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df2234 > 책광들에게는 너무나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
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밥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은(실제로 우리 주변에도 책이 밥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 종족의 이름은 밝히지 않으련다) 때로는 책을 완전장악했다고 생각했다가도, 곧바로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인 그것들에 살살 빌어야 할 때가 다가오며, 때로는 으르렁거리면서 발기발기 찢어도 시원치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을 실감할 것이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는 그렇게 발기발기 찢겨진 책 갈피갈피가 유쾌한 악몽이 되어 되살아나는 책이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을 무엇에 관한 소설이라고 말해야 할까? 젊은 공룡(!)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가 대부의 유언을 실행하기 위해 책들의 도시로 떠나 겪는 모험을 그린 이 소설은 줄거리 자체로도 훌륭한 환상소설의 틀을 갖추고 있다. 대부가 언급한 천재시인의 정체는 밝혀질 듯 밝혀지지 않아 읽을수록 궁금증을 더하고 있으며 아직 성장기를 다 마치지 않은 듯한 뚱뚱하고(!) 유약한 공룡 미텐메츠가 위험에 빠져들고 캄캄한 지하도시에서 그 위험들을 극복해가며 성장하는 과정을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는 것도 즐겁다. 한마디로 줄거리만으로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책을 읽은 분들이라면 이미 눈치 채셨겠듯이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미텐메츠도, 그림자 제왕도, 부흐링도 아닌 바로 '책' 그 자체이다.

매일매일 많은 글들과 씨름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일터의 책상에는 수많은 책들이 놓여 있고 집에서는 키보드를 타다다다 두들기며 살아간다. 이와 생활 패턴이 비슷한 사람이라면 아마 이 책에 솔깃하지 않았을 사람이 없었을 것이라 믿는다. 나의 사랑이며 나의 웬수이고 또한 끊을 수 없는 '중독증'을 안겨준 책. 이 책이 주인공이라니! '책광'들에게는 한여름 방바닥에서 데굴거리며, 낄낄거리면서 꼭 읽고 싶어지는 책일 것이다. 애초에 우리의 젊은 공룡 미텐메츠가 험한 여정에 들어서는 것도 책 때문이었다. 대화만으로 처리된 대부의 임종 장면에서부터 낄낄거리기 시작해서 이제 '책'의 문턱에 들어선 젊은 공룡이 책의 도시 부흐하임에서 얼뜨기처럼 헤매다가 결국 곤경에 들어서는 장면, 그리고 그가 드디어 원하던 것을 보게 되는 장면까지 단숨에 읽어버리게 된 것도 결국은 책 때문이었다. 작가가 책, 혹은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책을 둘러싼 여러 암투(?)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는 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자. '내게 처음 떠오른 생각은 낱말 하나하나가 모두 적절한 위치에 쓰여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런 인상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원고든 처음 훑어보면 그런 인상을 받기 마련이니까. 그러다 자세히 읽어가게 되면 비로소 여기저기 무언가 맞지 않고 구두점들이 잘못 찍혀 있고, 오자도 있으며, 적절하지 못한 비유들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낱말들이 너무 자주 중복되는가 하면, 글을 써가는 동안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실수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장은 글을 써보았거나 혹은 고쳐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쓸 수 없는 것이다. 비평가들에 대한 독설, 책 상인과 수집가들에 대한 질시와 경멸과 찬탄, 어쩌면 작가가 궁극적으로 꿈꾸고 있는 책광들의 모습일지도 모를 외눈박이 '부흐링', 그리고 정말 마음에 드는 글, 완벽한 책을 만났을 때의 상태를 의미하는 '오름'의 묘사 앞에서 작가가 얼마나 '책' 그 자체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사람인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쓰고, 만들고, 그 내용에 대해 혹평하거나 경탄하는 과정, 그리고 책에 대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말들, 단순하게 쓰자면 한없이 재미없고 지겨울 수도 있는 이 모든 것들을 작가는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의 모험을 빌어 정말로 꿈틀거리며 살아있게 만든 것이다. 뒤로 갈수록 모험에만 치중하게 되는 것은 줄거리를 완성하기 위한 흠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러므로 약간의 실망을 안겨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책과 더불어 꾼 '책꿈'은 아마 유쾌하게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책에 대한 꿈이자 책이 꾸는 '책의 꿈'이. 

추신 1: 당신은 이 책에 등장하는 책 가운데 어떤 책이 가장 읽고 싶은가? <나의 순간들은 너희의 머리카락보다 길다> <백 개의 발을 가진 집> <만약이라면, 어제를> 등과 같이 알듯말듯한 소설책의 제목들을 통째로 비꼬아놓은 이 우스꽝스러운 제목들이 난무하는 이 소설집에서 역시 나라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의 첫 소설을 택하겠다(그 책이 무엇인지 궁금하시다면 책을 꼭 뒤져보시라). 그리고 부흐하임에 도착하면 꼭 '시인의 유혹'과 '삼류소설 커피' 사이에서 갈등해보시라. 책광에게 그보다 더 즐거운 갈등이 어디 있으랴.

추신 2: '네벨하임의 트럼나팔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그 뒤에 숨어있을지도 모를 무시무시한 음모에도 불구하고 책광과 더불어 음악광들에게 일종의 로망이 될 것이다. 꿀벌빵에 혀가 따끔하게 찔리는 고통을 겪더라도 꼭 한번 맛보고 싶은 연주다. (개인적으로 책의 압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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