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그림자

박항률

수줍은 계집아이의 발그레한 뺨빛 노을이 검은 벨벳 같은 어둠의 장막 뒤로 가라앉는다. 하루 종일 분주히 싸돌아다니며 자태를 과시했던 여인네도 거울 앞에 앉아 분분히 찌든 자신의 얼굴을 지우며 차분하게 휴식을 취한다. 떠들썩한 세상사는 소리가 슬며시 볼륨을 올려놓은 듯한 텃새들의 울음소리와 풀벌레들의 속삭임으로 바뀌는 그 시간. 늘 그래왔던 것처럼 삶에 대한 물음들을 준비해야 한다. 하루종일 허기를 메우기 위한 부질없는 몸짓으로 까칠해진 몰골을 추스르기 위해. 천금같은 순간들을 캬라멜 까먹듯이 허비하고 따개비처럼 온몸을 뒤집어 쓴 불필요한 허물을 벗어 던지기 위해, 이제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잠시 꿈의 세계를 찾고 싶다.

-늪그늘 푸른 그림자 아래 이슬을 머금은 자라의 슬픔 눈은 어저께 동네어귀 전봇대 앞 에서 노닐다가 마주했던 코흘리개 머슴애의 눈과 닮았구나.-

거울에 비춰진 초라한 모습을 쳐다보는 허전한 마음보다 흔들리는 자아는 한결 치열한 삶의 과정이리라. 너와 나를 혼동하는 밝은 대낮에는 너무도 당연한 욕구들로 뒤섞여 바위 같이 굳은 표정이지만 잠 속으로 도망가지 않는 한 자아는 줄타는 어릿광대의 차가운 눈빛 처럼 몹시도 흔들린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매의 부리가 둥지로 되돌아오듯이 내 피륙에서 떨어져 땅 속 가장 깊 은 한 점을 향해 영혼이 가라앉으면, 그 곳에는 진실로 참되고 보랏빛 무지개 같은 꽃이 피 어 있을까? 무상한 세월이 흐르면 육신은 땅을 향해 가라앉지만 영혼을 드맑은 하늘을 향해 자유롭게 비상한다. 칠흑 같은 숲 속, 고요를 깨뜨리는 소쩍새 울음소리에 저절로 눈물짓던 뜻을 작대기로 땅바닥에 엄마얼굴 그릴 적에는 왜 몰랐을까?

 

그래, 넝마를 주워 걸치고 손등이 곱아터진 눈썹 없는 천사가 네 곁에 다가와 "고쟁이 안에 감추어 둔 대추열매가 몇 개나 되는지 알겠니?" 하고 묻는다면 너는 어떻게 대답하겠니? 나는 오늘도 다분히 경로석에 쭈그리고 앉아 조는 척하겠지.

온몸이 땀에 절도록 산채에 오르면 일엽초 뜯어서 차 달여먹고 심상치 않은 기분에 도취 된다. 윙윙 소리내는 소나무 그림자 사이로 스쳐 지나간, 늑대 꼬리가 무서워 누더기를 뒤집어쓰고 강아지 주둥이를 끌어안으면, 어느덧 초침이 시계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돌아가는 듯 한 새벽녘인데 손 맵시도 어여쁜 태국인형이 비스듬히 우아한 미소를 던진다. 불같은 환송 연도 없이 지리멸렬해진 허전한 마음을 웃옷 안주머니에 구겨 넣고서 홀홀 무리들로부터 빠져나와 스산한 밤 공기를 가르며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은 마치 길섶에 버려진 못쓰게된 거지인형을 주운 느낌과 같다.

이성에 대한 무자비가 화염 속에 형상을 드러내는 오후, 마음 저편에 불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혼돈스런 순간에 들이닥친 친구의 부음을 젖은 황색이 스미고 지나간 잔디 위에 떨어지는 냉랭한 은빛 조각 같은 애잔함이었다. 하물며 내일도 해가 뜨면 아귀같은 욕망들 이 나를 사로잡겠지. 그래도 매일같이 벼랑 끝에 서서 호된 바람을 맞는 기분으로 내 영혼에 화답한다면 저기 땡볕에 내팽개쳐진 내 모습을 그려보련다.

천금같은 순간들을 캬라멜 까먹듯이 허비하고 따개비처럼 온몸을 뒤집어 쓴 불필요한 허 물을 벗어 던지기 위해, 이제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잠시 꿈의 세계를 찾고 싶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여울이 2005-09-08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그림은 단정하다. 선비의 옷매무새와 같이 단아한 맛이 있다. "
는 어느 평론가의 말이 떠오른다. 나도 동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