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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에는 역사가 있고 그것은 우리 육체에 흔적을 남긴다. 소뿔에 들이받힌 투우사의 상처는 일종의 지식을 나타낸다. 출산 이후 생긴 튼 살은 인간의 몸이 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일들을 상기시킨다. 또한 ‘눈 밖에 났다‘, ‘앓던 이가 빠졌다‘, ‘손을 씻었다‘, ‘입이 무겁다‘와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육체는 은유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수학자 아이작 밀너가 1794년에 남긴 말처럼, 계몽주의 시대의 걱정거리가 "높은 자리에 있는 위대한 자들이 자신들에게 영혼이 있음을 잊은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신들에게 몸이 있음을 잊어버린 것이다. 온라인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신체적 한계에서 벗어나 자아를 표현하고 자신을 추적·수량화할 다양한 방법(오늘 나는 X걸음을 걸었다!)을 갖게 되면서 우리는 신체를 무시하거나 통제할 수 있다는, 아니 최소한 자신의 신체적 특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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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범의 구속취소 판결이 났다.

이 내란범은 헌법재판소를 오갈 때 감시도 받지 않고 캐딜락으로 오갔다.

오랜 세월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던 운동가와 정치가들의 인권은 묵살하던 법원이

지랄개병에 걸린 악독한 내란범에겐 온갖 절차적 인권적 대우를 아끼지 않고 있다.


무식한 장군들과 장관들은 법을 '몰랐다'고 발뺌하기 바쁘며

언론은 내란청산을 뜨뜻미지근하게 만들려고 몰아간다.


저 따위 모든 어이없고 악독한 일들이 헌법의 이름아래 행하여 지고 있다.

의사표현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 인권의 존중과 보호 등등

이 모든 권리와 자유는 민주주의 공화국 질서를 위해서 필요하다.

나는 국민화합과 소통 및 의견 다양성의 보호를 위해 "관용"을 중요시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내란청산을 하는 절차와 정도에 있어 관용은 필요하지 않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몰랐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하면 안된다. 민주주의 시민은 질서를 알아야하고, 논의해야하고, 성찰할 의무가 있다. 특히 책임자나 리더의 자리에 있다면 이 의무는 더욱 무겁게 져야 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녹봉을 받아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리에 있는 이 놈들이 뻔뻔하게 몰랐다고 한다면, 그동안 받은 녹봉의 일부나 전부를 토해내는 것이 국민에게 지불하는 위자료일 것이다.


해방 후 일제친일청산이 실패하자 매국노들은 엄청난 재산과 권력으로 우리 대한민국의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였고, 그 결과 국민의 영혼과 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괴물이 되었다.


친일매국노와 내란세력에게는 관용이 필요없다. 아래는 최근 읽은 책에서 밑줄 그은 대목이다. "관용"이라는 미덕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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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은 일정한 테두리 즉, 관용 자체의 보호가 가능한 테두리 안에서만 가치를 가진다. 칼 포퍼는 그것을 관용의 역설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약 무지막지한 사람들에게조차 절대적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면 사회는 그들의 공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러면 관용의 사람들은 절멸될 것이며, 당연한 결과로서 관용도 그들과 함께 절멸될 것이다.


체제가 허약해서 내란의 위협이 있거나 내란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또 반역적인 집단이 권력을 장악할 징조를 보인다면, 같은 시위라도 상당히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때에는 시위를 금해야 하며, 무력을 통해서라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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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Netflix 시리즈



매튜 매커너히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영화도 재미 있었지만 매튜의 연기에도 매료 되었다.
여하간에 주말을 게으르게 보내고 있는 나는 머리가 멍해서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드라마를 보려고 Netflix를 뒤졌다. 동명의 시리즈물이 있었다. 평가도 좋은 것으로 안내되어 있기에 시즌1 에피소드 몇 편을 시청을 한 결과 재미는 있었지만 유치한 부분이 많다. 
이 드라마의 장르는 일본식 만화나 게임 분류에 따르면 남자 변호사의 하렘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 주인공 주변에 여러 아름다운 여자들이 있고 이 여자들이 주인공 변호사를 돕는 좋은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시마과장의 컨셉을 표절한 범죄수사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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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DTS-ES 3disc)
봉준호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잘 들 살아"

최근 1, 2년동안 난 [예민함]이라는 단어에 상당히 집착해있다.
이 단어는 이기적인 종류의 사람에게서는 "신경질"로 표출되지만, 당연하게도
깊이있는 사람에게는 이해와 연민, 책임감을 자신의 내부에 배가시키게 한다.
그래서 영화 초반부의 자살하는 사업가의 대사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잘 들 살아"는 내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을거라는 암시였다.
영화의 소재는 괴물이었지만, 감독은 현재 이 순간의 한국사회의 초상을 스크린에 그렸고
그것도 얄미울 정도의 예민한 스케치로 영화의 각 장면마다 감탄할만한 솜씨를 보여준다.


[왜 "한국"사회인가]
한강(강, 다리, 매점, 컵라면과 오징어), 핸드폰, 활, 화염병, 장례식장,

["말"하는 영화]
뜻하지 않게 1년에 한 번 이상씩은 한강 시민공원에 가보게되었다.
몇 년 동안 나는 한강의 풍경에서 (내 감정에는 와.닿.지. 않.는.) 쓸쓸함과 허무를 느낀다.
두 세번씩 가본 놀이 공원과 덕수궁 돌담길에서 억지로 낭만을 느끼는 것이 연애방법의 전부이고
그것도 심드렁해져서 이제는 한강가까지 와 있는 커플.
맞벌이에 쫓기면서도 단란한 가정인척해야 하는 피곤한 부모의 아이들을 동반하여 가까운 곳이라 겨우 나올수 있었던 한강 나들이.
보이스카웃의 경험과 세계경찰 의식으로 무장되어 강두와 한편에서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성실하고 선하고 단순한 부루투스 - 미군 하사.
손톱이 이뻐보이기만 한다면야 손톱에 낀 더러운 때도 일상처럼 여기며 자연스레 제거하는 (마음만 깨끗하면 되니 클래식음악으로 정화하면 되나....) 헤드폰녀.
강두에게서 희봉으로 손님에게로 지저분하게 굴러다니는 동전(돈).
끝없는 욕망이 그 한계를 넘어 퇴폐의 영역까지 두루 훑어 최종적으로 자가소멸하도록 인간이 만든 이데올로기중 가장 전염성이 강한 자본주의, 그것은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고향을 떠나 돈을 좇도록 등을 떠밀려 한강공원에, 휴일에 갈 데 없는 동남아 근로자들의 초상을 그려 놓는다.
괴물을 발견하고 맥주쟁반을 들고 있는 강두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의 구성을 보라, 정말 감탄스럽다.

이런 묘사들은
1. 감정없는 과학자의 정확하고 훌륭한 고증
또는
2. 고뇌하는 섬세한 철학가의 명료한 문제의식
이 저변에 깔려있지 않으면 연출되기 어렵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우연이다.
그리고 이 셋을 구분하는데에 주저하지 않게 되는 것은 영화 상영 시간내내 그 답이 있기 때문이었다.
올해도 한강 공원에서 돗자리 깔고 맥주와 오징어를 뜯었던 나는 영화의 그 장면들이 사실과 너무 흡사한데서
그리하여 내가 느꼈던 쓸쓸함이 너무 정확하게 표현된 것에 대해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범하고 솔직한 영화]
영화제작엔 대자본이 투입되었다. 전체 제작비 약 100억원, 그 중에 괴물CG제작비 약 40억원.
이쯤되면 보통 영화에서는 제작비 투입을 과시하느라 괴물의 전체 모습은
영화 종료 10분전에야 구경할 수 있다.(CG가 사용되지는 않았겠지만 에일리언은 면죄부 발부하겠다.)
어렸을때부터 클라이막스까지 질질 끌려가는 플롯, 감질나는 연출의 공포영화등엔 취향이 아니었다.
찔끔찔끔 내지는 쫄딱쫄딱 효과가 빛을 발할 수 있는 분야는 오로지 "스트립쇼"가 아니던가.
그러나 바라던대로 괴물은 영화 초반에 홀딱 벗었다.

남일을 통해 화염병의 추억-"내 손으로 직접"-을 그리면서도
현재의 데모대가 강두를 "영웅"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것을 질타하기도 한다.

"솔직함"에 이웃하고 있는 "노골적"인 설정이나 장면에서도 유머까지 동반하여 불편함 없이 통쾌할 수 있었다.
기발한 작명 - "에이전트 옐로우"!
까메오로 출연한 아나운서의 시치미떼고 하는 심각한 멘트.
미국과 국제기구의 유별남, 무능함, 음흉함을 노골적으로 비웃으면서 동시에 결코 비열함이 풍기지 않는 분위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봉감독 그는 진정으로 선수다.


[겸손한 영화]
영화는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를, 영화 스토리 라인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동시에 관객이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교묘하게 배치한다.
그 모습들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루면 제작진이나 관객 서로가 소화하기 힘들고 뻘쭘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감독의 전략인것 같다.
그 문제들은 그 중 한 가지만 가지고도 영화 한 편이나 소설 한 편을 써낼 수 있는 문제거리들이다.

장례식장 : 시간에 쫓기며 사는 가족들은 한 구성원의 "죽음"이나 있어야 한자리에 모이고,
엄숙한 장소에서 남주를 툭 치고 지나가며 의식도 못하는 무례함이 있고,
슬픔에 빠졌으면서도 희봉가족이 일으키는 소란스러움에 대한 주위의 천박한 호기심이 행동을 지배하고,
사람들의 떼죽음에 아무런 감정없이 오로지 시청률에만 급급한 취재진이 있고,
와중에도 기관의 권력을 내세우며 대중을 하수로 보는 "손 번쩍"이 있고,
그 권력은 알맹이는 전혀 없어 문제가 뭔지 몰라 텔레비전으로 대신 때우려는 무지함이 있고,
높은 사람들의 행차에는 슬픔으로 뒤범벅된 상주들의 길 열어주는 행사가 있다.

믿었던 같은 운동권 출신 선배는 예상외로 타도의 대상이던 업체에 취직을 하고
그러면서도 세금을 탓하며 결국은 후배를 팔아먹을 생각을 한다.

수배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방송뉴스를 보며 이제는 너무 만연화되어 특징이 없는 구성원 - 4년제 졸업 백수를 가족들은 정겹게 놀린다.

현서가 동굴에서 앓고 누워있는 세주에게 힘이 될만한 존재들이라 생각하여
다 데리고 오겠다던 의사,119,경찰,군인....들은
한편에서 "내말도 말인데 제발 들어줘.  왜 자꾸 내 말을  잘라."라고 강두가 외치는 "힘 없고 논리적이지 못"하나 현서가 살아 있다는 "진실의 말"을 무시하며 각잡고 있다.
그리고 대국민 방송에서는 "피해자니까 편의를 제공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협조를..."이라는 보도를 내보내며 민중의 지팡이라는 자들이,
서로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연인들처럼 이편과 저편에 멀리 떨어져 있다.
실은 가까이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고 있다. - 강두가 수술실을 탈출해서 어렵게 출구에 손을 대 문을 열자마자 보게 된 그 장면이다.
방송에서 프라이버시를 보호한다던 음성변조는 남일이 "나 저년 알아." - 주위 사람들은 다 아는 하나마나한 장치이고
그래서 뉴스를 놓고 강두와 세주는 "밥먹는데 잼없다, 끄자."면서 사람을 게으르게 만드는 기술의 상징인 리모콘을 찾다가 포기하고 발가락으로 텔레비전을 끈다.

위의 장면들과 더불어 유기농이 부자들의 웰빙 스타일로 전락한 것을 꼬집는 거나,
서리는 배고픈자의 특권이라는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을 세주형을 통해 자연스레 나열하는
- 이렇게 정신없이 많은 것을 얘기하는 장면들이 괴물을 소재로하는 SF영화에서 왜소한 대사와 장면으로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아마도 이 많은 것을 버거워하는 나를 위해 배려된 연출이다.


[유머있고 따뜻한 영화]
강두가 저녁을 차리는 동안 세주가 자는척 하는 장면을 저만큼 따뜻하고 예쁘고 유머있게 연출해 낼 수 있는 심성에 무한한 애정이 간다.
승리의 활을 쏘고 돌아서는 남주의 머리 흩날리는 모습을 왼쪽 코너에 조그많게 몰아넣는 익살스러움,
강변에 쓰러진 아버지한테 어찌하지 못하고 어이없이 돌아오는 강두.
탈출한 가족이 매점에서 컵라면 먹을때 귀신처럼 나타난 현서가 음식을 받아먹는 장면은
공포가 따뜻함으로 전환되는 의외성을 띄는 독특한 영화언어이다.

"가족애"에 대한 정의가 확장되는 장면은 무엇보다 인상깊다.
강두가 의식을 회복하는 세주에게 눈물을 삼키며 묻는다. "너 현서 알아? 누구니, 같이 있었니?"
- 얼굴을 아는
- 누군가와
- 함께했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모두 가족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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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를 마시는 괴물의 상징이나 에이전트 오렌지를 패러디한 에이전트 옐로우 혹은 포르말린의 한강방류 장면으로
반미적이다 뭐다하는 분석은 "분석"이 아니라 "사실"이며
그것을 놓고 영화의 촌스러움을 말하기보다는
한국 사회를 살아오면서 조금이라도 예민한 구석이 있다면
영화에서 한 장면 쯤은 경험과 부합하여 "그랬었지" 라고 공감하는게 맘 편한 감상이다.
나같은 경우는 마치 봉빠이기라도 한 것처럼 지나치게 시선을 확장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다.
독감 바이러스가 만연한 도시에서 침뱉은 물이 나에게 튀기지 않을까하는 것보다 더 예민하게
평온한 일상에서도 사회의 온당하지 않은 모습들이 바이러스보다 더 자연스레 만연해있는 것을 불쾌하게 느끼고 있었는데
영화가 장면마다 그것을 집어내버렸으니 말이다.

감독은 [둔해빠진 새끼들]을 미워하지만 둔해빠진 강두가 주인공이다.
그래서 오징어 굽는것과 가스버너를 아버지 희봉이 환상의 타이밍으로 사고를 추스리며 고생한다.
그런 강두가 밉지 않은 이유는 둔한 강두임에도 딸 현서의 책배낭이 무거울까봐 자연스레 받쳐들고 뒤를 졸졸 따르는 모습이 영화 마지막에 예민해지는 아빠가 될 떡잎이었기 때문이었을까나 어쨌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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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 치는 밤에
스기이 기사브로 감독 / 대원DVD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자,자 리뷰랄 것도 없습니다.
1. 늑대 매니아 관람요
2. 지브리와 곤조외 다른 재패니메이션 관심관객 관람요
3. 수준높은 사고의 아동들 관람가
4. 동인녀 관람필!
되시겠습니다.


이 아동용 애니를 반드시 보기로 결심한게
저 그림과 포스터의 문구-에서 생각나버린
시신덴님들의 찰스다윈에 끼워넣어진 늑대와 양(염소가 아닌) 에피소드때문입니다.

저 두 녀석은 수컷인데요, 늑대 가브가 심하게 마초형인거야 그렇다치고
염소인 메이녀석의 생김새는 반칙입니다.
이 애니의 흥행 성적은 알 수 없지만 만약 별볼일 없었다면
기획부터가 헷갈리고 타겟이 엉뚱하게 설정되었기 때문일거라고 봅니다.

겉으로 스토리만 봅시다. - 로미오와 줄리엣의 동물버전으로 진부하지않습니까.
주제를 봅시다. - 개나 소나 늑대나 염소나 다 아는 박애주의로 진부하지않습니까.
근데 꼬맹이들을 타겟으로 우정에 대한 그리고, 차이의 수용에 대한 교육때문에
스토리에서 주인공 둘이 함께 목숨을 버리다니, 애들이 감당하기 벅차지 않습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애니는
동인녀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릴 수 밖에없는 마이너의 운명인것입니다.

메이같이 상황의 모든 원인과 책임을 상대에게 아무생각없이 맡겨버리는 타잎
개인적으로 왕짜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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