트레스가 많은 병과인데 고생 많으셨네요. 여아튼 거듭 참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