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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범의 구속취소 판결이 났다.

이 내란범은 헌법재판소를 오갈 때 감시도 받지 않고 캐딜락으로 오갔다.

오랜 세월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던 운동가와 정치가들의 인권은 묵살하던 법원이

지랄개병에 걸린 악독한 내란범에겐 온갖 절차적 인권적 대우를 아끼지 않고 있다.


무식한 장군들과 장관들은 법을 '몰랐다'고 발뺌하기 바쁘며

언론은 내란청산을 뜨뜻미지근하게 만들려고 몰아간다.


저 따위 모든 어이없고 악독한 일들이 헌법의 이름아래 행하여 지고 있다.

의사표현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 인권의 존중과 보호 등등

이 모든 권리와 자유는 민주주의 공화국 질서를 위해서 필요하다.

나는 국민화합과 소통 및 의견 다양성의 보호를 위해 "관용"을 중요시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내란청산을 하는 절차와 정도에 있어 관용은 필요하지 않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몰랐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하면 안된다. 민주주의 시민은 질서를 알아야하고, 논의해야하고, 성찰할 의무가 있다. 특히 책임자나 리더의 자리에 있다면 이 의무는 더욱 무겁게 져야 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녹봉을 받아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리에 있는 이 놈들이 뻔뻔하게 몰랐다고 한다면, 그동안 받은 녹봉의 일부나 전부를 토해내는 것이 국민에게 지불하는 위자료일 것이다.


해방 후 일제친일청산이 실패하자 매국노들은 엄청난 재산과 권력으로 우리 대한민국의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였고, 그 결과 국민의 영혼과 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괴물이 되었다.


친일매국노와 내란세력에게는 관용이 필요없다. 아래는 최근 읽은 책에서 밑줄 그은 대목이다. "관용"이라는 미덕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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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은 일정한 테두리 즉, 관용 자체의 보호가 가능한 테두리 안에서만 가치를 가진다. 칼 포퍼는 그것을 관용의 역설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약 무지막지한 사람들에게조차 절대적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면 사회는 그들의 공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러면 관용의 사람들은 절멸될 것이며, 당연한 결과로서 관용도 그들과 함께 절멸될 것이다.


체제가 허약해서 내란의 위협이 있거나 내란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또 반역적인 집단이 권력을 장악할 징조를 보인다면, 같은 시위라도 상당히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때에는 시위를 금해야 하며, 무력을 통해서라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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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Netflix 시리즈



매튜 매커너히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영화도 재미 있었지만 매튜의 연기에도 매료 되었다.
여하간에 주말을 게으르게 보내고 있는 나는 머리가 멍해서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드라마를 보려고 Netflix를 뒤졌다. 동명의 시리즈물이 있었다. 평가도 좋은 것으로 안내되어 있기에 시즌1 에피소드 몇 편을 시청을 한 결과 재미는 있었지만 유치한 부분이 많다. 
이 드라마의 장르는 일본식 만화나 게임 분류에 따르면 남자 변호사의 하렘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 주인공 주변에 여러 아름다운 여자들이 있고 이 여자들이 주인공 변호사를 돕는 좋은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시마과장의 컨셉을 표절한 범죄수사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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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DTS-ES 3disc)
봉준호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잘 들 살아"

최근 1, 2년동안 난 [예민함]이라는 단어에 상당히 집착해있다.
이 단어는 이기적인 종류의 사람에게서는 "신경질"로 표출되지만, 당연하게도
깊이있는 사람에게는 이해와 연민, 책임감을 자신의 내부에 배가시키게 한다.
그래서 영화 초반부의 자살하는 사업가의 대사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잘 들 살아"는 내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을거라는 암시였다.
영화의 소재는 괴물이었지만, 감독은 현재 이 순간의 한국사회의 초상을 스크린에 그렸고
그것도 얄미울 정도의 예민한 스케치로 영화의 각 장면마다 감탄할만한 솜씨를 보여준다.


[왜 "한국"사회인가]
한강(강, 다리, 매점, 컵라면과 오징어), 핸드폰, 활, 화염병, 장례식장,

["말"하는 영화]
뜻하지 않게 1년에 한 번 이상씩은 한강 시민공원에 가보게되었다.
몇 년 동안 나는 한강의 풍경에서 (내 감정에는 와.닿.지. 않.는.) 쓸쓸함과 허무를 느낀다.
두 세번씩 가본 놀이 공원과 덕수궁 돌담길에서 억지로 낭만을 느끼는 것이 연애방법의 전부이고
그것도 심드렁해져서 이제는 한강가까지 와 있는 커플.
맞벌이에 쫓기면서도 단란한 가정인척해야 하는 피곤한 부모의 아이들을 동반하여 가까운 곳이라 겨우 나올수 있었던 한강 나들이.
보이스카웃의 경험과 세계경찰 의식으로 무장되어 강두와 한편에서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성실하고 선하고 단순한 부루투스 - 미군 하사.
손톱이 이뻐보이기만 한다면야 손톱에 낀 더러운 때도 일상처럼 여기며 자연스레 제거하는 (마음만 깨끗하면 되니 클래식음악으로 정화하면 되나....) 헤드폰녀.
강두에게서 희봉으로 손님에게로 지저분하게 굴러다니는 동전(돈).
끝없는 욕망이 그 한계를 넘어 퇴폐의 영역까지 두루 훑어 최종적으로 자가소멸하도록 인간이 만든 이데올로기중 가장 전염성이 강한 자본주의, 그것은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고향을 떠나 돈을 좇도록 등을 떠밀려 한강공원에, 휴일에 갈 데 없는 동남아 근로자들의 초상을 그려 놓는다.
괴물을 발견하고 맥주쟁반을 들고 있는 강두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의 구성을 보라, 정말 감탄스럽다.

이런 묘사들은
1. 감정없는 과학자의 정확하고 훌륭한 고증
또는
2. 고뇌하는 섬세한 철학가의 명료한 문제의식
이 저변에 깔려있지 않으면 연출되기 어렵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우연이다.
그리고 이 셋을 구분하는데에 주저하지 않게 되는 것은 영화 상영 시간내내 그 답이 있기 때문이었다.
올해도 한강 공원에서 돗자리 깔고 맥주와 오징어를 뜯었던 나는 영화의 그 장면들이 사실과 너무 흡사한데서
그리하여 내가 느꼈던 쓸쓸함이 너무 정확하게 표현된 것에 대해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범하고 솔직한 영화]
영화제작엔 대자본이 투입되었다. 전체 제작비 약 100억원, 그 중에 괴물CG제작비 약 40억원.
이쯤되면 보통 영화에서는 제작비 투입을 과시하느라 괴물의 전체 모습은
영화 종료 10분전에야 구경할 수 있다.(CG가 사용되지는 않았겠지만 에일리언은 면죄부 발부하겠다.)
어렸을때부터 클라이막스까지 질질 끌려가는 플롯, 감질나는 연출의 공포영화등엔 취향이 아니었다.
찔끔찔끔 내지는 쫄딱쫄딱 효과가 빛을 발할 수 있는 분야는 오로지 "스트립쇼"가 아니던가.
그러나 바라던대로 괴물은 영화 초반에 홀딱 벗었다.

남일을 통해 화염병의 추억-"내 손으로 직접"-을 그리면서도
현재의 데모대가 강두를 "영웅"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것을 질타하기도 한다.

"솔직함"에 이웃하고 있는 "노골적"인 설정이나 장면에서도 유머까지 동반하여 불편함 없이 통쾌할 수 있었다.
기발한 작명 - "에이전트 옐로우"!
까메오로 출연한 아나운서의 시치미떼고 하는 심각한 멘트.
미국과 국제기구의 유별남, 무능함, 음흉함을 노골적으로 비웃으면서 동시에 결코 비열함이 풍기지 않는 분위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봉감독 그는 진정으로 선수다.


[겸손한 영화]
영화는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를, 영화 스토리 라인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동시에 관객이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교묘하게 배치한다.
그 모습들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루면 제작진이나 관객 서로가 소화하기 힘들고 뻘쭘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감독의 전략인것 같다.
그 문제들은 그 중 한 가지만 가지고도 영화 한 편이나 소설 한 편을 써낼 수 있는 문제거리들이다.

장례식장 : 시간에 쫓기며 사는 가족들은 한 구성원의 "죽음"이나 있어야 한자리에 모이고,
엄숙한 장소에서 남주를 툭 치고 지나가며 의식도 못하는 무례함이 있고,
슬픔에 빠졌으면서도 희봉가족이 일으키는 소란스러움에 대한 주위의 천박한 호기심이 행동을 지배하고,
사람들의 떼죽음에 아무런 감정없이 오로지 시청률에만 급급한 취재진이 있고,
와중에도 기관의 권력을 내세우며 대중을 하수로 보는 "손 번쩍"이 있고,
그 권력은 알맹이는 전혀 없어 문제가 뭔지 몰라 텔레비전으로 대신 때우려는 무지함이 있고,
높은 사람들의 행차에는 슬픔으로 뒤범벅된 상주들의 길 열어주는 행사가 있다.

믿었던 같은 운동권 출신 선배는 예상외로 타도의 대상이던 업체에 취직을 하고
그러면서도 세금을 탓하며 결국은 후배를 팔아먹을 생각을 한다.

수배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방송뉴스를 보며 이제는 너무 만연화되어 특징이 없는 구성원 - 4년제 졸업 백수를 가족들은 정겹게 놀린다.

현서가 동굴에서 앓고 누워있는 세주에게 힘이 될만한 존재들이라 생각하여
다 데리고 오겠다던 의사,119,경찰,군인....들은
한편에서 "내말도 말인데 제발 들어줘.  왜 자꾸 내 말을  잘라."라고 강두가 외치는 "힘 없고 논리적이지 못"하나 현서가 살아 있다는 "진실의 말"을 무시하며 각잡고 있다.
그리고 대국민 방송에서는 "피해자니까 편의를 제공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협조를..."이라는 보도를 내보내며 민중의 지팡이라는 자들이,
서로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연인들처럼 이편과 저편에 멀리 떨어져 있다.
실은 가까이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고 있다. - 강두가 수술실을 탈출해서 어렵게 출구에 손을 대 문을 열자마자 보게 된 그 장면이다.
방송에서 프라이버시를 보호한다던 음성변조는 남일이 "나 저년 알아." - 주위 사람들은 다 아는 하나마나한 장치이고
그래서 뉴스를 놓고 강두와 세주는 "밥먹는데 잼없다, 끄자."면서 사람을 게으르게 만드는 기술의 상징인 리모콘을 찾다가 포기하고 발가락으로 텔레비전을 끈다.

위의 장면들과 더불어 유기농이 부자들의 웰빙 스타일로 전락한 것을 꼬집는 거나,
서리는 배고픈자의 특권이라는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을 세주형을 통해 자연스레 나열하는
- 이렇게 정신없이 많은 것을 얘기하는 장면들이 괴물을 소재로하는 SF영화에서 왜소한 대사와 장면으로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아마도 이 많은 것을 버거워하는 나를 위해 배려된 연출이다.


[유머있고 따뜻한 영화]
강두가 저녁을 차리는 동안 세주가 자는척 하는 장면을 저만큼 따뜻하고 예쁘고 유머있게 연출해 낼 수 있는 심성에 무한한 애정이 간다.
승리의 활을 쏘고 돌아서는 남주의 머리 흩날리는 모습을 왼쪽 코너에 조그많게 몰아넣는 익살스러움,
강변에 쓰러진 아버지한테 어찌하지 못하고 어이없이 돌아오는 강두.
탈출한 가족이 매점에서 컵라면 먹을때 귀신처럼 나타난 현서가 음식을 받아먹는 장면은
공포가 따뜻함으로 전환되는 의외성을 띄는 독특한 영화언어이다.

"가족애"에 대한 정의가 확장되는 장면은 무엇보다 인상깊다.
강두가 의식을 회복하는 세주에게 눈물을 삼키며 묻는다. "너 현서 알아? 누구니, 같이 있었니?"
- 얼굴을 아는
- 누군가와
- 함께했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모두 가족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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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를 마시는 괴물의 상징이나 에이전트 오렌지를 패러디한 에이전트 옐로우 혹은 포르말린의 한강방류 장면으로
반미적이다 뭐다하는 분석은 "분석"이 아니라 "사실"이며
그것을 놓고 영화의 촌스러움을 말하기보다는
한국 사회를 살아오면서 조금이라도 예민한 구석이 있다면
영화에서 한 장면 쯤은 경험과 부합하여 "그랬었지" 라고 공감하는게 맘 편한 감상이다.
나같은 경우는 마치 봉빠이기라도 한 것처럼 지나치게 시선을 확장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다.
독감 바이러스가 만연한 도시에서 침뱉은 물이 나에게 튀기지 않을까하는 것보다 더 예민하게
평온한 일상에서도 사회의 온당하지 않은 모습들이 바이러스보다 더 자연스레 만연해있는 것을 불쾌하게 느끼고 있었는데
영화가 장면마다 그것을 집어내버렸으니 말이다.

감독은 [둔해빠진 새끼들]을 미워하지만 둔해빠진 강두가 주인공이다.
그래서 오징어 굽는것과 가스버너를 아버지 희봉이 환상의 타이밍으로 사고를 추스리며 고생한다.
그런 강두가 밉지 않은 이유는 둔한 강두임에도 딸 현서의 책배낭이 무거울까봐 자연스레 받쳐들고 뒤를 졸졸 따르는 모습이 영화 마지막에 예민해지는 아빠가 될 떡잎이었기 때문이었을까나 어쨌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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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 치는 밤에
스기이 기사브로 감독 / 대원DVD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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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리뷰랄 것도 없습니다.
1. 늑대 매니아 관람요
2. 지브리와 곤조외 다른 재패니메이션 관심관객 관람요
3. 수준높은 사고의 아동들 관람가
4. 동인녀 관람필!
되시겠습니다.


이 아동용 애니를 반드시 보기로 결심한게
저 그림과 포스터의 문구-에서 생각나버린
시신덴님들의 찰스다윈에 끼워넣어진 늑대와 양(염소가 아닌) 에피소드때문입니다.

저 두 녀석은 수컷인데요, 늑대 가브가 심하게 마초형인거야 그렇다치고
염소인 메이녀석의 생김새는 반칙입니다.
이 애니의 흥행 성적은 알 수 없지만 만약 별볼일 없었다면
기획부터가 헷갈리고 타겟이 엉뚱하게 설정되었기 때문일거라고 봅니다.

겉으로 스토리만 봅시다. - 로미오와 줄리엣의 동물버전으로 진부하지않습니까.
주제를 봅시다. - 개나 소나 늑대나 염소나 다 아는 박애주의로 진부하지않습니까.
근데 꼬맹이들을 타겟으로 우정에 대한 그리고, 차이의 수용에 대한 교육때문에
스토리에서 주인공 둘이 함께 목숨을 버리다니, 애들이 감당하기 벅차지 않습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애니는
동인녀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릴 수 밖에없는 마이너의 운명인것입니다.

메이같이 상황의 모든 원인과 책임을 상대에게 아무생각없이 맡겨버리는 타잎
개인적으로 왕짜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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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UE - [할인행사]
로만 폴란스키 감독 / 스타맥스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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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완성도이다.  그러나 이게 쉽지 않은 것이, 좋은 작품인지 아닌지는 보고난 후에나 알 수 있는 것이고, 보려고 할 때도 몇안되는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의 영화를 제외하면 고르기 어려운 편이어서, 난 영화평을 믿지는 않지만 많이 참고한다.  왜냐하면 영화평을 보고나면 대충 감이 오기 때문이다.  호평이나 혹평에 관계없이, 평문을 읽으면 그 영화가 내가 좋아할 영화인지 아닌지가 머리에 꽂힌다.

  그런데 [피아니스트]의 하고 많은 평 중에 구태의연한걸 너무 싫어하는 내가 처음 본건 저 문구다. ;
해외 평단은 ‘피아니스트’를 ‘지극히 진부한 영화’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등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반복"이라니...  짜장면 먹다가 바퀴벌레 발견한 것처럼 흥미를 잃었다.(여담이지만, 바퀴벌레가 나오면 흥미를 잃을 뿐이지 난 남은 짜장면은 다 먹는다.  -,.-)  하지만, 남로당 어떤 당원에게 보겠노라 선서를 했고, 첨 만났을때부터 문화감각을 높게 샀던 초록이의 추천도 있고 하여 보게 되었다.  그녀가 추천한건 어지간해서는 실망을 거의 안하는데, 실제 10년이 넘도록 실망한 적은 한번도 없다.
  여하간 저 비평은 옳다.  좀 비꼬아서 말하자면, 세계 경제의 중추를 구성하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경제적 부를 어쩌면 "나치 학살 고발"에 충분히 이용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묻고 싶다. "그래서...?..."라고.  여기서 이렇게 대답하진 말자.-"과거를 거울 삼아 다시는 이같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역사는 만들지 말자"라고 말이다.  썰렁하고 진부하다.  이 당연한 최우선 명제는 그 중요성이 두번 말하면 입아프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이 비평가의 관점은 좀 빗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이 영화는 "학살 고발 영화"가 아니었다.(이야기는 실화다.)  영화는 피아니스트였던 한 사람의 이야기다.  사람의 내면에서 느끼는 이름없는 감성들을 보여주고, 생의 몇년간의 긴 호흡과 또 찰나적 순간의 강렬함과 애잔함을 표현하는 영화다.  저 해외 비평가들이 말한것같이 이 영화의 "학살"이라는 소재가 폴란스키 감독의 솜씨를 깎아내리는 요소는 절대 되지 못한다.

  내가 어렸던(=어리석었던)시절 "구차함"이라는 단어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었음을 오늘 여기에 고백한다.  어렸을때는 구차하게 느껴졌을, 주인공이 살아남기 위해 했던 모든 행동들은 나에겐 아름답게 보였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인간의 본능이었다.  또 다행스럽게도 스필만에게는 그가 당할지언정, 그가 살아남기 위해 "대신" 남을 희생시켜야 하는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운이 좋았던거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양심을 판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도망쳤고, 거리의 시체를 보고 울 여유가 없었고, 여러 사람을 걱정시키며 숨어 다녀야 했고, 굶었고, 병들어 죽을뻔 했고, 화염에 무너지는 독일군 병원 건물을 헤쳐나와야 했고, 고독에 몸서리 쳤고 몸을 심하게 다쳤으며 독일장교 군복 때문에 아군에게 총을 맞아 또 다시 목숨을 잃을뻔 했다.

  원치 않는 고난을 겪는 그가 살아남기 위한 행동을 해야만 했던 "하기 싫어도 해야하는 행위"와 "하고 싶은 행위"-피아노 연주가, 비극적으로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의 아득함과 혼재한 순간 - 폐허에서 독일장교 호센펠트와 맞닥뜨리는 숨막히는 순간은, 독일군들이 후퇴하면서 도시를 화염속에 던져넣는 장소를 피해 높은 담을 넘어 눈앞에 펼쳐진 잿빛의-죽음의-지옥의 세계를 갑자기 대면하는 순간(영화 포스터)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순간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이 순간까지 보여진 모든 사건과 비극은 바로 이 장면을 돋보이게 하기위해 필요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스필만의 피아노 연주속에 담긴 표현 못할 5년여 세월의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비극적인 시간들은 호센펠트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깊이 있으면서도 단호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게 만든다.  그리고 둘은 스스로들이 알지 못한채 친구내지 동지로 맺어진다.  그것은 가장 깊은 연인사이보다 더 강렬한 관계이다.  그래서 나는 포로가 된 호센펠트가 근처를 지나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했던 부탁이 목숨을 건지기 위한 필사적인 행동이기도 했지만 피아니스트를 다시 만나고픈 마음 또한 그만큼의 크기로 필사적이었다고 느꼈다.

  폴란스키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교훈을 준다거나 인간이나 사회문제를 짚어낸다거나 놀라운 플롯을 보여주거나 하는 줄거리 중심의 영화는 아니다.  이 작품은 표현하기 위한 영화이다. 무엇을? - 아름다움을 말이다. ; 피아노, 피아니스트, 찰나, 목숨, 도망, 비극, 아쉬움, 충격, 공포, 관계 등등의 아름다움을 말이다.  그러므로 해서 저 위의 해외 평단의 모욕에서 이 영화는 충분히 자유롭다.

  나는 극장을 찾아가면서 땅위로 나오는 지하철 계단에서 심하게 넘어졌다.  요란하게 구른 것은 아니고 단지 날카로운 계단에 숨이 멎을 정도로 둔탁하고 무겁게 부딪쳤던 것이다.  오른쪽 무릎 관절과 오른쪽 팔꿈치가 움직일때마다 심하게 아파서 신음소리가 낮게 튀어나올 정도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컸기 때문에 어느쪽으로 움직이면 아픈지 혹은 안아픈지도 알아낼수가 없을정도였다.  그래서 스필만이 폐허에서 다쳐 다리를 절 때 나는 몸까지도 같이 공감을 했다.  이 상태로 어두운 극장안을 더듬어 들어가 내가 본 4회 이전 즉, 3회의 마지막 장면을 먼저 보기 시작했다.  커다란 화면에 피아노와 손만 보였다.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가 흐르고 있었다.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고 잠시후 광고를 거쳐 4회를 보고 다시 같은 마지막 연주 장면을 보면서 관람을 마쳤는데, 그 바람에 그날 이 영화는 나자신과 내 시간이 함께 편집한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와는 또 다른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내가 3회 마지막 장면을 보지 않고 4회 처음부터 보기 시작했다면 지금과는 좀 다른 감상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스필만의 고통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다싶을 정도로 차분하게 처리하여 객관적이면서도 리얼함을 획득하게 한 감독의 솜씨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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