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순이 언니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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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희망이 끔찍한 걸로 변하는 순간은

희망이 미래의 뒷문을 삐끔 열고 현재라는 좁은 방에 들어섰을 때이다.

그리고 그 순간 희망이라는 것은 사라진다.

그것이 미래에 위치해있지 않은 이상 이미 희망이라고 명명되어 질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희망이 끔찍하다니 그리고 구차하다니...

작가를 믿을 수 없고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이 의심스럽다.


책의 줄거리는 봉순이 언니의 순탄치 못한 일대기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 자체는 왠지 별 감흥이 없다.

사람의 일생이란 어느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역경과 어려움을 경험하며

누가 누구보다 덜하고 못하고는 측정하거나 비교할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들의 혹은 여러분의 아픔과 고뇌와 역경을 믿는다. 그러나 나의 것을 내 스스로가 비웃거나 무시하며 살기 때문에 타인의 그것들에도 위로하거나 동정하고 싶지 않다. 난 단지 여러분의 “감정”-아픔을 믿을 뿐이다.)

즉 어떤이의 불행한 이야기라는 줄거리는 흔한 이야기이다.

그럼 이 흔한 이야기에서 작가가 말하려는 것과 독자가 받는 정서와 감흥이 무엇일까.

나는 책 중간정도에서

봉순이 언니는 바보네... 라는 생각을 했고

그 순간 봉순이라는 이름이 병신이란 단어를 유추케하는 의도적 작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의심한다 - 작가는 자기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없으며 그 캐릭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어떤 진실같은것도 없을 거라는....

봉순이 언니가 세탁소 사내와 헤어져 중절 수술을 했을때

주인공은 그녀와의 조화가 깨어진 것-타인이 되었음을 느꼈다고 했지만

주인공은 봉순이 언니에게서 한솥밥을 먹는 식솔로서의 물리적 친밀감을 느꼈을지언정

처음부터 마지막 지하철 이별장면까지 애정이나 연대감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주인공 짱아가 영민한 꼬맹이 설정이라는 자체가 그 사실을 말해준다.

봉순이 언니라는 캐릭터가 마지막에서 품었을 희망은

(작가가 말하거나 혹은 독자들이 과잉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희망과는 다른 아주 단순한 종류의 것이다.

그래서 성인이 된 짱아는 자신에게로 향한 봉순이 언니의 그것을 끔찍하고 구차하게 느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소설이 “희망에 대한 해석이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고

결국 남는게 없는, 말로 떠들어 공중에 흩어져 버리는게 자연스러운 수다거리를

종이에 옮겼을 뿐인 것이다.

인생 철학 혹은 문장의 독창성이나 표현의 참신함 같은 것도 맛볼 수 없었던 이 소설은

내가 아끼는 동생으로부터 선물받은게 아니라면 몇장 읽지도 않고 덮어 놓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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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04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무얼 보고 이걸 느낌표 도서로 선정한 건지 모르겠어요-_-;;
 
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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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작년 월드컵에서 4강을 했을때는 놀라움때문에 관심을 가졌었다.
히딩크 감독(역시 관심없어서 여전히 성만 알지 이름도 모른다.)에 대한 언론의 평가중 가장 내 눈에 띄는 것은,
"학연과 지연등에 얽매이지 않고 실력으로만 출전 선수를 선발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라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한국 스포츠계가 어땠을지 짐작이 되는 저런 멘트를, 반성하는 기미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비리가 당연한듯 방송해대는 한국언론의 뻔뻔스러움과 무신경에 대해선 두손두발 다 들었다.)
여하간에 , 박노자의 이 책이 주목을 끄는 요소는 사실 그 문체, 내용, 한국사에 대한 저자의 해박함 보다는
어떤 특정한 사고방식, 의견과 생각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고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저자가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던 배경을, 내 입장에선 두 가지 정도로 본다.
하나는, 진실과 불의를 마음과 몸으로 느낄 줄 아는 저자의 도덕과 양심이고
다른 하나는 저자가 한국에 어떤 연고나 지연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홍세화씨는 서평에서 "이방인의 눈을 가졌으나.."라고 말했는데, 나는 이 문장에 피식하고 웃었다.
이방인의 눈을 가져야만 한국 사회의 황당함을 보고 깨닫고 캐내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국내에도 그런 인물은 많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과거의 군부독재하에서야 목숨부지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내키지 않는 너그러움으로 봐주더라도) 대통령을 국민의 직접투표로 뽑는 1990년대 이후에도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외침과 실천을 대할 수 있는 장면은 별로 없었다.
저자는 "한국을 사랑하지만 떠나야 한다는.."것을 고백하고 있다.
난 개인적으로 저 말에 무척 동감이 갔다. 그리고 저자는 한국국적을 취득한 채 노르웨이로 갔다. 그 역시 아무런 연고가 한국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하면 주위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거나 말리는데 대부분 [연고]의 이유를 댔다. 정말 고루하고 갑갑하다. 그 숨막힘은,
이 책에서 지적한 모든 전근대적 체제가, 이 빌어먹을 놈의 단일민족 국가에서는 전복될 가능성이 너무 요원하다는 절망만 내 안에서 더 커져가게 할 뿐이었다.
살기 좋은 사회는, 구성원 하나하나의 마음, 머리, 행동이 만들어 나갈수 있다고 본다.
체제나 제도는 그 구성원들의 결정과 실천을 돕는 수단이나 전략일뿐이지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추스릴 수 있는, 그리하여 자율적이고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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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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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들이 진지하게 쓴글을 접할수 있는 기회는 같은 학급 친구간에도 하늘에 별따기.
이러는 와중 다른 친구의 글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 이 때 받은 충격으로 생전 글쓰기에 대한 애정은
경외로 바뀌면서 저 너머 기억의 다락방으로 쳐박혀 평생 먼지만 뒤집어 쓸 상황으로 돌변. ㅠ.ㅠ
그 친구의 글은 너무 독창적이고 아름다왔던 것이다.
그리고 내 글들은 너무 건조하여 어떠한 감성도 묻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까지 내 글에 대한 교사들의 칭찬은 구라였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스며드는 배신감.
이후 10대를 지나 20대에는 문학이 도저히 읽히지 않는다. 당연히 쓰는것도...
문학은 너무 어수선하다? 사람에 대해 여전히 할 얘기들이 그리 많단 말인가.
하늘아래 더이상 새로운게 있겠느냐.
이제서야 스스로 그 이유를 밝혀냈는데, 난 너무 건조해졌던 것이다.
그런 내가 다시 찾아 읽기 시작한 문학의 장르는 "앙티 로망"
(뭐 그렇다고 이 책외에 다른 앙티 로망은 읽은게 없다.)
속물적 근성으로 피터 정을 동경하면서 그가 좋아한다는 작품을 그의 소개를 읽고 구입해버린 것이다.
이 작품과 작가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책 자체에 소개되어 있는 역자 민희식 교수의 해석이 전부이다.
책의 말미로 가면서 느끼는 새로움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전율이다.
문학을 읽으면서 그렇게나 지겨워하던 작가와 인물의 너저분한 주절거림은 철저히 배재되고
오로지 행위와 시간과 대화만이 사건에 대한 객관적 상황을 보여준다.
이것이야말로 오랫동안 내가 찾아 헤매던 읽고 싶었던 글이 아니던가.
내 건조함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글에 대한 희망을 준다.
장르 "앙티 로망"이 가리키는대로 이것은 문학이 아니라
형사들이 쓰는 보고서에 그칠수도 있지만, 거기에서 뭔가를 찾아내는 것은 천만개나 되는 독자 각각의 개성이다.
혹은 찾아내지 않아도 된다.
고루한 인간 정서를 표현한 흔한 수사에 질린 독자들은 한번쯤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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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
잉게보르크 바하만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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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모르겠다.
그가 수술을 마치고 깨어났을 때 왜 그는 살기를 원하게 되었는지,
이전에 그의 사상과 육체는 무엇으로 그를 심란하게 하였는지를 말이다.
정말 단순히 나이때문이었단 말인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어떤 광고의 카피처럼 이제는 자신이 30세라는것만 받아들이면 그에게는 다른 고뇌는 없거나 작은것으로 화해버릴수 있었단 말인가..

그러면 내가 끝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다녔던 몰은 문제가 되지 않았단 말인가
나이 30세에 그의 주위에서 갑자기 몰이 사라졌거나 아니면 몰도 이해를 할수 있거나, 아니면 몰이 있더라도 신경쓰지 않을수 있게 되었단 말인가, 그의 내부에서 몰이 사라졌단 말인가..

나는 몰에게 둘러싸여 몰의 모습을 한 나지만 나를 신뢰한다 그리고 몰을 증오한다..
몰은 여전히 두통거리다.
내가 죽을때까지 몰과의 인연을 끊을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 끈을 끊기위해 노력할 것이다.
발버둥칠 것이다.
그리고 끊을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과 끊어지지 않는것때문에 매우 괴로워할 것이다.
그러나 내 안의 몰을 죽이기 위해 나 자신을 먼저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왠지 나는 이해를 못하겠다.
왠지 나는 그가 이상한 현실을 또 하나 만들어 그 속으로 녹아들려고 하는 것 같다.
아니면 혹시 바하만은 비유가 아닌 반어를 했던 것일까...
아아 나는 모르겠다... 바보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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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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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가끔 어떤 사람들이 [변신]을 읽었느냐고 물어 온적이 몇번 있는데, 그때마다 난 안읽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10년도 더 이전 충분한 이해는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성]을 쓴 작가의 유명한 작품을 읽지 않은것에 대해 카프카에게 매우 미안한 마음이 들곤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난 그 유명한 작품 [변신]을 읽었다.  성격이 비뚤어진 나로서는 변신을 손에 들자마자(다 읽지도 않고) 왜 이 작품이 그렇게 유명했는지 이해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짧은 소설 [변신]은 읽었으나, 길고 막막한 내용의 [성]엔 손을 대지 않았고, 당연히 그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는 내용엔 [성]이 제외되었던 것이며 그리하여 [성]보다 [변신]이 더 유명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책을 덮고 나서 [변신]을 먼저 읽지 않고 [성]을 먼저 읽은것에 대해 카프카는 나에게 칭찬을 해줘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숙인 고개를 약간은 들수 있게 되었다.  [변신] 한 작품 혹은 이것과 다른 단편들만으로는 카프카 문학에서 드러나는 “막막함”을 이해할수 없다.  단편 소설에 있어서는 “막막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그의 “막막하고 아득함”은 계속 제자리로 돌아오면서도 달라질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 반복적으로 좌절되는-제자리에서 돌아가는 쳇바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장편에서야 진정으로 소설의 “주제”로서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여하간 지금은 [변신]의 독후감을 쓰기로 한다.

  어느 시대에나 특히,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가장이 자기 역할을 이행함에 있어서, 그가 아무리 성실했더라도 결과가 실패하면 지나친 비난을 받았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실패한 결과”를 얘기함에 있어 과정이 성실했다는 전제조건을 말이다.  즉, 성실하지 못했다면 남녀노소 구별없이 그 어긋난 결과는 비난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가장은 그 가정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키기 위해 그자신-개인을 희생한다.  그리고 그가 희생되고 있다는 것을 대부분 다른 가족이나 타인들은 눈치채지 못한다.  도대체 그들은 무슨 권리로!!  그리고 가장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또 가장 대부분은 자신의 의무를 다하느라 정신없어서 자신이 희생을 당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다.  내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그 잘난 유행소설 [아버지]를 읽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책의 표지도 들춰본적 없는 소설이다.  그리고 읽고 싶지도 않다.  뻔하지 않은가, IMF의 폭풍속에 표류하는 한국의 1990년대에 [아버지]라는 제목을 달고 히트해버린 소설은 하나의 조잡한 상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확률이 많다는것이라는 것 말이다. 

  그레고르는 더없이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으나, 이기적인 피부양자들은 그를 벌레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아버지의 파산이후 가족들이 궁핍하지 않게 지낼 돈을 벌어다 줬으나 가족들 마음속에서 고마움은 사라지고 테이블 위에 놓여지는 충분한 돈은 그저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는 집안의 빚을 갚으려고 했고 누이를 음악학교에 보내려고 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선 아무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들 역시도 그에 대해선 아무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벌레가 되어 하찮게 죽든, 죽어라고 일을 하다가 죽든 그 죽음이 서로 뭐가 다른가. 

  내가 더 기가 막혔던 것은, 그가 벌레가 되면 가족들도 힘없이 죽어가겠지 했는데, 오히려 각자가 삶의 활력을 찾았다는 것이다.  결국 처음부터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사악한 가족은 그것을 알게 되는 대가로 가장의 목숨을 대신 내주었던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때문에 난 분노했다.  그리고 자신의 핏줄을 부정하여 마음이 편해지려는 사악함에 또 분노했다.  그리고 가장 믿었던 존재인 누이가 가장 먼저 그를 포기하자고 했던 것에서는 역시나 인류로부터 어떤 희망도 품을수 없음을 슬퍼했다.  그리고 그 “희망없음”이 단지 “소설”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로 그치는게 아니라, 실제 내가 겪어왔던 현실과 일치한다는게 그야말로 막막하고 암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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