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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헌책과 희귀본 수집 이야기를 다룬 <오래된 새 책>을 냈다고 해서 그쪽 전문가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 가끔 헌책이나 희귀본에 대한 의뢰가 들어온다.
오래된 도서관을 정리하면서 버려야 할 책과 소장해야 할 책을 구분하는 일이라든가(결국 이 책을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기는 한다) 읽고 싶은데 절판이 돼서 구하지 못하는 책을 구해달라는 부탁(어떻게 알았는지 생면부지의 사람이 내 친구도 모르는 직장 사무실로 전화가 오는 경우도 있다)도 자주 받고, 고객이 새 책 가격의 두 세배를 주고서라도 구해달라는 책을 나에게 알아봐 달라는 책방 주인의 요청도 있다.
나는 그냥 시골 학교 선생인데 이런 부탁을 받으면 어이가 없기는 한데 남의 부탁을 거절 못하는 천성과 그 자체의 즐거움 때문에 열심히 알아보는 편이다. 또 내가 모르는 희귀본을 알게 되고 구한 김에 내 몫도 별도로 사는 경우가 많다. 아주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언젠가 <anal.realism> 즉 우리말로는 후장(변을 보는 그 후장 맞다) 사실 주의라는 발칙한 제목의 동인지를 구해달라는 의뢰인이 있었다. 제목이 제목인 만큼 내용도 스펙터클 하겠거니 기대를 하면서 열심히 수소문을 했지만 결국 내 힘으로는 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만나게 되었다. 별 수 없이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기관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내 것으로 만들 수 없으니 그 내용이라도 읽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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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검색한 바로는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에서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 딱 한 곳인데 다름 아닌 딸아이가 다니는 서강대학고 로욜라 도서관이다. 음, 보수적인 것으로 유명한 가톨릭 재단 학교에서 이런 발칙한 책을? 요상한 일이긴 하다. 자유로운 학풍의 일환인가?
어쨌든 딸아이에게 이 책을 대출을 하게 해서 복사를 하게 할 것인지 그냥 읽기만 할 것인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다소 걱정스러운 것은 당시 신입생이었던 딸아이는 자기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 적도, 빌리는 방법도 모를 것(두 달 뒤에 3학년이 되는 지금도 마찬 가지일 확률이 높다)이 분명했다. 내 딸아이는 고지식하고 보수적이다. 그 아이에게 ‘후장 사실주의’를 아빠 대신 빌려서 복사를 한다는 부탁을 하는 것은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손이 닿지 않는 가지에 달린 홍시를 바라보는 것처럼 침을 흘리고 있다가 얼마 뒤에 어처구니없게도 쉽게 그 책을 손에 넣었다. 어쨌든 그 일 이후로 서강대학교 도서관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는데 더 재미있게도 이 도서관이 내가 낸 책을 꼼꼼히 잽싸게 수집을 하고 있었다. 내 책이 나오자마자 예약 구매를 한 것이나 다름없이 빠르게 입고를 하고 있었다. 내가 유명작가도 아니고 내 책이 베스트셀러도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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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도서관의 이 지독한 마이너틱한 취향을 보고 적잖이 신기해하지 않는데 오늘 그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내 신간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을 ‘구입중’이란다. 조금 과장하면 내 페이스북 친구나 알라디너 말고는 이 책이 나온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데 서강대학교 도서관 직원은 대체 누구기에 어떻게 알고 이 책을 구입하려는 것일까.
페이스북도 글 쓰는 것도 접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이 무슨 신기한 일인지 모르겠다. 혹시 내 알라디너 친구 중에서 서강대학교 도서관 직원이 있다면 알려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커피 한 잔 대접하겠다. 아니다. 만찬 정도는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