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도구화하지 않고서는 힘을 얻지 못하는 언어라면, 그 언어의 토대란 얼마나 빈곤한 것인가? 대중을 상대로 언어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내가 쓰고 싶어서‘ 혹은 ‘그게 가장 적확하다고 느껴져‘ 혐오를 담은 발화를 한다? 고민 안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안는다.

(‘저년‘ 과 ‘화냥기‘라는 말 없이 예술 못 하나요? 中)

- P143

허디는 ‘대안적인 아이 보기 체계‘가 인류학적으로 흔했으며, 협동적 보살핌의 결과도 좋았다고 말한다. 또한 ‘대행 어머니‘가 ‘어머니‘ 보다 헌신적이면 그 애착이 더 우월할 수 있다고도 강조한다.

(황교익은 왜 모성 신화에 집착하나 中)

- P201

내가 생각하기에 명절은 무너져 가는 가부장제를 복구하기 위해 매년 두 번씩 열리는 애달픈 축제다.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현대인을 ‘가부장제 기반 정상 가족 부흥회‘에 억지로 끌고 온다. 제아무리 잘난 여성이라도 이 축제에서는 그냥 ‘며느리‘가 된다. 오랜만에 남자와 어른을 중심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것을 보면서 가부장제는 ‘아직 우리 안 죽었지‘라며 숨을 헉헉댄다.

(명절이란 무엇인가 : 가부장제 심폐 소생술 하는 날 中)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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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쌉싸름한 초콜릿>

잘 읽었다. 나는 중남미의 소설들이 체질에 맞는 것 같다. 영미문학은 10권을 읽어야 1권정도 맘에 드는 것을 만나는데,

중남미 소설은 보통 거의 다 좋았다. 근데 분위기가 거의 비슷하달까.

뭔가 환상과 현실이 항상 공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 좋다. 무속신앙이나 한(恨)과 같은 감정은 우리와 비슷한 것도 같고.

말이 나와 말인데  내가 거리감 없이 읽을 수 있는 문학을 순서대로 꼽자면,

한중일, 중남미, 영미, 러시아 순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작품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화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러시아 문학은 정말 읽기 힘들다. 일단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나라마다, 대륙마다 각각의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번역의 문제인가?

 

<언브레이커블>

믿을만한 이의 추천으로 본 영화인데 실망스러웠다. 너무 지루했다.

근데 벌써 20년 전 영화다. 그래서 그런걸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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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인들이 추천하는 양서, 서울대생들에게 필독서로 읽히는 이 책이 내겐 독서의 즐거움보다는 읽고 넘어가야할 의무감 정도의 기억으로 남았음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화자가 ’, 주인공의 이름인 오스카르’, 후반부에서는 주인공의 성인 마체라트로 뒤섞인 표현방식과 과거와 현재 정신병원과 일상에서의 생활을 넘나들며 진행되는 구성방식은 매끄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방지턱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자칫, 자주 혼란스러움을 주었다.

주변의 인물, 상황, 사물에 대한 지나친 세부적 표현은 지루함을 참아내지 못하는 내게 사선읽기의 충동을 제시했다. (‘소설은 이런 속독을 발휘해도 된다.)

결국 나의 책 읽는 능력(재미를 벗어난 작품의 질적인 통찰력, 단순치 않은 작가의 의도, 논픽션적인 사실적이고 산문적인 내용의 수용력 등)의 한계를 실감한 계기가 된 셈이다.

 

2, 3부로 나뉘어진 <양철북>은 작가가 2차 세계대전 중 겪은 포로 생활, 농사, 석공일, 조각가, 도안가로서의 빈곤한 생활의 경험을 살린 익살과 현실 사회에 대한 비판을 직설적으로 폭로한 귄터 그라스의 대표적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 오스카르는 어른들의 부정적인 세계에 반항하여 스스로 지하실에 떨어짐으로써 자신의 성자을 멈춘다. 그의 분신인 희색과 빨강색 페인트의 양철북의 두드림과 유리창을 깨뜨릴 수 있는 괴성의 초능력으로 세상을 거부하며 3살에 머물길 작정한다.(1)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여러 직업을 떠돌며 아버지 마체라트의 죽음을 계기로 양철북을 묘지에 합장하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성장을 시작해 성인으로써 정상적인 생활을 시도한다.(2)

 

정상보다 크게 보이는 머리는 두 어깨 사이의 굽은 듯한 목 위에 얹혀져 있어 꼽추라 불리기도 하는 주인공은 신장 1m23cm(후에 조금 더 자람), 몽상적인 푸른 눈, 숱이 많은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칼, 체구에 비래 강인해 보이는 두 팔과 아름다운 손, 더듬거리나마 쓰기는 가능하게 된 주인공 오스카르는 묘비조각가, 누드 모델, 북 연주자의 직업을 두루 거치며 일반인으로 살아가던 중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3)

 

카슈바이의 감자밭, 적장의 치마 속으로 묘사되는 출생의 시작인 외할머니 안나 브론스키, 모친 아그네스와 부친 얀브론스기, 추정상의 아버지 마체라트와의 뒤얽힌 불륜의 사랑.

아들 쿠르트가 의붓동생일 가능성을 추측케하는 아내이자 연인 마리아와 아버지 마체라트와의 한낮의 정사 등으로 형성된 가족관계, 두 잔쟁이 사이의 또 주인공과 간호사와 외설적 설정, 혈연과 친지들의 죽음을 냉담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주인공을 통해 현실의 실체와 사회관을 풍자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강하게 느껴진다.

 

작가에게는 우리에게 타성화되고, 익숙해있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어쩔 없이 변질될 수 밖에 없다고 당연시 되는 인간성에 대해 인식할 자극을 주고 경고할 책임감이 본능 같이 내재되어 있는가.

 

<양철북>은 내게 레퀴엠 같은 낮고 깊은 침묵과 같은 음률과 게오르규의 <24> 같은 잔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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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명의 작가들이 살아온 살아갈 날들의 진솔한 가슴 속의 이야기들로 엮어져 있다.

 

현재 부안에서 변산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는 윤구병씨의 어릴적 고향에서의 훈훈했던 회상의 글.

60을 바라보는 나로서는 야망, 도전을 부르짖는 이들보다 온기를 전해주는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이들이 더 부럽다.

 

2. 신앙과 행복은 내 안에 있고, 나와 함께 시작한다는 시인이기도 한 이현주 목사

 

3. 감수환 추기경, 박완서 작가, 정영희 교수, 이태석 신부를 떠나보내고(이 글을 쓸 때는 모든 분들이 생존해 계셨다) 홀로 암투병을 견뎌내는 부산 베네딕도 수녀원의 이해인 수녀님의 삶은 고행이다.

 

4. ‘칼의 노래’, ‘자전거 여행’, ‘현의 노래’,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 기자출신답게 관찰력이 돋보이는 글들을 예리한 구사력으로 속도감 있고 명쾌하게 들려준다.

 

5. 가발공장 여공으로 출발, 미국에서 소령으로 예편,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서진규의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의 이야기.

그녀의 삶에는 한 켜의 굳은살이 박혀있을 듯, 날 노곤하게 한다.

 

6. 인간이라면 당연해야 할 인생에 불어닥친 태풍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소망인 동화작가 정호승, 그의 글엔 꽃 이야기, 사랑, 눈물, 외로움 등의 여린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7. 평생 자연과 아이들에게 파묻혀 살았지만 도시에서 부러움없이 나이 먹은 이들에게 고향같은 인생을 산 섬진강을 상징하는 임실 초등학교의 김용택 선생님이자 시인.

 

8. 평형, 평등에 깊은 관심을 품고 있는 교수이자 작가 김승희

 

9.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목발을 짚는 소아마비) 작가로 성공한 장영희 교수. 그녀의 아버지가 사사받은 뉴욕 주립대학의 거버 박사가 그녀의 지도교수였다는 학문적 자부심의 가정이 개인적으로 무척 부럽다.

 

10. 귀농학교, 생명공동체 창립, 대안 교육, 환경연대운동 등 도법 스님의 농촌 살리기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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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도시가 불길에 휩싸였다.

모든 것은 재가 되었고 바람과 햇볕마저도 잿빛이었다.

죽어서 누워있는 이들이 부럽다는, 사내라 불리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은 늘 춥고, 배고프고, 무섭고.... 선과 악에 대해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묻고, 대답하는 것으로 부자간의 애정을 주고받는다.

 

세상이 사그러들 때, 종말의 시각이 이런 모습일거다라고 사내는 생각한다.

따라다니는, 준비된 죽음이 몸 안에 찾아들 때까지 살아내야하는 의미 없고, 이름 없는 날들을 길(ROAD) 위에서 헤맨다.

 

아주 드물게나마 인기척을 느끼긴 하나 서로가 적이어서 서로 몸을 숨겼고, 살아남은 자들끼리는 인육을 약탈당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칼날같이 곤두세웠다.

 

죽음, 고요, 암흑, 공포, 널브러진 시체, 영혼 없는 영혼, 사라진 미래가 떠도는 길 위에서 행운의 여신에게 어린 아들을 맞기고, 사내는 각혈을 하며 익숙해진 죽음에 합류한다.

 

죽음의 광야에서조차 선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으려 했던 어린 아들은 멸망한 대지 위의 맥을 이어나갈 선의 무리를 만나 죽음을 면한다.

한권의 소설을 읽으면서 기적 같은 만남의 3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인 따스한 장면이었다.

 

휴식때는 과학자들과 어울린다는 외로움, 어둠, 불신,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희망과 고뇌하는 은둔의 작가. 코멕 메카시는 70이 넘은 나이에 10살 된 아들을 호텔에 재워두고 산책하던 중 마을과 온 산이 화염에 휩싸이는 상상을 하며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하니 소설의 동기와 핵심은 부성애에 있는 것 같다.

 

생존자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과거의 파괴된 흔적과 고통스런 현실을 작가는 길 위의 아수라장이 된 상황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설 속의 어린 아들이 꾸준히 질문하는 착한 사람의 존재 여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이 소설의 출발이 된 평화롭게 자고 잇는 아들의 모습과 그 아들이 성장하며 견뎌내야 하는 비인간적인 세상을 연상시킨다.

 

딸이 재미있다고 성대 도서관에서 빌려다 준 책, 어린 두 딸의 재롱을 늘어놓으며, 시아버지가 용돈을 주셨다는 흥겨움, 시아주버님이 준 고가의 그 무엇(난 이름도 모르는)을 자랑하며.... 그래도 내면엔 채워지지 않는 삶의 무거운 무게를 느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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