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UE - [할인행사]
로만 폴란스키 감독 / 스타맥스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내가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완성도이다.  그러나 이게 쉽지 않은 것이, 좋은 작품인지 아닌지는 보고난 후에나 알 수 있는 것이고, 보려고 할 때도 몇안되는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의 영화를 제외하면 고르기 어려운 편이어서, 난 영화평을 믿지는 않지만 많이 참고한다.  왜냐하면 영화평을 보고나면 대충 감이 오기 때문이다.  호평이나 혹평에 관계없이, 평문을 읽으면 그 영화가 내가 좋아할 영화인지 아닌지가 머리에 꽂힌다.

  그런데 [피아니스트]의 하고 많은 평 중에 구태의연한걸 너무 싫어하는 내가 처음 본건 저 문구다. ;
해외 평단은 ‘피아니스트’를 ‘지극히 진부한 영화’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등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반복"이라니...  짜장면 먹다가 바퀴벌레 발견한 것처럼 흥미를 잃었다.(여담이지만, 바퀴벌레가 나오면 흥미를 잃을 뿐이지 난 남은 짜장면은 다 먹는다.  -,.-)  하지만, 남로당 어떤 당원에게 보겠노라 선서를 했고, 첨 만났을때부터 문화감각을 높게 샀던 초록이의 추천도 있고 하여 보게 되었다.  그녀가 추천한건 어지간해서는 실망을 거의 안하는데, 실제 10년이 넘도록 실망한 적은 한번도 없다.
  여하간 저 비평은 옳다.  좀 비꼬아서 말하자면, 세계 경제의 중추를 구성하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경제적 부를 어쩌면 "나치 학살 고발"에 충분히 이용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묻고 싶다. "그래서...?..."라고.  여기서 이렇게 대답하진 말자.-"과거를 거울 삼아 다시는 이같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역사는 만들지 말자"라고 말이다.  썰렁하고 진부하다.  이 당연한 최우선 명제는 그 중요성이 두번 말하면 입아프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이 비평가의 관점은 좀 빗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이 영화는 "학살 고발 영화"가 아니었다.(이야기는 실화다.)  영화는 피아니스트였던 한 사람의 이야기다.  사람의 내면에서 느끼는 이름없는 감성들을 보여주고, 생의 몇년간의 긴 호흡과 또 찰나적 순간의 강렬함과 애잔함을 표현하는 영화다.  저 해외 비평가들이 말한것같이 이 영화의 "학살"이라는 소재가 폴란스키 감독의 솜씨를 깎아내리는 요소는 절대 되지 못한다.

  내가 어렸던(=어리석었던)시절 "구차함"이라는 단어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었음을 오늘 여기에 고백한다.  어렸을때는 구차하게 느껴졌을, 주인공이 살아남기 위해 했던 모든 행동들은 나에겐 아름답게 보였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인간의 본능이었다.  또 다행스럽게도 스필만에게는 그가 당할지언정, 그가 살아남기 위해 "대신" 남을 희생시켜야 하는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운이 좋았던거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양심을 판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도망쳤고, 거리의 시체를 보고 울 여유가 없었고, 여러 사람을 걱정시키며 숨어 다녀야 했고, 굶었고, 병들어 죽을뻔 했고, 화염에 무너지는 독일군 병원 건물을 헤쳐나와야 했고, 고독에 몸서리 쳤고 몸을 심하게 다쳤으며 독일장교 군복 때문에 아군에게 총을 맞아 또 다시 목숨을 잃을뻔 했다.

  원치 않는 고난을 겪는 그가 살아남기 위한 행동을 해야만 했던 "하기 싫어도 해야하는 행위"와 "하고 싶은 행위"-피아노 연주가, 비극적으로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의 아득함과 혼재한 순간 - 폐허에서 독일장교 호센펠트와 맞닥뜨리는 숨막히는 순간은, 독일군들이 후퇴하면서 도시를 화염속에 던져넣는 장소를 피해 높은 담을 넘어 눈앞에 펼쳐진 잿빛의-죽음의-지옥의 세계를 갑자기 대면하는 순간(영화 포스터)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순간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이 순간까지 보여진 모든 사건과 비극은 바로 이 장면을 돋보이게 하기위해 필요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스필만의 피아노 연주속에 담긴 표현 못할 5년여 세월의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비극적인 시간들은 호센펠트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깊이 있으면서도 단호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게 만든다.  그리고 둘은 스스로들이 알지 못한채 친구내지 동지로 맺어진다.  그것은 가장 깊은 연인사이보다 더 강렬한 관계이다.  그래서 나는 포로가 된 호센펠트가 근처를 지나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했던 부탁이 목숨을 건지기 위한 필사적인 행동이기도 했지만 피아니스트를 다시 만나고픈 마음 또한 그만큼의 크기로 필사적이었다고 느꼈다.

  폴란스키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교훈을 준다거나 인간이나 사회문제를 짚어낸다거나 놀라운 플롯을 보여주거나 하는 줄거리 중심의 영화는 아니다.  이 작품은 표현하기 위한 영화이다. 무엇을? - 아름다움을 말이다. ; 피아노, 피아니스트, 찰나, 목숨, 도망, 비극, 아쉬움, 충격, 공포, 관계 등등의 아름다움을 말이다.  그러므로 해서 저 위의 해외 평단의 모욕에서 이 영화는 충분히 자유롭다.

  나는 극장을 찾아가면서 땅위로 나오는 지하철 계단에서 심하게 넘어졌다.  요란하게 구른 것은 아니고 단지 날카로운 계단에 숨이 멎을 정도로 둔탁하고 무겁게 부딪쳤던 것이다.  오른쪽 무릎 관절과 오른쪽 팔꿈치가 움직일때마다 심하게 아파서 신음소리가 낮게 튀어나올 정도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컸기 때문에 어느쪽으로 움직이면 아픈지 혹은 안아픈지도 알아낼수가 없을정도였다.  그래서 스필만이 폐허에서 다쳐 다리를 절 때 나는 몸까지도 같이 공감을 했다.  이 상태로 어두운 극장안을 더듬어 들어가 내가 본 4회 이전 즉, 3회의 마지막 장면을 먼저 보기 시작했다.  커다란 화면에 피아노와 손만 보였다.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가 흐르고 있었다.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고 잠시후 광고를 거쳐 4회를 보고 다시 같은 마지막 연주 장면을 보면서 관람을 마쳤는데, 그 바람에 그날 이 영화는 나자신과 내 시간이 함께 편집한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와는 또 다른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내가 3회 마지막 장면을 보지 않고 4회 처음부터 보기 시작했다면 지금과는 좀 다른 감상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스필만의 고통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다싶을 정도로 차분하게 처리하여 객관적이면서도 리얼함을 획득하게 한 감독의 솜씨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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