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사자의 서
파드마삼바바 지음, 류시화 옮김 / 정신세계사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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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도 공간도, 별도 행성도, 바위도 식물도, 동물도 인간도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은 무(無)에서 나왔다. 모든 것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쿼크와 전자 및 온갖 입자들로 이루어진 뜨거운 플라스마와 함께 시작되었다. - [철학을 위한 물리학](하랄드 프리쯔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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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카이 바르도에서의 가르침으로 시작하는 첫째권에서 느낀 지루함은
나의 주관적 입장에선 그 가르치는 내용이 너무나 당연한 것에 대한 설교이며, 잘 죽는 죽음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잘사는 것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듯이 나는 내 죽음도 특별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게 평소에 가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의식"이라는 절차도 평소에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곧 이것이 정신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른 사람들 혹은 현대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시대에 살았던 일반인들을 위한 가르침으로 이해하였으며, 뒤의 내용으로 갈 수록 현대인으로서 자만심을 버려야하는 내용이 펼쳐지면서 점점 심오해진다.

이 책의 철학적, 과학적 놀라움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티벳 사자의 서](바르도 퇴돌)에서 인류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 공空의 존재에 대해 믿을수 뿐이 없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책을 덮은지 얼마 안된 이 순간, 과학중에서도 물리적인 원리가 소름돋도록 그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며
전에 읽은 책들에서 떠오르는 이것과 관련된 몇가지를 열거하는 것으로 독후감을 대신하고자 한다.
어설프나마 교양과학서적 독서가 아니었다면 [티벳 사자의 서]에 대해 감동을 느낄수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떠올리니 "다양한 독서"에 대한 충고가 사뭇 피부에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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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은 후의 의식체는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인간의 몸일때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살아 있을때보다 본질을 깨닫기도 더 쉬우며 초능력같은 것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런 능력들을 추구하지 말 것을 겸손한 것을 가르친다.) 이런 상태에서는 훨씬 존재의 근원을 깨닫고 그곳 즉 열반에 이르기 쉽다는 것을 알려준다. ;

플러스로 휘어진 2차원 공간의 (구)면 위를 무리하게 직진하면 2차원 공간에서 튀어나가 2차원에서 3차원으로 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3차원공간의 우주를 억지로 직진하면 4차원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어, 그 물체는 3차원세계로부터는 사라져 버리는 셈이다. -[4차원의 세계](세끼 히데오)

소립자의 더 심오한 곳에 있는 수수께끼의 "원물질"을 잡는다면, 자연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자연은 일원이라는 인식이 바로 이것이다.
말하자면 태양도 지구도 바다도 강도 책상도 의자도 그리고 어른이건 아이건 인간의 삶도 죽음도 마음의 작용마저 이 소립자의 운동 에너지로부터 생각할 수가 있다. -[4차원의 세계](세끼 히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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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세계에서 보이는 모든 것들은 환영에 불과하며 그것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곧 자신과 하나임을 가르치며 두려워하고 도망치고 피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

원자들은 아주 작아서 한 번 숨을 쉴 때 들이마시는 공기 속에 수많은 원자들이 들어 있는데,
그 수는 대략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인구수의 수천억 배 정도이다.
우리는 호흡할 때마다 지구상에 살았던 누군가가 내쉰 원자들을 들이마신다.
물론 먼 곳에서 태어난 갓난아기의 것은 이 경우에 해당하지 않겠지만...
우리가 땀을 흘리거나 숨을 내쉴때마다 공기 중으로 원자들을 방출한다.
그래서 이 원자들은 지상의 모든 곳으로 퍼져서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몸의 일부가 된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과 그 뒤에 태어날 모든 이들은 지금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이다! - [알기쉬운 물리학 강의](Paul G. Hewitt)

17.究竟無我分
■ 세 존 ▶참으로 그러하다. 실로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다. 수보리야, 만약에 법이 있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면, 연등 부처께서 나에게 수기를 주시어 "네가 오는 세상에 반드시 부처가되어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리라"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사실인즉 법이 있음이 없는것이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기에 연등 부처께서 나에게 수기를 주시어 "네는 오는 세상에서 반드시 부처가되어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리라" 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 여래라함은 곧 모든 법이 진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설령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하더라도 시로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다. 여래가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도 없고 허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가 말하기를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하신다. 수보리야, 일체법이라고 말한 것은 곧 일체법이 아니기 때문에 일체법이라고 이름한다. 수보리야, 비유하면 사람의 몸이 크다는 것과 같다.
(해설 : 우주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현상이 모두 같다. 나고 죽음이 같고 있고 없음이 같고, 즐겁고 괴로움이 같고 생사와 열반이 같으며 부처와 중생이 같고 모든 법이 하나이다. 또한 이 모두가 있으며 없는 것과 같다. 곧 모든 것이 진실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 속에서는 이 모든 것이 둘이 아니다. 결국 최고의 깨달음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것은 거짓을 버리고 참을 얻은 것이 아니고 참 그 자체로써 그속에서는 모두가 같다는 것이다. 아울러 후자의 참 이라는 얻음이 없다는 것으로 상이 없는 경지에서는 모두가 같으며 깨달음 조차도(참조차도) 없으며 같다.) - 금강경주해(신동호)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현대물리학은 이전의 물리학보다 더욱 단순해졌기 때문에 더욱 어렵고 복잡해 보인다. 외부세계를 묘사하는 우리의 그림이 더욱 단순해지고 그 그림이 더욱 많은 현상을 설명할수록 우리의 정신 속에 우주의 조화는 더욱 강하게 자리잡게 된다. - [아인슈타인이 직접 쓴 물리이야기](A.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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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을때나 죽었을때나 즉 윤회계에 있을 동안 욕망과 집착을 버리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모두 헛된 것이고 일시적이고 순간일 뿐이며 먼지와 같은 것이다. 일반 교양 과학 서적에서 우주의 존재, 우주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 기술하면서 과학자들은 어떤 존재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고 깨달아야만 과학이 완성된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들이 발견한 입자, 에너지, 장(場), 시간과 공간의 과학적 논증에서 자연스레 철학과 종교로 발을 내딛게 된다. ;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빛이다. - [알기쉬운 물리학 강의](Paul G. Hewitt)

우리가 지식의 축적, 자연의 이용이 삶의 의미에 대한 보다 심오한 통찰을 주고 자동적으로 보다 나은 세계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던 시대는 갔다. 물질적 가치의 획득, 기술적 가능성의 영원한 확대, 삶의 모든 측면들에 대한 보다 깊은 과학의 개입에서만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는 속된 믿음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 [철학을 위한 물리학](하랄드 프리쯔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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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이르는 길, 진리를 깨닫는 방법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인 것 같다. 그것이 우리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본서를 접함으로써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친구 K양에 대해 고마움을 전하며 이만 줄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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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물고기 2004-10-04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올라온 리뷰라 더 반갑습니다. 잘 죽는 죽음이나 사후 세계, 더더구나 진리라는 것 자체와는 상반된 삶을 살아가는지라, 그러니까 배만 차면 만고땡인 인간인지라, 이런 책은 너무 어려울 것 같아요, 끄응.

jenny-come-lately 2004-10-05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이 어려워서 이해를 전혀 못했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詩적이고 문학적이기도 합니다.
 
피아니스트 UE - [할인행사]
로만 폴란스키 감독 / 스타맥스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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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완성도이다.  그러나 이게 쉽지 않은 것이, 좋은 작품인지 아닌지는 보고난 후에나 알 수 있는 것이고, 보려고 할 때도 몇안되는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의 영화를 제외하면 고르기 어려운 편이어서, 난 영화평을 믿지는 않지만 많이 참고한다.  왜냐하면 영화평을 보고나면 대충 감이 오기 때문이다.  호평이나 혹평에 관계없이, 평문을 읽으면 그 영화가 내가 좋아할 영화인지 아닌지가 머리에 꽂힌다.

  그런데 [피아니스트]의 하고 많은 평 중에 구태의연한걸 너무 싫어하는 내가 처음 본건 저 문구다. ;
해외 평단은 ‘피아니스트’를 ‘지극히 진부한 영화’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등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반복"이라니...  짜장면 먹다가 바퀴벌레 발견한 것처럼 흥미를 잃었다.(여담이지만, 바퀴벌레가 나오면 흥미를 잃을 뿐이지 난 남은 짜장면은 다 먹는다.  -,.-)  하지만, 남로당 어떤 당원에게 보겠노라 선서를 했고, 첨 만났을때부터 문화감각을 높게 샀던 초록이의 추천도 있고 하여 보게 되었다.  그녀가 추천한건 어지간해서는 실망을 거의 안하는데, 실제 10년이 넘도록 실망한 적은 한번도 없다.
  여하간 저 비평은 옳다.  좀 비꼬아서 말하자면, 세계 경제의 중추를 구성하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경제적 부를 어쩌면 "나치 학살 고발"에 충분히 이용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묻고 싶다. "그래서...?..."라고.  여기서 이렇게 대답하진 말자.-"과거를 거울 삼아 다시는 이같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역사는 만들지 말자"라고 말이다.  썰렁하고 진부하다.  이 당연한 최우선 명제는 그 중요성이 두번 말하면 입아프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이 비평가의 관점은 좀 빗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이 영화는 "학살 고발 영화"가 아니었다.(이야기는 실화다.)  영화는 피아니스트였던 한 사람의 이야기다.  사람의 내면에서 느끼는 이름없는 감성들을 보여주고, 생의 몇년간의 긴 호흡과 또 찰나적 순간의 강렬함과 애잔함을 표현하는 영화다.  저 해외 비평가들이 말한것같이 이 영화의 "학살"이라는 소재가 폴란스키 감독의 솜씨를 깎아내리는 요소는 절대 되지 못한다.

  내가 어렸던(=어리석었던)시절 "구차함"이라는 단어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었음을 오늘 여기에 고백한다.  어렸을때는 구차하게 느껴졌을, 주인공이 살아남기 위해 했던 모든 행동들은 나에겐 아름답게 보였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인간의 본능이었다.  또 다행스럽게도 스필만에게는 그가 당할지언정, 그가 살아남기 위해 "대신" 남을 희생시켜야 하는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운이 좋았던거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양심을 판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도망쳤고, 거리의 시체를 보고 울 여유가 없었고, 여러 사람을 걱정시키며 숨어 다녀야 했고, 굶었고, 병들어 죽을뻔 했고, 화염에 무너지는 독일군 병원 건물을 헤쳐나와야 했고, 고독에 몸서리 쳤고 몸을 심하게 다쳤으며 독일장교 군복 때문에 아군에게 총을 맞아 또 다시 목숨을 잃을뻔 했다.

  원치 않는 고난을 겪는 그가 살아남기 위한 행동을 해야만 했던 "하기 싫어도 해야하는 행위"와 "하고 싶은 행위"-피아노 연주가, 비극적으로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의 아득함과 혼재한 순간 - 폐허에서 독일장교 호센펠트와 맞닥뜨리는 숨막히는 순간은, 독일군들이 후퇴하면서 도시를 화염속에 던져넣는 장소를 피해 높은 담을 넘어 눈앞에 펼쳐진 잿빛의-죽음의-지옥의 세계를 갑자기 대면하는 순간(영화 포스터)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순간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이 순간까지 보여진 모든 사건과 비극은 바로 이 장면을 돋보이게 하기위해 필요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스필만의 피아노 연주속에 담긴 표현 못할 5년여 세월의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비극적인 시간들은 호센펠트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깊이 있으면서도 단호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게 만든다.  그리고 둘은 스스로들이 알지 못한채 친구내지 동지로 맺어진다.  그것은 가장 깊은 연인사이보다 더 강렬한 관계이다.  그래서 나는 포로가 된 호센펠트가 근처를 지나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했던 부탁이 목숨을 건지기 위한 필사적인 행동이기도 했지만 피아니스트를 다시 만나고픈 마음 또한 그만큼의 크기로 필사적이었다고 느꼈다.

  폴란스키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교훈을 준다거나 인간이나 사회문제를 짚어낸다거나 놀라운 플롯을 보여주거나 하는 줄거리 중심의 영화는 아니다.  이 작품은 표현하기 위한 영화이다. 무엇을? - 아름다움을 말이다. ; 피아노, 피아니스트, 찰나, 목숨, 도망, 비극, 아쉬움, 충격, 공포, 관계 등등의 아름다움을 말이다.  그러므로 해서 저 위의 해외 평단의 모욕에서 이 영화는 충분히 자유롭다.

  나는 극장을 찾아가면서 땅위로 나오는 지하철 계단에서 심하게 넘어졌다.  요란하게 구른 것은 아니고 단지 날카로운 계단에 숨이 멎을 정도로 둔탁하고 무겁게 부딪쳤던 것이다.  오른쪽 무릎 관절과 오른쪽 팔꿈치가 움직일때마다 심하게 아파서 신음소리가 낮게 튀어나올 정도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컸기 때문에 어느쪽으로 움직이면 아픈지 혹은 안아픈지도 알아낼수가 없을정도였다.  그래서 스필만이 폐허에서 다쳐 다리를 절 때 나는 몸까지도 같이 공감을 했다.  이 상태로 어두운 극장안을 더듬어 들어가 내가 본 4회 이전 즉, 3회의 마지막 장면을 먼저 보기 시작했다.  커다란 화면에 피아노와 손만 보였다.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가 흐르고 있었다.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고 잠시후 광고를 거쳐 4회를 보고 다시 같은 마지막 연주 장면을 보면서 관람을 마쳤는데, 그 바람에 그날 이 영화는 나자신과 내 시간이 함께 편집한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와는 또 다른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내가 3회 마지막 장면을 보지 않고 4회 처음부터 보기 시작했다면 지금과는 좀 다른 감상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스필만의 고통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다싶을 정도로 차분하게 처리하여 객관적이면서도 리얼함을 획득하게 한 감독의 솜씨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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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혁명과 생명윤리
힐러리 퍼트넘 외 지음, 생물학사상연구회 옮김 / 아침이슬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생명과학은 다른 어느 분야의 과학보다도 훨씬 인권, 철학, 도덕, 정의, 사회, 정치의 문제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것은 이 과학이 생소한 분야여서 그런게 아니라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고 그리하여 세계최대의 민간 인권운동단체인 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는 유전자 혁명의 본질에 좀 더 다가서기 위해 유명한 옥스퍼드 강연을 열었고 이를 생물학사상연구회에서 번역하였다.

  생명 윤리 문제에 있어 유전공학의 활발한 연구와 이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인류가 자신의 고통과 유전적 열등함을 개선할 수 있는 자유주의와 인권에 기대어 "유전자 치료와 변형"에 대한 발전을 중심으로 논지를 펼치고 있으며, 이와 반대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 복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인간배아의 낭비로 인한 희생, 조직 배양에 따르는 비윤리적 측면과 우생학 정서의 확대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권리를 제한하는 타당한 이유중 하나를 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역시 나도 모든 권리를 제한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유주의자들의 행진은 멈춰서야 할 거점이 있다. 일부분에 대해서 이런 예를 들고자 한다.
  더 좋고 건강한 것에 대한 선택이 자유로워야 한다? ; 취향이 차별받지 않아야한다고 하지만 취향에 대한 선호도가 편향되어 있는 이런 와중에 형성되는 계급의식은 눈앞의 현실로써, 이를 고려할 때, 그 선택권은 소유하지 말아야함이 마땅하다. 선택하기 쉽고 기회도 많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대상에 대해서는 "다양성"이 발생하나, 그 반대인 경우 "다양성"은 자취를 감춘다.  사람들이 볼펜이나 셔츠를 선택하는 경우와 집이나 차를 선택하는 경우를 떠올려 보라.  유전자에 관해서는 빨간색이 좋으냐, 파란색이 좋으냐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큰 케익이 좋으냐 작은 케익이 좋으냐, 맛없는 케익이 좋으냐 맛있는 케익이 좋으냐처럼 이익과 관련된 것으로 이것은 "차별"을 유발할 뿐 "차이"의 다양화를 유도하는 시스템이 아닌 것이다. 어떤 강연자가 지적한 것처럼 이런 자유의 극대화는 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고려되지 않은 (무자비한)자유이다.
  인간 복제에 대해 찬성하는 이들은 아주 중요한 점을 하나 놓치고 있는데 이에 관해 6장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
  "뭔가가 자연적 대상물이 된다는 것은 인위적 대상물과는 구별되는 도덕적 지위를 수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

  이제 자유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쪽을 비판해볼 때, 아주 신중하고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유전자 치료나 변형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먼 미래는 염두에 두지만, 당장에 인류가 처한 고통에 대해서는 그 관심도가 엷다는 점이다. 치유 불가능한 유전병인 EB질환을 앓던 아이를 잃은 부모가 다음 아이의 출산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가,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 외에도 다른 고통이 심한 유전적 질환을 야기할 DNA를 인공적으로 처리하는 것에 대해서 좀 더 깊고 넓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치료와 조작은 물론 인류를 포함한 생태계의 "미래"에 대해 어떤 영향을 줄 수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접근해야 하는가. 

  각각의 분야에서 그리고 각각의 입장에서 의견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과 대중들은 점점 복잡해져가는 사회문제의 해결에 대한 접근을 시도함에 있어, 이제는 한 가지 이론이나 주장만으로 해결법을 정리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새로운 이념이나 유연한 사고로 대처해야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의견을 분석하고 취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또한 그만큼이나 그것들을 소화하려는 열린 마음과 자세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바, 현대의 가장 중요한 논란거리인 생명과학에 대하여 여러 방면에서 고찰해 본 이 책은 누구나 한번씩은 정독해봄직한 양서이다. 두께가 얇은 편에 속하는 이 책은 겉보기와 달리 매우 가치있는 주장과 논쟁을 담고 있어 그 내용의 무게는 몇 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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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람 팍스의 평화를 위한 블로그
살람 팍스 지음, 김성균 옮김 / 한숲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문명 - 인간의 손끝에서 나온 무수한 유형.무형의 창조물들은, 특히 현대에 있어서는 어떤 위험이나 문제점을 그 본질속에 반드시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이를 부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래도 회의적인 입장이다.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어느 정도 밀려난 정보화 사회의 문제점 - 사생활 침해에 대한 우려와 아이러니하게도 익명성으로 인한 폐해가 함께 거론되었었고 정보의 조작과 정보 공유의 불평등, 현실과 가상공간 사이의 혼동등 당시에는 정말 낯설고 대처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지적되었었다.

이런 와중에서 인터넷이라는 문명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 위험과 문제들이 예상했던 정도보다는 낮은 수준에 머물면서 긍정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해본다. 그 한 가지 예로 살람 팍스라는 네티즌이 일으킨 자그마한 화제를 들 수 있겠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지역에 살고 있는 20대의 성실하고 감수성 풍부한 필명이 살람 팍스라는 한 청년 블로거 덕분에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서방세계에 의해 조작된 정보가 아닌 현지인의 심정과 시각을 조금이나마 실시간으로 전해들을 수 있었다.
비록 그가 사는 지역에서의 생활로 한정 되어 있었지만 서방 언론보다 빠르거나 또는 다른 내용의 이라크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람 팍스는 실존 여부를 의심받는 메일을 많이 받았다. 나라면 그런 것을 묻는 메일을 보내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기록한 내용들에서 크기를 확대하거나 감추거나 모략을 위한 목적인 듯한 분위기는 느끼지 못했으며 그의 생각들은 충분히 표현되고 발언될 수 있을만한 시대에 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대내외의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정치세력들에 대해 사람들은 정말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과 “상한 우유”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해야하는 입장에 놓여있었고 심한 빈부격차 때문에 빈자에 속하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정의와 미래,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으며 언론은 말도 안되게 날조되었다. 천연 자원에 대한 탐욕으로 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강대국과 사태파악을 못하는 허울좋은 명분뿐인 국제 자원봉사자들은 머리도 마음도 비었으며 국제기구의 잔인한 제재조치들은 선한 국민들을 죽음과 질병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선진국 국민인 일부 블로거들은 이런 상황에 놓인 이라크에 사는 살람 팍스에게 “우리가 시키는대로 하라.”라는 황당한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현실의 가장 중요한 barometer와 해결방법은 현재 바로 그 곳에 있는 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 측정하고 찾아내야 하는 것이지 멀리서 잘 알지도 못하는 외부사람들이 주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단지 물질적 도움이나 정신적 응원이면 충분할터, 저러한 거만한 태도의 메시지는 평화를 방해할 뿐이리라.

“파견”이나 “지원”이 아닌 “파병”문제가 아직도 심각하게 논쟁이 되고 있는 이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 결정을 위한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맞춤법이나 오자, 탈자가 많은 것이 출판사의 성실성에 대한 신뢰도를 낮춘 아쉬운 점을 좋은 책 내용이 약간 벌충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존재를 통해 아직도 개인이라는 요소는 유효하고 의미있는 존재라는 것과 현실에서든 가상에서든 진실 소통의 가능성을 그가 증명했다는 것에 특히 나는 주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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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런스 딥 - [할인행사]
이재한 감독, 알렉스 매닝 외 출연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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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컷 런스 딮 the cut runs deep 의 재구성

푸른 심장이 붉게 물들어 발화점이 낮아지면
세포 분열로 성장통을 겪기 시작하는 것은 몸에서 마음으로 옮겨가고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다.
시검석試劍石을 조각낸 명검으로도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실絲인 강한 인력引力은
원래 천상의 것이 아니라서 그 끝이 예정되어 있건만
이끄는 쪽도 이끌리는 쪽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덫에
어리석은 그러나 너무도 달콤한 희망을 건 채 발을 내딛는다.
소년은 어른인 남자와 어른인 여자에 압도된다. 그리고 남자도 또 여자도 소년을 원한다.
남자는 길을 잘못 들기 전 조금이나마 희망이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소년을 통해 향수를 느끼고 싶어하고
여자는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순수한 열정과 사랑을 소년에게서 갈구한다.
쓰레기더미에서 탈출을 꿈꾸는 소년은 기꺼이 욕망과 유혹에 몸을 내맡긴다.
화려한 불길에 휩싸여 있는 소년은
남자의 조용하고 매력적인 미소에 깃든 슬픔의 정체를 이해할 수 없고
여자의 신비하고 설레이는 사랑에 깃든 절망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불구인듯한 하이브리드로서의 삐걱거림도 이렇게 취한 상태에선 대충 견뎌낼 수 있다.
남자와 여자는 곧 그 불꽃이 꺼질 것을 안다.
속도는 통제 범위를 벗어나고
분출되는 아드레날린 효과와 교감신경 흥분의 지속시간은 갈수록 짧아져
밝음과 어둠은 자아의 정체성을 교란시키고 결국 파멸하고야 만다.
소년의 목에 매여있는 투명하고 단단한 사슬은 갱단의 보스가 쥐고 있다.
남자는 보스를 쏜다. 쏘는 것뿐이 소년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다른 것은 없다.
그러나 역한 화장실 청소에서 벗어날 때의 소년의 기쁨이 들어 있던 남자로부터의 선물은
다시 한번 포장되지 못한채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부서지고 만다.
태어난걸 후회할 만큼 아픈 상처를 내는 칼이 아닌
한 방에 평안해 질수 있는 총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없었던 시작이었다.
세 사람의 눈물은 메말라 그들의 눈에서 흐르지 못하는 대신
무당인 남자의 모친이 타는 작두날을 붉고 끈적하게 물들이며 비릿하게 뒤섞인다.
베어진 상처는 깊게 흐른다, 남자에게서도 여자에게서도 그리고 소년에게서도...

손바닥만하게 작은 티비화면에서 간신히 비춰지던 영화속의 데이빗 맥기니스를 보는 순간, 감독이 "널 위해 영화를 만들겠어."하고 마음을 빼앗겨버린 것에 200퍼센트 공감했고, 얼마전 전파를 타던 CF는 그를 얼마나 별볼일 없는 범부로 전락시켰는가를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봐온 영화들의 어떤 캐릭터에서도 이만한 카리스마에 사로잡혀 본 적은 없다. 아니, 그 이전엔 카리스마가 무슨 뜻인지 어떤 느낌인지 전혀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재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소재로 두말할 것도 없이 감상적이다. 그러나 감독은 그 경계를 정확히 짚어내어 선을 넘지 않았다. 제목에서 데이비드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를 떠올리게 하는 이재한감독의 차기작 [내 머리속의 지우개]가 궁금하다.
어찌해볼 수도 없이 허망한 엔딩씬에 흐르는 울먹이는 듯한 보컬의 Tanita Tikaram의 삽입곡 I might be crying은 내 데스크탑의 winamp에서 끊임없이 repetition되어 언제까지나 잊혀지지 않을 여운을 안개처럼 피워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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