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입이 없는 것들 (이성복)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치는 갈매기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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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누가 독자 입장에서 좋은 소설이 뭐냐고 물으면 나는 아름답고 재미있으면서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이 세가지 모든 측면에서 <진주 귀고리 소녀>는 별 다섯이 아깝지 않은 소설이다. 작가는 어리지만 날카로운 눈과 신중한 판단력을 지닌 화자를 내세우고 그에 걸맞는 투명한 단문체를 구사함으로써 소설의 소재가 된 그림만큼이나 아름다우며 신비롭고 불가해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소설의 화자인 그리트는 폭발사고로 시력을 잃은 타일제조공의 딸이다. 나중에는 푸주간집 아들과 결혼해 평범한 삶을 살지만, 16세에서 18세 사이의 두 해 동안 그리트는 당대에 이미 상당한 명성을 누리고 있던 화가 베르메르의 집에서 하녀 생활을 하며 복잡하고 아득하고 쓸쓸한 경험을 한다.

빛깔과 구도에 유달리 섬세한 눈을 지닌 그리트에게 이끌려 베르메르는 원래 그녀의 몫이 아닌 물감재료를 구입하고 물감을 준비하는 등의 일을 시키고, 나중에는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까지 그리게 된다. 그리트 역시 화실 청소를 하면서 본 주인의 눈부신 그림에 매혹되고, 자기도 모르게 그림에 대해 하녀로서는 주제넘다 할 수도 있는 의견을 내며 점점 더 자신이 속하지 않는 영역으로 끌려든다. 당연히 이 둘은 나이의 차이와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이끌리지만, 흥미롭게도 작가는 그러한 이끌림을 소설 속에서 한 번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노골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오히려, 모호하고 유유부단하면서도 (최소한 그리트의 눈에는) 매력적인 베르메르가 얼마나 '이기적인' 인물인가 하는 것이다. 그는 그리트가 곤경에 처할 것을 알면서도 그림의 제작을 승낙하고, 그녀를 모델로 만들고, (그리트가 절대로 벗고 싶어하지 않는) 두건을 풀게 하고, (그리트가 몸에 두르고 싶어하지 않는 색깔인) 이국적인 푸른빛과 노란빛의 천을 대신 두르게 하며, (그리트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귀걸이를 착용하게 하며, 그녀로 하여금 제 손으로 그 귀걸이를 위한 구멍을 뚫다가 기절하게 만들고, 그리고 (부도덕한 여성만이 보이는 모습이라는) 입을 약간 벌리는 얼굴을 할 것을 요구한다. 그로 인해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일 때에야 그는 드디어 만족한다.

그리트는 이 모든 요구들 아래 놓인 함정을 다 꿰뚫어보면서도, 반은 매혹의 힘에 이끌려 그리고 반은 자신의 의지력에 따라 그 함정들 속으로 자진해 걸어들어간다. 이 총명하고 입이 무거우며 의지력이 강한 소녀가 자신의 발목을 자를지도 모르는 지뢰밭을 천천히 거니는 장면 장면은 소설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 둔중하면서도 공명이 강한 감동을 남긴다.

나는 그것이 베르메르에 홀린 철없는 소녀의 미칠 듯한 사랑이었다기보다는, 어둡던 그녀의 삶을 유일하게 밝혀준 그의 그림에 대한 헌신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게다가 굴욕을 느끼면서도 그리트가 베르메르의 요구를 들어주었던 것은, 반은 그를 사랑해서였는지도 모르지만, 더 엄밀하게는 그녀가 그에게 진 빚 때문이었다. 베르메르는 그녀의 부모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녀에게 하녀 자리를 주었고, 그녀에게 소중했던 할머니의 빗을 되찾아준 사람이었다.

삶은 좀처럼 낭만적인 것이 되지 못해서, 결혼으로 그리트가 빚지게 되는 사람은 이번에는 남편이다. 그녀가 피터와 결혼한 건 부모의 식탁에 가끔이라도 고기점을 얹어줄 수 있기 위해서였고, 남편 피터는 베르메르의 집에 외상으로 넘겨준 고기값을 받지 못한 것이 하녀와 결혼한 가격이라 농담한다. 아버지의 색이 고운 타일과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예쁜 빗을 아끼던, 손톱 아래 배이는 고기의 핏물을 꺼려하던 그 소녀는 결국 매일 피흐르는 붉은 고기를 잘라 파는 푸주간집 아낙이 되었다.

죽으면서 베르메르가 그녀에게 남겼다는 진주귀걸이는 그래서 그녀에게 이루어지지 않은 애달픈 첫사랑의 기억 따위를 상기시키지 않는다. 베르메르가 남긴 진주귀걸이는 그 빚의 뒤늦은 청산이었다. 그녀는 20길더 중에 15길더를 피터에게 줄 것이다, 여분의 5길더는 자신이 보관할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은 아무 곳에도 쓰지 않을 것이다, 라고 다짐한다.

베르메르는 죽으면서 채무를 갚았다. 그리트는 비로소 빚지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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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5-08-19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고 나니까 이 소설을 다시 읽은 것 같아요. 기억이 새록새록. 이를테면 소프라노로 시작했다가 알토와 테너, 베이스가 합류했다가 각 성부가 하나씩 빠지면서 소프라노만 오롯이 남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렇죠, 그리트는 마침내 빚지지 않은 사람이 되었죠. 사랑을 얘기했으나 채무의 갚음으로 결론을 내시다니, 묘한 느낌이네요. 전 소설 먼저 읽고 영화를 봤는데, 아차 싶었어요. 영화 먼저 보고 소설을 읽어야 아쉬운 감정이 없었을 텐데 말이죠. 하긴 영화가 소설의 디테일한 모서리를 쳐내는 게 당연한가요? ^^

검둥개 2005-08-19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힛 이안님 전 영화 먼저 보고 소설 봤어요. 영화를 먼저 본 게 하나도 안 서운했고, 소설을 읽으면서는 소설을 읽기로 한 제 결정이 너무나 뿌듯했답니다. ^^ 비주얼이 중요한 외국소설들은 확실히 영화를 먼저 보는 게 나름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이 소설을 소프라노와 알토와 테너와 베이스로 이야기하신 건 너무 멋있습니다. ^^
 
 전출처 : 플레져 > 위치

위치

커튼과 커튼이 보폭처럼 펄럭였지만 다른 창문으로 걸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거기에 있는가? 십 년 전에, 혹은, 십 년 후에,

詩 김행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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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개 2005-08-19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좋고, 그림도 넘 좋아서 플레져님 서재에서 퍼왓습니다 ~~ :)
 

화장실에서 (이성복)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엉킨 머리카락을 걷어 변기에 버리면 까만 도너츠 모양이 한 순간 빙빙 돈다 그러면 나는 물을 내린다 한 때 내 것이었던 것, 정화조 속에서 얼마나 더 썩어야 검은 도너츠는 사라질까 한 때 내 것이었던 것, 한 때 나였던 것들을 느닷없는 소용돌이 속에 곤두박질시키며 나는 누구를 버리는가 내가 저를 기억하지 못하매 저가 어찌 나를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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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이성복 시인의 시입니다. 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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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잉크냄새 > 국수가 먹고 싶다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치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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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난 가슴을 안고 돌아서던 사람들 어깨 위로 잔설처럼 쌓이던 외로움을 보면서 상처는 곧 아물어 향기가 나리라 위로했다. 가슴이 울어 두 눈이 충혈된 사람들 뺨 위에 깊게 묻어난 투명한 눈물 자국을 보면서 눈물은 곧 마를 것이라 위로했다. 설령 애틋한 마음 표현하지 않더라도 뜨거운 국수김이 먼지낀 유리창을 뒤덮는 국수집에서 가슴속 울컥울컥 국수를 먹지 못했던가. 

산다는 것이 때론 홀로 눈물자국 간직하는 것이라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눈물자국 간직한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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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개 2005-08-10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올렸던 시 중에 황지우의 "거룩한 식사"라는 게 있었는데 그것과 분위기가 비슷해서 냉큼 퍼왔습니다. 이 시도 아주 맘에 들어요. 동네 국수가게에서 국수 사다 삶아먹던 기억도 나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