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하지 않고는 진솔한 대화가, 허심탄회한 관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은 보통 초면에 나이를 묻고 형-동생, 선배-후배의 위계를 정립한 다음에야 흉금을 터놓고 상대를 대했다. 윗사람을 만나면 입과 손발이 바빴고, 아랫사람을 만나면 지갑이 분주했다. 여성의 삶도 기구하다 생각했지만 결국 저렇게 되는 남성의 삶도 이상했다. 남자들은 왜 그럴까, 늘 궁금했다. (프롤로그 / 6p.)

우는 남자, 말 많은 남자, 힘없는 남자도 괜찮다고 토닥인다. 군대가라 떠밀고, 데이트 비용과 집 장만의 부담을 주고, 아담한 키와 작은 성기에 주눅들게 하는 주체가 ‘김치녀‘가 아니라 ‘가부장제‘라는 걸 알게 된다. 그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남성의 삶도 자유로워진다.(2장 페미니즘 공부하는 남자 / 52p.)

지금껏 이념과 사상을 공유했던 이들이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를 지적하고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면 ‘믿었던 oo마저 그럴 줄 몰랐다‘며 구독을 해지하고 지지를 철회할 게 아니라, 어쩌면 내가 틀린건 아닌지 성찰해보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 아닌가.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 정도의 자기 객관화도 안되는 사람들이었나. 그럼 지금껏 보여줬던 문제의식과 비판적 사고는 단지 경제적 기득권에 속하지 않아서 그랬단 말인가. (3장 선생님, 혹시 주말에 강남역 다녀오셨어요? / 78p.)

남성 암 환자는 97퍼센트가 아내의 간병을 받지만, 여성 암환자를 간병하는 남편은 28퍼센트에 불과하다. 간병만 안 하면 양반이다. 여성 암 환자의 이혼율은 남성 암 환자의 네배다.(3장 선생님, 혹시 주말에 강남역 다녀오셨어요? / 86p.)

남성은 살고, 여성들은 살아남는다. 10퍼센트 남짓한 신고율에도 연간 3만 건 이상의 성범죄 사건이 접수되는 나라에서, 보복의 두려움에 떨며 어렵사리 신고해도 3분의 1만 기소되는 나라에서, 남편 혹은 남자친구의 손에 매년 백 명 이상의 여성이 살해되는 나라에서, 여성이 남성 임금의 3분의 2도 받지 못하고 남성보다 5년 먼저 퇴직하는 나라에서.(3장 선생님, 혹시 주말에 강남역 다녀오셨어요? / 98p.)

누구나 약자의 자리에 놓일 때가 있다.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보다 상대적 강자이지만 자본가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대학에서 교수는 갑 중의 갑이지만 교수 사회에서는 출신대학으로 차별받는다. 1차 하청업체는 2차 하청업체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지만 원청 대기업 앞에서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한국에서 남성-비장애인-이성애자-자본가로 살면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었을 것 같지만 미국에 가면 ‘옐로 몽키‘에 불과할 수 있다.(3장 선생님, 혹시 주말에 강남역 다녀오셨어요? / 102p.)

다음 날에는 KBS 2TV의 예능방송 <우리 동네 예체능> ‘족구‘편을 보여줬다. 군인 팀과의 족구경기에서 패배한 연예인 팀은 걸 그룹과 통화하고 싶다는 군 장병의 소원을 들어준다. 전화가 연결된 걸 그룹은 노출이 심한 복장으로 군부대를 방문해 선정적인 춤을 추며 위문 공연을 펼쳤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육체로 국가의 부름을 받은 남성을 위무한다는 점에서는 일본군 ‘위안부‘와 근본적 원리가 비슷하지 않느냐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을까.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했을까. (4장 800명의 남학생과 함께 / 116p.)

종합해보면 ‘개념녀‘는 모든 방면에서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인 태도를 지녔지만 경제관념만은 현대적이고 평등을 지향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념녀‘는 남성이 유리한 지점은 그대로 유지하고 불리한 부분까지 유리하게 바꾸겠다는, 남성들의 무지한 욕망이 그대로 묻어나는 정치적인 용어다. (4장 800명의 남학생과 함께 / 126p.)

남성과 여성이 합성어를 이루는 경우에는 남성이 앞에 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순서를 바꾸면 어색하다. 부모, 자녀, 부부, 아들딸, 신랑신부, 장인장모, 형제자매, 남녀노소, 신사숙녀, 선남선녀, 1남2녀가 그렇다. 물론 항상 남성이 앞에 오는 것 아니다. 욕하거나, 낮추거나, 천하거나, 인간이 아니거나, 성적인 의미가 있을 때는 여성이 앞에 온다. 년놈, 에미애비, 비복婢僕, 암수, 자웅, 처녀총각이 그렇다. (4장 800명의 남학생과 함께 / 132p.)

리베카 솔닛은 그의 책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흑인 남성이 백인 남성보다 페미니즘을 잘 이해한다고 말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고, 차별도 받아본 사람이 잘 안다. 성소수자와 페미니스트가 연대하는 것, 페미니스트 중에 채식주의자가 많은 것도 자연스럽다.(5장 혐오와 싸우는 법 / 160p.)

여성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많은 수의 마이너리티다. 이 문제를 딛지 않고서는 평등도, 평화도 없다. 먼 미래를 보고 긴 호흡으로 살자. 나에게 유리한 쪽보다 우리에게 유익한 쪽에 서서.(5장 혐오와 싸우는 법 / 1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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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책이 감동적이거나, 유익하거나, 교훈을 줄 필요는 없다. 익살맞고 재미있기만 한 책도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아니, 오히려 배꼽이 빠지도록 웃기고 재치 넘치는 책들이 오로지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오늘 만난 책 <지렁이의 일기>도 그러한 책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책 표지에는 말 그대로 지렁이가 일기를 쓰고 있다. 매우 똘망똘망해 보이는 소년 지렁이다. 지렁이인데도 불구하고 아들로 삼아 키우고 싶을 법하게 제법 진지하고 건강하고 똘똘해 보이는 표정이다. 게다가 뒷표지를 살펴보면 풋, 하고 웃음이 나온다. 지렁이 소년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65일자의 일기를 쓰고 있는데, “누군가 지금 내 일기를 훔쳐보고 있는 것 같아...” 란다. 아마도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귀엽기까지 한 이 지렁이, 정말 키워보고 싶다.

 

<지렁이의 일기>는 거창하게 지구는 우리에게 필요한 걸 모두 다 준다, 땅굴을 파는 건 지구를 도와주는 일이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환경을 다룬 이야기는 아니다. 진지하다가도 갑자기 딴 소리하는 초딩 아들 녀석 같이 -나는 비록 아들이 없지만서도- 진득하지 못한 진짜 리얼 지렁이 소년의 일기다.

지렁이 소년은 엄마, 아빠, 누나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산다. 학교도 다니고, 거미하고는 친구 사이다. 하지만 그의 일기를 보면 지렁이만이 겪을 수 있는 경험(?)이 들어있다. 그리고 이것이 이 일기를 훔쳐보는 이유다.

 

지렁이는 오늘 거미에게 땅굴 파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다리 없는 지렁이가 다리가 무려 8개인 거미에게 땅굴 파는 법을 가르쳐주다니. 결국은 실패다. “, 관두자.” 라며 가르치기를 포기하는 지렁이. 거미의 능력이 그것밖에 안됨에 실망한 눈치다. 하지만 거미에게 거꾸로 매달리는 법을 배운 다음날의 일기에는 지렁이는 거꾸로 매달릴 수 없다는 걸 알았다.”는 겸손한 한 줄이 들어있다. 그러니 자고로 아이들이란 친구로부터 자신의 한계를 배우며 자라는 법이다.

 

4월 어느 날의 일기에는 낚시철이 시작되어서 가족 모두 땅 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나는 문득 <안네의 일기>가 생각이 났다. 가끔은 사람의 역사나 지렁이의 일상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기도 하다.

 

5월엔 할아버지의 예의범절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듣고 처음만난 개미에게 아침인사를 한다. 맙소사, 그 개미 뒤로 600마리가 넘는 개미들이 줄지어있을 줄이야. 지렁이는 하루 동일 서서 인사를 해야 했다. 가끔 어른들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다가 낭패를 보는 날도 있는 것이다.

 

하루는 자기가 아주 예쁜 줄 아는 누나에게 누나 얼굴은 누나 꼬리랑 똑같이 생겼으니 거울을 봐도 소용없다고 말했다. 누나는 충격을 받았겠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나와 지렁이 친구 거미는 뒤집어지도록 웃었다. , 지렁이의 엄마는 그렇지 않았으니, 그날 꽤 야단 좀 맞았을 거다.

 

이렇듯 지렁이 소년의 일기는 익살맞다. 초등 아들 내미의 일기를 읽듯이-다시 말하지만, 나는 아들은 없지만, 딸의 일기를 훔쳐 읽는 것도 꽤 재미있다.- 아이들의 생각은 솔직하고, 진솔해서 바로 그 부분에서 웃음이 터져나오는 법이다. <지렁이의 일기>도 그렇다. 우리의 일상과 다른 듯 닮은. 그것이 이 책의 교훈일까? 어떤 생명이라도 어쩌면 제 나름의 생과 일상이 있을 거라는? 그렇게까지 말하자면 밑도 끝도 없이 지구를 들먹이며 끝나는 이 책의 결말처럼 아쉽기도, 어거지 같기도 할 것이다. 그냥 공감대라고만 해두자.

 

하지만 사실은 공감까지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냥 재밌으면 그만이다. 배꼽 빠지게 웃기지는 않을지 몰라도 입꼬리 비실댈 정도로는 웃음을 선사할 것이다.

그러니, 귀엽고 장난스러운 이 지렁이 소년의 일상을 킥킥대면서 훔쳐보자. 장마 지나고 꿈틀대며 올라오는 지렁이들이 아마 꽤 사랑스럽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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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호흡, 큼직한 공기의 흐름이 들려온 뒤에 그녀가 오늘 밤의 마지막 질문을 했다.
"내가....."
"......"
"내가, 죽는게 정말 너무 무섭다고 말하면, 어떻게 할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고 뒤돌아보았다.(143p.)

"아니, 우연이 아냐. 우리는 모두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너와 내가 같은 반인 것도, 그 날 병원에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야. 그렇다고 운명 같은 것도 아니야. 네가 여태껏 해온 선택과 내가 여태껏 해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했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난 거야."(196p.)

나를 내려다보는 나에게 말해주리라. 나는 타인과 교류하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나 혼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은.(2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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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의 책과 영화.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은 장애아를 둔 엄마의 이야기이다. 읽을 만 했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제도적 헛점, 그리고 그들의 생활과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그들의 삶이 불행할 것이라는 나의 속단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게 되었다.

<어톤먼트>는 너무 재미가 없었는데,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키이라 나이틀리가 나와서 끝까지 잘 보았다. 게다가 어린 브라이오니 역할을 맡은 여배우도 매력적이었다. 안타까운 비극의 내용이지만, 음미하기에 내 생활이 너무 곤한듯 하다.

<남아 있는 날들의 글쓰기>는 정말 제목만큼 애매한 책이다. 이것이 글쓰기에 대한 책인지, 혹은 죽음에 관한 책인지는 원제인 <The Art of Death ; Writing the final story> 에서부터 아리까리하더니 (The Art of Death 는 The Art of 로 시작되는 시리즈 명인듯 싶다.) 우리말로 붙어 있는 '죽음은 그로부터 모든 것을 앗아가지 않았다.'는 부제? 까지 더해 더 헷갈리게 만들었다.

여하튼 읽고 보니 그럴 것도 아닌 것이 실제로 이것은 죽음을 겪는 어머니와 작가의 사적이면서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작가가 읽은 많은 책들, 톨스토이, 토니 모리슨, 알베르 카뮈, 크리스토퍼 히친스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그들의 작품이 이야기하는 많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 즉, 대문호들이 죽음을 다룬 방식에 대해서까지 광범위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좀 정신 산란한 점이 없지 않고, 읽다 말고 작가에게 "요점이 뭡니까?" 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좀 들지만, 밑줄을 정말 많이 치고 읽을 만큼 좋은 문장들도 많았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얼마전에 읽었던 켄트 하루프의 <축복>이 떠오르기도 하고. 여하튼 요즘, 엄마가 많이 생각나는 날들이었는데, 이 책을 만나면서 더 깊이 엄마와 엄마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이번주의 책과 영화는. <내 마음의 낯섦>,<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이다. <내 마음의 낯섦>이 너무 두꺼워 두권을 다 읽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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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죽음‘으로 죽는다. 마르케스는 죽음을 "일생동안 경험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죽음에 다가서는 것, 특히 병으로 인해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은 소극적이거나 단조로운 경우가 드물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일생에서 가장 중대한 전투를 치른다. 죽어가는 것이란 톨스토이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언급한 것처럼 "맹장이나 신장의 문제가 아닌, 삶... 그리고 죽음의 문제"이다.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 글을 쓰거나 이야기하는 행위는 스스로의 삶을 능동적으로 이끌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한다. 죽어감에 대해 글을 쓰거나 녹음하는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죽음을 맞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소극적인 인물로 표현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이 죽음에 결국 항복했다 해도 그 자체가 어려운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이건 늙은 사람이건 죽어가는 사람들은 대개 죽음을 그냥 받아들이기보다 죽음에 맞서 투쟁한다.(죽어가는 삶 中. 32~33p.)

레지아 고모의 마지막 순간도 토니 모리슨의 1973년도 소설 <술라>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술라의 마지막과 비슷했을까?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고모의 머릿속에는 어떤 이미지가 스쳐갔을까? 심한 피로감과 에너지 고갈로 "비명을 지르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시기는커녕 입술조차 떼기 힘든" 느낌이었을까? 고모는 죽음의 저편에 영원한 잠과 단비 같은 휴식이 있을거라 생각했을까? 혹시 죽음이 생각했던 것보다 고통스럽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까?(아르스 모리엔디 中. 39p.)

그는 <참회록>에서 맹수를 피하기 위해 우물에 뛰어들려 하는 나그네의 우화를 이야기한다. 그 우화에 나오는 우물 바닥에는 용이 한마리 있어서(...) 우물에 뛰어들어도, 뛰어들지 않아도 죽을 판국에 처한 나그네는 우물 틈바귀에 자라 있는 야생 관목가지에 매달려 버텨 보려고 한다. 그러던 나그네의 눈에 쥐 두 마리가 관목 줄기를 갉아먹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그네는 자신의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체념한 그는 관목 잎에 두 방울의 꿀이 맺혀 있는 것을 보고 그 꿀을 핥기 시작한다. 톨스토이는 이 우화를 통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있는 우리에게 꿀이 전부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두 방울의 꿀... 가족을 향한 사랑과 내가 예술이라 불렀던 글쓰기에 대한 사랑조차 더 이상 내겐 달콤하지가 않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아르스 모리엔디 中. 43p.)

나는 죽음에 대해 글을 쓸 떄 죽음이란 평범하고 심지어 일상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 내가 아는 사람이나 아끼는 사람은 아니지만 세상 어디에선가 늘 누군가는 죽음을 맞고 있다. 나는 내게는 지독하리만큼 슬프고 힘든 죽음이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 죽음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언제나 타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이는 과장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나는 브렌다 유랜드가 <글을 쓰고 싶다면>에서 언급한 "미세한 진실"을 고수하려 하는 편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보편적인 것을 묘사하길 원할수록, 구체적인 것을 더욱 자세하고 더욱 진실하게 묘사해야 한다."(함께 죽는 것 中. 70~71p.)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또 어떤 멜로드라마에서 보면 자살은 일종의 고백과도 같다. 자살이란 삶을 감당할 길이 없음을, 혹은 삶을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행위다."(죽음의 소망 中. 100p.)

우리들 역시 히스턴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특히 우리의 어머니가 죽으면-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허스턴의 <길 위의 먼지 자국>, 시몬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 메리 고든의 <어머니에 대하여> 등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한 딸들이 쓴 소위 "회고록"이라는 문학 장르를 보면,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사실은 동일한 가공인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어떤 이들은 어머니에 대해 직접적이고, 유머러스하게 이야기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어머니에 대해 사려 깊게, 호기심을 갖고, 감상적이게, 비통하게, 빈정대듯이, 또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이야기한다. 이야기하는 방식은 모두 달라도 우리 모두에게는 어머니를 잃었다는 공통점과,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글을 통해 죽음이라는 불가사의한 대상을 이해하고자 한다는 또 다른 공통점이 존재한다.(돌고 도는 슬픔 中. 160p.)

죽으면서 미소를 짓는 일은 꽤 흔하게 관찰되는 현상이다 몸에서 죽음을 받아들이기 전 일종의 희열 상태를 느낄 수 있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하기 때문인데, 이때 분비되는 도파민과 세로토닌은 사랑에 빠진 살람들의 뇌에 분비되는 것과 같은 물질이다.(돌고 도는 슬픔 中. 177p.)

"내 의지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니 내 의지로 떠날 수도 없지."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는 말끝을 흐렸지만, 우리는 아버지가 죽음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돌고 도는 슬픔 中. 186p.)

어머니는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였지만, 나는 여전히 슬픔으로 몸부림쳤다. 누군가의 품에 안겼던 사람을 빼앗아 가 데려다 놓은 곳이 천국이라면 천국이 그리 좋은 곳만은 아닐것 같았다. 주님을 섬기다가 죽은 사람들은 행복할 지 몰라도, 그들을 빼앗겨 버린 불쌍한 우리 나머지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돌고 도는 슬픔 中. 189p.)

그리고 바라건대, 간절히 바라건대 제 자녀들이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들이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저는 이제 그들의 엄마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빛의 기둥, 그들의 무지개, 그들의 달 무지개, 그들의 해 무지개, 그들의 영광, 그들의 새로운 하늘이기 때문입니다.(돌고 도는 슬픔 中. 20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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