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전야
저녁 내내 별들을 돌아다니며 혼자 술을 먹었다. 주객들은 불 밝힌 창을 바라보며 지루하게 노래를 부르거나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별을 바라보고 울고 나는 잠시 어느 집 쓰레기통 앞에서 어린 왕자가 되어 잠이 들었다.-14쪽
사랑
그대가 맑고 밝은 햇살로 내 오랜 툇마루에 와서 춤을 추어도 그대가 몇 그루 키 큰 자작나무로 내 작은 산에 와서 숲을 이루어도 그대가 끝없이 이어지는 오솔길로 새벽마다 내 산책의 길에 고요히 놓여 있어도 난 그대를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아 그대가 이미 내 안에 있기 때문에-26쪽
나
나는 있으면서도 없다 잔 바람에 소스라치는 풀잎과 같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안개와 같이 목적 없이 떠 있는 구름과 같이 말없는 들녘의 거미와 같이 나는 있으면서도 없다-30쪽
별에까지 가야 한다.
별에까지 가야 한다. 흩어지는 꽃잎처럼 가야 한다. 사랑하는 이의 뜨거운 눈물도 없이 이리저리 돌에 채이듯 별에까지 천천히 걸어서 가야 한다. 내 낡은 얼굴 한 구석에 서럽게 남아 있는 시간 속으로 사랑도 이별도 던져버리고 저 들판을 휩쓸고 지나가는 가시바람에 눈이 멀어도 흩어지는 꽃잎처럼 오직 별에까지 가야 한다.-48쪽
꽃
어둠 저편 저 깊은 곳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꽃은 어디 있니?)
몸서리처지게 불어오는 바람의 근원은 확실히 안쪽 어디다 (꽃은 살아 있니?)
바람이 잠시 잠잠해지다가 다시 소용돌이치며 불어온다 (꽃이 죽었니?)
바람 속으로 검은 꽃들의 형상이 무수히 나타나 운다 (난 꽃을 따라 죽을 거야)
바람은 나의 다리에 거머리처럼 착 달라붙는다 (난 꽃처럼 죽고 말았어)
내 발은 지금 아무것도 딛지 않고 있다 (꽃의 발은 어디 갔니?)-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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