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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타오르고 싶다 - 그림 혹은 내 영혼의 풍경들
김영숙 지음 / 한길아트 / 2001년 8월
평점 :
품절
난 어려서부터 미술에 콤플렉스가 많았다.
유치원에 다닐 무렵이던가 한두 달 화실을 다니면서 그림을 배워 본 적도 있었지만, 아마 우리 엄마는 그때 돈이 아깝다고 느끼셨을 것이다.(자식 키워보니까 알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네가 미술이 부족하니 중고등학교에 가면 고생을 할 것 같다'고 얘기하셨다.
아니나다를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미술시간이 즐거웠던 적은 단 한 시간도 없었다.
단순히 미술만이 아니었다.
그림을 못 그린다고 생각하다 보니 스스로 나의 색채감각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고, 뭔가를 꾸미고 가꾸는 일, 심지어는 나 자신을 꾸미고 가꾸는 일에도 무심한 척하게 되었다.
옷 한 벌을 고를 때도 난 내 취향이 없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무심한 척이었지, 무심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대기업의 문화재단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전공이 도서관학이니 뭔가 분류하고 보관하는 일은 잘 할 거라는 윗분의 근거 없는 기대감에 재단이 소유한 수백, 수천 점의 미술품을 관리하는 일을 덜컥 맡게 되었다.
오 마이 갓!
그때까지 난 사무실 내에 있는 미술관조차 발걸음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터였다.
의무감 반, 그리고 오기 반으로 고3때보다 더 열심히 벼락치기 공부를 했다.
재단 소장품을 작가와 매치시켜 외우고, 작가의 프로필을 외우고, 미술잡지를 목차부터 편집후기까지 샅샅이 훑었다.
서양미술사의 사조를 외우고, 작가마다 형성되어 있는 가격대를 외웠다.
그러던 어느 날, 쿠르베의 그림 화보가, 그리고 강연균의 그림이 좋아 보였다.
이발소에 걸려 있는 밀레의 그림도 좋아 보였고, 만화도 아니고 뭣도 아닌 것 같던 샤갈도 좋아 보였다.
미술평론가 이주헌 씨의 말처럼, 자꾸 보다 보니 조금은 알 것도 같고, 조금 알 것 같으니 더 좋아 보이는 것이었다.
감히 내가, 서양미술사를 전공하면 좀 행복해지겠다... 생각을 한 날도 있었다. 미술사를 전공하기 위해 대학원을 가는 친구가 부럽게! 느껴졌다.
요즘은 미술에 대한 책들이 무척 많다. 한젬마의 그림에 관한 책들이 잘 팔리고, 교육방송에서도 그림에 관한 방송이 많아졌다. 손만 뻗으면 그림에 대해 알고싶은 욕구들을 충분히! 충족시켜줄 만한 책들도 많아졌다. 굳이 유럽의 어느어느 미술관에 직접 가지 않아도 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들을 생생하게 감상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김영숙의 <나도 타오르고 싶다>는 책을 좀 일찍 만났었으면, 한 10년 전에 만나서 내가 그림을 좀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녀는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보면서도 '저거 팔면 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아줌마이다. 지금은 어느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다지만, 이 책을 쓸 때만 하더라도 혼자서 보던 그림에 대해 인터넷의 어느 사이트에 글을 올리던 아줌마였다.
난 이런 어줍잖은 리뷰 하나를 쓰기 위해서도 끙끙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올릴까 말까를 망설인다. 그런데 그녀의 글은 그냥 말을 타고 달리듯 휘익~ 갈겨 놓은 것처럼 보이는 글인데, 읽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아니 끌어당기는 정도가 아니라 집어 삼키는 마력이 있었다.
- 어쩌면 그녀도 고민 고민하면서 쓸지도 모른다. 그가 글을 쓰는 걸 본 적은 없으니까. 그렇지만, 난 그렇게 느껴진다는 얘기다.
난 살리에르 근처에라도 가 보려고, 살리에르마저 부러워하면서 사는데, 그녀는 모차르트였다.
미술 감상이 (난 아직도 내 손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만들어야 할 일이 생기면 식은땀이 흐른다. 아이들에게 해 주는 종이접기조차 내겐 힘겹다) 조금씩 즐거워지면서 미술평론가들의 미술작품 소개서들을 사서 읽기를 즐기게 되었는데, 최소한 내가 읽은 책들 중에서는 그 누구도 김영숙이라는 이 아줌마처럼 거침없이 써 내려가진 못했던 것 같다.
내가 고3때보다 더 열심히 외웠던 그 그림 사조들을 그녀는 참 쉽게 설명한다.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을 자세히 보면, 수련을 그린 게 아니라 물감만 찍어놓은 것처럼 되어 있답니다. 모네는 자기가 묘사해내려는 대상 위로 내리쬐는 그 순간적인 빛을 포착하기 위해서 몇날며칠을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를 서성거렸지요. 수련 연작도 시시각각 변하는 수련 연못을 그린 겁니다. 모네의 그림을 신고전주의 화가인 앵그르의 그림과 한 번 비교해보시겠어요?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오달리스크는 누워 있거나 비스듬하게 누운 누드 그림을 말합니다)는 붓자국이 전혀 나 있지 않고 아주 평평합니다. 그리고 유심히 들여다봐도 살갗은 살갗처럼 그려져 있지요. 인상주의 그림이 신고전주의 그림과 다른 점이 바로 그런 거지요.
그리고는 모네의 그림과 앵그르의 그림이 바로 편집되어 있다.
이제 인상주의가 뭔지, 신고전주의가 뭔지 누구라도 절대로 잊지 못한다.
아, 그녀의 또 다른 인상주의 설명,
소개팅할 때 실내에서는 그렇게 잘 생겨 보이던 얼굴이, 애프터로 공원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전혀 달라 보이던 거 기억나시지요?
누가 인상주의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그녀의 책을 보여주었다.
(사실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이라는 그림을 비롯하여 몇몇 그림들 때문에 단 몇 초이긴 했지만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아이들은 내용보다는 마치 그림책을 보듯이 그저 넘기면서 본다.
간단한 그림 설명을 내가 옆에서 덧붙이려다 그만 두었다. 그림을 그림으로서 즐기도록, 그 속에서 마음껏 자유를 느끼도록, 마음껏 상상력을 펼치도록.
그러면서 생각했다.
왜 나 어렸을 때는 이런 책이 없었던 거야.
왜 내가 그림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을 때 이 책은 없었던 거야.
그 두꺼운 잰슨의 [서양미술사]를 뒤적이고 있을 때 도대체 이 아줌마는 뭐했던 거야.
내가 그림을 좋아하기까지 돌아온 25년 이상의 세월이 아깝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지금 이 책을 만난 것을 행운으로 느끼고 있고...