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 - 시대를 앞서간 천재 버트런드 러셀의 비판적 세상 읽기 아포리아 5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석봉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버트런드 러셀의 책을 읽으면 쓸데없는 텍스트는 하나도 없고 거의 대부분 줄을 치면서 읽게 된다. 그리고 매우 잘 읽힌다, 책 읽을 맛이 난다.

"이론적인 측면에서 철학의 유용성은 우리가 정해진 시간 내에 과학으로 확인되거나 반박 되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는 추측 에만 국한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이 밝혀 낸 것에 너무 감명을 받아 과학이 밝혀 내지 못한 것을 잊어버린다. 또 다른 사람들은 과학이 밝혀 낸 것보다 밝혀 내지 못한 것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아서 과학이 이뤄낸 성과를 과소평가 한다. 과학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만과 확신에 차서 과학 연구에 필요한 명확성이 결여 된 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이들을 비난 한다. 그들은 실용적인 문제에서 기술이 지혜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최신 기술로 서로를 죽이는 것이 낡은 방법으로 서로를 살리는 것보다 더 진보적이고 더 낫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과학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고대에 해로운 미신으로 되돌아 가며, 과학 기술이 널리 사용된다면 인간 행복이 증진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개탄스럽다. 과학 지식의 범위와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올바른 태도를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날씨가 궂은 날 아이들과 소풍을 가려고 한다면 아이들은 날씨가 좋을지 나쁠지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할 테고, 만약 여러분이 확실히 대답 하지 못하면 실망 할 것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든 후에도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사람들에게 같은 종류의 확신을 요구한다."

"증거가 없다면 판단을 유보하도록 훈련 받지 않는 한, 인간은 독선적인 예언자들의 의해 잘못된 길로 이끌릴 수도 있다." - P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커 : 일반판 (1disc)
토드 필립스 감독, 호아킨 피닉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9년, 극장 관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보아야만 언급을 할 수 있기에 '내키지 않아도' 상영 기간에 관람한 두 작품은 [나랏말싸미]와 [조커]이다. 


[나랏말싸미]는 불교계 자본으로 불교 홍보용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비난 받았는데, 

내가 보기에 감독은 불교계에 잠입한 X맨이며 자신이 비난받는 것을 억울해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감독이 신미창제설을 진지하게 주장하고 싶었다기엔, 

신미와 승려들이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아이디어-마치 4차원으로의 모험을 꿈꾸는 초딩 5학년이 만들어 낼만한 아이디어-를 내는 장면들을 한글 창제의 과정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가야금 소리에 착안한 가획의 아이디어, 브레인스토밍 등의 장면들 ㅡ,.ㅡ). 

영화는 세종을 슬픈 바보로 만들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신미와 승려들을 바보개그맨으로 만들어 놓았더라. 


따라서 진정한 문제작은 [조커]라고 할 수 있겠다.  

[조커]가 서구에서의 반응과 달리 한국 관람객들에게는(? 적어도 나에게는) 그다지 큰 충격은 아니었던 이유는, 

조커의 문제는 진보적인 인사들을 물론 포함하는 WASP들의 가치관을 흔드는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민족구성원이 비교적 단일하고 집단주의 문화로써 상황귀인에 익숙하므로 아서 플렉이 반사회적 인물이 된 결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2020년 현재 미국이 다양성을 수용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백인 상류층이 ‘정치적 올바름’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솔직히, 

인종적이거나 계급적 문제들이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되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들이며 이 문제들 관련 갈등이 진행중이라는 것의 

반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아서 플렉은 분명히 범죄자다. 

아서 플렉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하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하는 것이 서구문화인들의 중요한 가치관이다. 


이전의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서구문화에서 개인은 자기 행동의 분명한 주체이며 행동에 대한 책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경구가 아동과 청소년들이 즐겨보는 코믹스 [스파이더맨]에 교훈처럼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서의 범죄행위를 놓고 미국인들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상황귀인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들도, 영화에서 아서가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된 결과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서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들이 잭 니컬슨 조커와 히스 레저 조커를 단죄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은 매우 지당한 것이었다. 

잭 니컬슨은 폭력을 유희로 삼는 전통적이며 종교적인 관점에서 형상화된 악이었고, 

히스 레저는 반사회적인 소시오패스였기 때문이다(영화관객들이 히스 레저 조커를 매력적으로 느낀 이유는 예측 불가능한 존재에 대한 선망이라는 인지상정 때문이다. 소시오패스 특성을 가진 히스 레저 조커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나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종교적 악이나 반사회적 악하고는 다르다. 

우리는 아서 플렉의 과거를 보면서 그의 현재를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한다(이것은 아서 플렉에 대한 용서나 처벌 여부와는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그들은 ‘상황’이 ‘주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에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 존재에 대한 위협을 느낀다.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가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그들 존재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난감한 상황이다. 


영화 [조커]는 그들의 문화에서 큰 문제작이 아닐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OWS시위의 배경과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된 배경이 많이 닮아있다. 

WASP들은 대다수 미국인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경제문제(분배와 복지)를 해결하지 못하거나 해결하지 않고,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도구로 99%의 심기를 건들지 않도록 조심하여 폭력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삐딱한 생각을 해보게 되기도.... 


한국의 평론가를 포함한 대다수 관객들이 [조커]를 논란의 작품으로 여기는 데에는, 

우리가 보기에 별로 혼란스럽지 않은 이 영화를 서구인들의 도식에 동조되어 동화하지 못하고, 

조절을 통해 자신들 고유의 도식을 바꾸려 하다보니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족 ===========================

이 리뷰에 한정하여, 

동조, 동화, 조절, 귀인이라는 용어는 심리학의 정의를 따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험에는 역사가 있고 그것은 우리 육체에 흔적을 남긴다. 소뿔에 들이받힌 투우사의 상처는 일종의 지식을 나타낸다. 출산 이후 생긴 튼 살은 인간의 몸이 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일들을 상기시킨다. 또한 ‘눈 밖에 났다‘, ‘앓던 이가 빠졌다‘, ‘손을 씻었다‘, ‘입이 무겁다‘와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육체는 은유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수학자 아이작 밀너가 1794년에 남긴 말처럼, 계몽주의 시대의 걱정거리가 "높은 자리에 있는 위대한 자들이 자신들에게 영혼이 있음을 잊은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신들에게 몸이 있음을 잊어버린 것이다. 온라인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신체적 한계에서 벗어나 자아를 표현하고 자신을 추적·수량화할 다양한 방법(오늘 나는 X걸음을 걸었다!)을 갖게 되면서 우리는 신체를 무시하거나 통제할 수 있다는, 아니 최소한 자신의 신체적 특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 P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Netflix 시리즈



매튜 매커너히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영화도 재미 있었지만 매튜의 연기에도 매료 되었다.
여하간에 주말을 게으르게 보내고 있는 나는 머리가 멍해서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드라마를 보려고 Netflix를 뒤졌다. 동명의 시리즈물이 있었다. 평가도 좋은 것으로 안내되어 있기에 시즌1 에피소드 몇 편을 시청을 한 결과 재미는 있었지만 유치한 부분이 많다. 
이 드라마의 장르는 일본식 만화나 게임 분류에 따르면 남자 변호사의 하렘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 주인공 주변에 여러 아름다운 여자들이 있고 이 여자들이 주인공 변호사를 돕는 좋은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시마과장의 컨셉을 표절한 범죄수사 드라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괴물 (DTS-ES 3disc)
봉준호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잘 들 살아"

최근 1, 2년동안 난 [예민함]이라는 단어에 상당히 집착해있다.
이 단어는 이기적인 종류의 사람에게서는 "신경질"로 표출되지만, 당연하게도
깊이있는 사람에게는 이해와 연민, 책임감을 자신의 내부에 배가시키게 한다.
그래서 영화 초반부의 자살하는 사업가의 대사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잘 들 살아"는 내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을거라는 암시였다.
영화의 소재는 괴물이었지만, 감독은 현재 이 순간의 한국사회의 초상을 스크린에 그렸고
그것도 얄미울 정도의 예민한 스케치로 영화의 각 장면마다 감탄할만한 솜씨를 보여준다.


[왜 "한국"사회인가]
한강(강, 다리, 매점, 컵라면과 오징어), 핸드폰, 활, 화염병, 장례식장,

["말"하는 영화]
뜻하지 않게 1년에 한 번 이상씩은 한강 시민공원에 가보게되었다.
몇 년 동안 나는 한강의 풍경에서 (내 감정에는 와.닿.지. 않.는.) 쓸쓸함과 허무를 느낀다.
두 세번씩 가본 놀이 공원과 덕수궁 돌담길에서 억지로 낭만을 느끼는 것이 연애방법의 전부이고
그것도 심드렁해져서 이제는 한강가까지 와 있는 커플.
맞벌이에 쫓기면서도 단란한 가정인척해야 하는 피곤한 부모의 아이들을 동반하여 가까운 곳이라 겨우 나올수 있었던 한강 나들이.
보이스카웃의 경험과 세계경찰 의식으로 무장되어 강두와 한편에서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성실하고 선하고 단순한 부루투스 - 미군 하사.
손톱이 이뻐보이기만 한다면야 손톱에 낀 더러운 때도 일상처럼 여기며 자연스레 제거하는 (마음만 깨끗하면 되니 클래식음악으로 정화하면 되나....) 헤드폰녀.
강두에게서 희봉으로 손님에게로 지저분하게 굴러다니는 동전(돈).
끝없는 욕망이 그 한계를 넘어 퇴폐의 영역까지 두루 훑어 최종적으로 자가소멸하도록 인간이 만든 이데올로기중 가장 전염성이 강한 자본주의, 그것은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고향을 떠나 돈을 좇도록 등을 떠밀려 한강공원에, 휴일에 갈 데 없는 동남아 근로자들의 초상을 그려 놓는다.
괴물을 발견하고 맥주쟁반을 들고 있는 강두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의 구성을 보라, 정말 감탄스럽다.

이런 묘사들은
1. 감정없는 과학자의 정확하고 훌륭한 고증
또는
2. 고뇌하는 섬세한 철학가의 명료한 문제의식
이 저변에 깔려있지 않으면 연출되기 어렵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우연이다.
그리고 이 셋을 구분하는데에 주저하지 않게 되는 것은 영화 상영 시간내내 그 답이 있기 때문이었다.
올해도 한강 공원에서 돗자리 깔고 맥주와 오징어를 뜯었던 나는 영화의 그 장면들이 사실과 너무 흡사한데서
그리하여 내가 느꼈던 쓸쓸함이 너무 정확하게 표현된 것에 대해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범하고 솔직한 영화]
영화제작엔 대자본이 투입되었다. 전체 제작비 약 100억원, 그 중에 괴물CG제작비 약 40억원.
이쯤되면 보통 영화에서는 제작비 투입을 과시하느라 괴물의 전체 모습은
영화 종료 10분전에야 구경할 수 있다.(CG가 사용되지는 않았겠지만 에일리언은 면죄부 발부하겠다.)
어렸을때부터 클라이막스까지 질질 끌려가는 플롯, 감질나는 연출의 공포영화등엔 취향이 아니었다.
찔끔찔끔 내지는 쫄딱쫄딱 효과가 빛을 발할 수 있는 분야는 오로지 "스트립쇼"가 아니던가.
그러나 바라던대로 괴물은 영화 초반에 홀딱 벗었다.

남일을 통해 화염병의 추억-"내 손으로 직접"-을 그리면서도
현재의 데모대가 강두를 "영웅"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것을 질타하기도 한다.

"솔직함"에 이웃하고 있는 "노골적"인 설정이나 장면에서도 유머까지 동반하여 불편함 없이 통쾌할 수 있었다.
기발한 작명 - "에이전트 옐로우"!
까메오로 출연한 아나운서의 시치미떼고 하는 심각한 멘트.
미국과 국제기구의 유별남, 무능함, 음흉함을 노골적으로 비웃으면서 동시에 결코 비열함이 풍기지 않는 분위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봉감독 그는 진정으로 선수다.


[겸손한 영화]
영화는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를, 영화 스토리 라인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동시에 관객이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교묘하게 배치한다.
그 모습들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루면 제작진이나 관객 서로가 소화하기 힘들고 뻘쭘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감독의 전략인것 같다.
그 문제들은 그 중 한 가지만 가지고도 영화 한 편이나 소설 한 편을 써낼 수 있는 문제거리들이다.

장례식장 : 시간에 쫓기며 사는 가족들은 한 구성원의 "죽음"이나 있어야 한자리에 모이고,
엄숙한 장소에서 남주를 툭 치고 지나가며 의식도 못하는 무례함이 있고,
슬픔에 빠졌으면서도 희봉가족이 일으키는 소란스러움에 대한 주위의 천박한 호기심이 행동을 지배하고,
사람들의 떼죽음에 아무런 감정없이 오로지 시청률에만 급급한 취재진이 있고,
와중에도 기관의 권력을 내세우며 대중을 하수로 보는 "손 번쩍"이 있고,
그 권력은 알맹이는 전혀 없어 문제가 뭔지 몰라 텔레비전으로 대신 때우려는 무지함이 있고,
높은 사람들의 행차에는 슬픔으로 뒤범벅된 상주들의 길 열어주는 행사가 있다.

믿었던 같은 운동권 출신 선배는 예상외로 타도의 대상이던 업체에 취직을 하고
그러면서도 세금을 탓하며 결국은 후배를 팔아먹을 생각을 한다.

수배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방송뉴스를 보며 이제는 너무 만연화되어 특징이 없는 구성원 - 4년제 졸업 백수를 가족들은 정겹게 놀린다.

현서가 동굴에서 앓고 누워있는 세주에게 힘이 될만한 존재들이라 생각하여
다 데리고 오겠다던 의사,119,경찰,군인....들은
한편에서 "내말도 말인데 제발 들어줘.  왜 자꾸 내 말을  잘라."라고 강두가 외치는 "힘 없고 논리적이지 못"하나 현서가 살아 있다는 "진실의 말"을 무시하며 각잡고 있다.
그리고 대국민 방송에서는 "피해자니까 편의를 제공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협조를..."이라는 보도를 내보내며 민중의 지팡이라는 자들이,
서로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연인들처럼 이편과 저편에 멀리 떨어져 있다.
실은 가까이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고 있다. - 강두가 수술실을 탈출해서 어렵게 출구에 손을 대 문을 열자마자 보게 된 그 장면이다.
방송에서 프라이버시를 보호한다던 음성변조는 남일이 "나 저년 알아." - 주위 사람들은 다 아는 하나마나한 장치이고
그래서 뉴스를 놓고 강두와 세주는 "밥먹는데 잼없다, 끄자."면서 사람을 게으르게 만드는 기술의 상징인 리모콘을 찾다가 포기하고 발가락으로 텔레비전을 끈다.

위의 장면들과 더불어 유기농이 부자들의 웰빙 스타일로 전락한 것을 꼬집는 거나,
서리는 배고픈자의 특권이라는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을 세주형을 통해 자연스레 나열하는
- 이렇게 정신없이 많은 것을 얘기하는 장면들이 괴물을 소재로하는 SF영화에서 왜소한 대사와 장면으로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아마도 이 많은 것을 버거워하는 나를 위해 배려된 연출이다.


[유머있고 따뜻한 영화]
강두가 저녁을 차리는 동안 세주가 자는척 하는 장면을 저만큼 따뜻하고 예쁘고 유머있게 연출해 낼 수 있는 심성에 무한한 애정이 간다.
승리의 활을 쏘고 돌아서는 남주의 머리 흩날리는 모습을 왼쪽 코너에 조그많게 몰아넣는 익살스러움,
강변에 쓰러진 아버지한테 어찌하지 못하고 어이없이 돌아오는 강두.
탈출한 가족이 매점에서 컵라면 먹을때 귀신처럼 나타난 현서가 음식을 받아먹는 장면은
공포가 따뜻함으로 전환되는 의외성을 띄는 독특한 영화언어이다.

"가족애"에 대한 정의가 확장되는 장면은 무엇보다 인상깊다.
강두가 의식을 회복하는 세주에게 눈물을 삼키며 묻는다. "너 현서 알아? 누구니, 같이 있었니?"
- 얼굴을 아는
- 누군가와
- 함께했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모두 가족이 되는 것이었다.

================================================

석유를 마시는 괴물의 상징이나 에이전트 오렌지를 패러디한 에이전트 옐로우 혹은 포르말린의 한강방류 장면으로
반미적이다 뭐다하는 분석은 "분석"이 아니라 "사실"이며
그것을 놓고 영화의 촌스러움을 말하기보다는
한국 사회를 살아오면서 조금이라도 예민한 구석이 있다면
영화에서 한 장면 쯤은 경험과 부합하여 "그랬었지" 라고 공감하는게 맘 편한 감상이다.
나같은 경우는 마치 봉빠이기라도 한 것처럼 지나치게 시선을 확장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다.
독감 바이러스가 만연한 도시에서 침뱉은 물이 나에게 튀기지 않을까하는 것보다 더 예민하게
평온한 일상에서도 사회의 온당하지 않은 모습들이 바이러스보다 더 자연스레 만연해있는 것을 불쾌하게 느끼고 있었는데
영화가 장면마다 그것을 집어내버렸으니 말이다.

감독은 [둔해빠진 새끼들]을 미워하지만 둔해빠진 강두가 주인공이다.
그래서 오징어 굽는것과 가스버너를 아버지 희봉이 환상의 타이밍으로 사고를 추스리며 고생한다.
그런 강두가 밉지 않은 이유는 둔한 강두임에도 딸 현서의 책배낭이 무거울까봐 자연스레 받쳐들고 뒤를 졸졸 따르는 모습이 영화 마지막에 예민해지는 아빠가 될 떡잎이었기 때문이었을까나 어쨌을까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