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책이 감동적이거나, 유익하거나, 교훈을 줄 필요는 없다. 익살맞고 재미있기만 한 책도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아니, 오히려 배꼽이 빠지도록 웃기고 재치 넘치는 책들이 오로지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오늘 만난 책 <지렁이의 일기>도 그러한 책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책 표지에는 말 그대로 지렁이가 일기를 쓰고 있다. 매우 똘망똘망해 보이는 소년 지렁이다. 지렁이인데도 불구하고 아들로 삼아 키우고 싶을 법하게 제법 진지하고 건강하고 똘똘해 보이는 표정이다. 게다가 뒷표지를 살펴보면 풋, 하고 웃음이 나온다. 지렁이 소년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65일자의 일기를 쓰고 있는데, “누군가 지금 내 일기를 훔쳐보고 있는 것 같아...” 란다. 아마도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귀엽기까지 한 이 지렁이, 정말 키워보고 싶다.

 

<지렁이의 일기>는 거창하게 지구는 우리에게 필요한 걸 모두 다 준다, 땅굴을 파는 건 지구를 도와주는 일이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환경을 다룬 이야기는 아니다. 진지하다가도 갑자기 딴 소리하는 초딩 아들 녀석 같이 -나는 비록 아들이 없지만서도- 진득하지 못한 진짜 리얼 지렁이 소년의 일기다.

지렁이 소년은 엄마, 아빠, 누나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산다. 학교도 다니고, 거미하고는 친구 사이다. 하지만 그의 일기를 보면 지렁이만이 겪을 수 있는 경험(?)이 들어있다. 그리고 이것이 이 일기를 훔쳐보는 이유다.

 

지렁이는 오늘 거미에게 땅굴 파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다리 없는 지렁이가 다리가 무려 8개인 거미에게 땅굴 파는 법을 가르쳐주다니. 결국은 실패다. “, 관두자.” 라며 가르치기를 포기하는 지렁이. 거미의 능력이 그것밖에 안됨에 실망한 눈치다. 하지만 거미에게 거꾸로 매달리는 법을 배운 다음날의 일기에는 지렁이는 거꾸로 매달릴 수 없다는 걸 알았다.”는 겸손한 한 줄이 들어있다. 그러니 자고로 아이들이란 친구로부터 자신의 한계를 배우며 자라는 법이다.

 

4월 어느 날의 일기에는 낚시철이 시작되어서 가족 모두 땅 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나는 문득 <안네의 일기>가 생각이 났다. 가끔은 사람의 역사나 지렁이의 일상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기도 하다.

 

5월엔 할아버지의 예의범절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듣고 처음만난 개미에게 아침인사를 한다. 맙소사, 그 개미 뒤로 600마리가 넘는 개미들이 줄지어있을 줄이야. 지렁이는 하루 동일 서서 인사를 해야 했다. 가끔 어른들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다가 낭패를 보는 날도 있는 것이다.

 

하루는 자기가 아주 예쁜 줄 아는 누나에게 누나 얼굴은 누나 꼬리랑 똑같이 생겼으니 거울을 봐도 소용없다고 말했다. 누나는 충격을 받았겠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나와 지렁이 친구 거미는 뒤집어지도록 웃었다. , 지렁이의 엄마는 그렇지 않았으니, 그날 꽤 야단 좀 맞았을 거다.

 

이렇듯 지렁이 소년의 일기는 익살맞다. 초등 아들 내미의 일기를 읽듯이-다시 말하지만, 나는 아들은 없지만, 딸의 일기를 훔쳐 읽는 것도 꽤 재미있다.- 아이들의 생각은 솔직하고, 진솔해서 바로 그 부분에서 웃음이 터져나오는 법이다. <지렁이의 일기>도 그렇다. 우리의 일상과 다른 듯 닮은. 그것이 이 책의 교훈일까? 어떤 생명이라도 어쩌면 제 나름의 생과 일상이 있을 거라는? 그렇게까지 말하자면 밑도 끝도 없이 지구를 들먹이며 끝나는 이 책의 결말처럼 아쉽기도, 어거지 같기도 할 것이다. 그냥 공감대라고만 해두자.

 

하지만 사실은 공감까지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냥 재밌으면 그만이다. 배꼽 빠지게 웃기지는 않을지 몰라도 입꼬리 비실댈 정도로는 웃음을 선사할 것이다.

그러니, 귀엽고 장난스러운 이 지렁이 소년의 일상을 킥킥대면서 훔쳐보자. 장마 지나고 꿈틀대며 올라오는 지렁이들이 아마 꽤 사랑스럽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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